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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뮈텔 주교와 민비 시해사건 - 그의 전망은 정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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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1-06 ㅣ No.98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뮈텔 주교와 민비 시해사건

 

그의 전망은 정확했다

 

 

우리나라 역사에는 지워버리고 싶은 몇몇 장면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민비 시해사건이다. ‘을미사변’이라고도 부르는 이 사건은 1895년 을미년 10월 8일 새벽 5시 30분부터 6시 30분 사이에 경복궁안의 건청궁 곤녕각에서 벌어졌다. 국모(國母)로 불리며 당시의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민비(閔妃) 명성황후를 일본 자객이 칼로 쳐서 죽여벼렸던 것이다.

 

이 사건은 조선에 주재하던 일본 공사 ‘미우라 코로’에 의해 저질러졌다. 미우라 공사는 사건 직후 경복궁에 와서 민비의 시신을 직접 확인하였고, 증거를 인멸하려고 이를 당장 불태우도록 지시했다.

 

당시 조선교구장으로 서울 명동 주교관에 있던 뮈텔 주교는 이 사건 발생 직후부터 이를 알고 있었다. 뮈텔은 이 사건의 경과를 매우 자세히 기록하여 남겨놓았다.

 

 

민비 시해사건의 배경

 

이 사건의 배경으로는 우선 일본의 침략정책을 들 수 있다. 일본은 조선침략 과정에서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켜서 승전하였다. 청국과의 강화조약을 통하여 일본은 청국에서 요동반도를 넘겨받기로 합의하였으나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 국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한편, 청일전쟁 이후 조선에 미치는 일본의 세력이 강화되자 조선은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배척하고자 하였다. 이 계획의 중심에 민비가 있었다. 일본은 조선에 대한 침략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와 전쟁을 하거나 민비를 제거해야 했다.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할 자신이 없었으므로 민비를 제거하는 계책을 세우고, 육군중장 출신의 미우라 코로를 공사로 임명하여 사건을 저지르게 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의 배경에는 민비의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도 개입되어 있다. 여염집의 시아버지와 며느리 간의 사이가 좋지 못할 때에는 집안 문제로 그치게 마련이지만 그들은 각기 국태공(國太公)과 국모(國母)였다. 그들 사이의 투쟁은 곧 정치적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한편, 미우라 공사는 공사관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민비 살해계획을 ‘여우사냥’이라는 암호명으로 부르면서 자신의 계획을 실천에 옮겨갔다. 그는 이 계획에 대원군을 이용할 계책을 세웠다. 미우라는 해산 위기에 처한 훈련대를 이용하여 이들에 의한 쿠데타를 위장하고, 이들이 입성할 때 일본이 낭인들을 동원하여 민비를 시해한다는 계책을 세워 실천하였다.

 

이 계획의 전모를 대원군이 알고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원군은 일본측에 철저히 이용당하였으며, 이 사건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했다.

 

 

을미사변과 뮈텔

 

뮈텔은 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 15분경에 운현궁에 있던 교우 궁녀로부터 일본군이 당시 대원군이 기거하고 있던 마포 공덕리의 별장을 포위하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 일본인들은 그날 새벽 1시경에 대원군의 별장에 가서 대원군에게 입궐을 강요했다. 대원군이 이들과 함께 궁궐로 떠난 시간은 오전 3시경이었다. 아마도 이때를 전후하여 그 별장의 사람들이 이 일을 운니동에 있는 운현궁에 알렸고, 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는 궁녀를 시켜 이 사건의 의미를 10분 정도의 거리에 떨어져 살고 있던 뮈텔에게 급히 문의한 듯하다.

 

그러나 대원군 일행은 새벽 5시 30분경에 경복궁에 도착하여 궁문을 돌파하고, 6시 10분을 전후한 시간에 민비의 처소를 덮쳐서 그를 살해하였다. 뮈텔은 6시경에 40명 가량의 일본 군인들이 궁궐을 향해 뛰어가는 것을 보고서는 조선을 위하여 미사를 드렸다. 미사가 끝난 다음 그는 대원군 일행이 대궐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날 아침 뮈텔 주교는 왕비가 죽었다는 소문도 들었고, 저녁에는 그 소문이 거의 확실하다는 말을 또 들었다.

 

뮈텔은 처음에는 이 사건을 대원군의 복수극으로 판단했다. 민비가 시해된 다음날인 10월 9일, 뮈텔은 민비가 죽었지만 그 죽음은 은폐될 것이고, 그 시체는 불살라졌으리라는 말을 또 들었다. 이후 뮈텔은 민비 시해사건에 관한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적어 그의 일기에 남겨놓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이 사건에 일본측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는 정황을 정확히 파악하기에 이르렀다.

 

뮈텔은 이 사건 직후 일본인들이 그 내막을 조사하겠다고 한 사실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그는 “일본인들이 그런 식으로 조사하게 내버려둔다면 그들은 자신이 무고하다는 결론을 이끌어 낼 것임이 분명하다. 고발을 당한 사람들이 조사를 맡는 예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며 격렬히 반발하였다.

 

뮈텔은 이 사건이 일어나기 40여 일 전에 고종을 알현하여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은 바 있었다. 그때 뮈텔은 고종에게 선의와 헌신을 약속했다.

 

뮈텔은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여드레 후인 10월 16일 서울 주재 서양 외교관 등과 함께 고종을 다시 알현했다. 공식 알현이 끝난 뒤 고종은 뮈텔을 따로 조용히 불러 “나의 처지가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가져도 될까요. 나를 도와주시오.”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에 뮈텔은 “물론입니다. 좋아질 가망이 있습니다.” 하며 위로했지만, 그의 마음은 무척이나 착잡했다.

 

그러나 뮈텔은 민비의 생사에 대해서는 난무하던 소문을 듣고 기록에 남겼다. 곧, 그는 임오군란 때처럼 민비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에 따라 잠시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비의 죽음은 사실로 확인되었고, 친일내각에서는 이 사건의 주모자로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을 지목하여 처형함으로써 사건이 종료되었다. 이러한 광경에 뮈텔은 분노하고 전율하였다.

 

 

남은 말

 

뮈텔 주교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조선에 대한 일본의 정책이 명확히 실패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뮈텔은 일본인들은 조선을 일본에 병합시키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전망은 정확했다. 이 사건 직후 미우라 공사는 일본으로 도망갔다. 일본 정부는 10월 17일자로 미우라 공사를 해임하고 사건에 가담했던 일본인들을 히로시마 감옥에 가두어놓고 재판을 하는 일종의 쇼를 벌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당연히 증거 불충분으로 인한 무죄방면이었다. 이를 뮈텔은 미리 예상하고 있었으며, 일본인들이 취했던 조선을 독자적으로 지배하고자 했던 부당한 목적과 국모를 시해한 졸렬한 방법에 대하여 강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4년 5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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