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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하느님의 종 125위의 삶과 신앙8: 신유박해 순교자(주문모 신부와 양반 신분의 서울 순교자 8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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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25 ㅣ No.1102

한국교회사연구소 2013년 상반기 공개대학 '하느님의 종 125위의 삶과 신앙'

(8) 신유박해 순교자 - 주문모 신부와 양반 신분의 서울 순교자 8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연이어 신자들이 체포된다. 당시에 체포된 신자들은 주문모(1752~1801) 신부의 행방에 대한 자백을 강요받고 연이어 죽임을 당했다. 주 신부는 자신 탓에 신자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여겨 '양떼와 같이 운명을 같이하고 순교함으로써 모든 불행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으로 1801년 4월 24일 의금부에 자수한다. 이어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문초를 받은 뒤 다음달 5월 31일 서울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6년 5개월여에 걸쳐 조선의 첫 선교사로 살다간 주 신부의 사목적 삶은 비록 짧았지만 한국교회의 주추가 됐다. 베이징교구 대신학교를 거쳐 1791년에서 1794년 사이에 사제품을 받은 주 신부가 조선에 파견된 것은 1794년 12월 24일의 일. 한양에 다다른 주 신부는 최인길(마티아)의 집에 머물며 한글을 배우고 조선교회 사정을 파악해 나간다. 1795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는 신자들과 함께 첫 미사를 봉헌하기도 했다. 하지만 입국한 지 얼마 안 돼 입국 사실이 드러나자 강완숙(골룸바)의 집으로 피신, 비밀리에 성무를 집행하고 성사를 베풀었으며 교리서를 집필하고 최창현(요한)을 총회장에, 강완숙을 여성회장에 임명하는 등 조선교회 기틀을 세우는 데 힘썼다. 또한 신자들의 교리 공부와 전교 활동을 위해 명도회를 조직했다. 이처럼 그가 적극적으로 선교하면서 조선교회 신자는 1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같은 주 신부의 사목과 선교를 도왔던 주역으로 양반 출신 서울 지역 순교자들이 있다. 정약종을 비롯한 순교자 8위다. 맨 먼저 정약종(아우구스티노, 1760~1801)을 꼽지 않을 수 없다. 1786년께 형 정약전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그는 특히 교리 연구와 전교에 힘을 쏟았으며, 깊은 교리 연구를 바탕으로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를 편찬하고 명도회 초대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체포돼 1801년 4월 8일 서소문 밖에서 42세를 일기로 순교했다. 정약종의 아들 정철상(가롤로, ?~1801)은 부친이 순교하던 날에 체포돼 그해 5월 14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정철상의 빙부(장인)이자 홍인(레오)의 부친인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38~1801)은 경기 포천에 복음이 전해지도록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교리 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글을 알지 못하는 신자들을 가르치고 냉담자를 회두시키고 신앙을 권면하는 데 애를 썼다.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체포돼 1801년 2월 14일 의금부로 압송됐으며 그해 4월 8일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을 받는다.

홍교만의 사촌동생이자 홍필주(필립보)와 이현(안토니오)의 빙부인 홍익만(안토니오, ?~1802)은 자신의 집을 명도회 하부조직이자 집회소인 육회(六會)의 하나로 삼고 전교에 힘썼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안산과 여주 등지로 옮겨다니며 피신했으나 곧 체포돼 1802년 1월 29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는다.

경기도 여주 양반 집안 출신인 이현(안토니오, ?~1801)은 1797년 김건순(요사팟)에게 교리를 배우고 입교, 정광수(바르나바) 등과 교류하며 교리를 실천하고 기도 모임에 열심히 참여했다. 신유박해로 체포돼 포도청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며 일시 마음이 약해져 "신앙을 버리고 마음을 고치겠다"고 했으나, 형조로 이송된 뒤 잘못을 뉘우치고 신앙을 굳게 지켜 1801년 7월 2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홍필주(필립보, 1774~1801)는 계모 강완숙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주 신부 복사로 활약하면서 조선교회 일을 돕다가 1801년 10월 4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충청도 예산의 양반 집안 출신인 홍낙민(루카, 1751~1801)은 권철신(암브로시오)의 제자로 조선교회 지도층을 형성한 인물이다. 1784년 신앙을 받아들여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고 과거에 급제, 사헌부 지평과 이조정랑 등을 지냈다. 신해박해로 겉으로는 신앙을 멀리했으나 속으로는 교리를 실천하며 1799년 모친상을 당하고 나서도 신주를 모시지 않았다. 1801년 신유박해로 체포돼 의금부로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처음엔 나약한 모습을 보였지만 나중엔 용덕을 드러내 1801년 4월 8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외조부 이익의 학풍을 이어받은 아버지 이윤하(마태오)와 권일신의 누이인 어머니에게 신앙을 물려받은 이경도(가롤로, 1780~1802)는 어릴 적 병을 앓아 곱사등이가 됐지만 신앙으로 신체적 결함을 극복하고 최필공(토마스), 홍재영(프로타시오) 등과 신앙공동체를 이뤄 교리를 익혔다. 누이 이순이(루갈다)가 유중철(요한)과 동정부부를 이루는 걸 도운 뒤 1801년 신유박해로 체포돼 이듬해 1월 29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평화신문, 2013년 5월 26일, 양인성 대건 안드레아(한국교회사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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