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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하느님의 종 125위의 삶과 신앙2: 진산, 북산사건 순교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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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4-15 ㅣ No.1091

한국교회사연구소 2013년 상반기 공개대학 '하느님의 종 125위의 삶과 신앙'

(2) 진산ㆍ북산사건 순교자들 - 윤지충 등 6위


이른바 '훤전(Hiuen-chen)'이라는 이름의 조선인이 이승훈(베드로)에게 보낸 서한에는 가성직 제도에 대한 의문이 담겨 있다. 훤전뿐 아니라 여러 신자들의 거듭된 의문과 지적에 이승훈은 1789년 동지사 일행을 따라 베이징에 가는 윤유일(바오로) 편으로 구베아 주교에게 서한을 보낸다. 편지를 받아든 구베아 주교는 가성직 제도에 대한 조선교회의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다. 신자들이 임의로 성직자 역할을 하는 것을 금지한 것. 또한 1790년 윤유일이 조선교회에 가지고 온 구베아 주교 서한에는 천주교회가 조상제사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조선 교우들에게도 금지명령을 내린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조상제사에 대한 교회의 분명한 입장은 조선교회에 대한 박해를 불러왔다. 이른바 '진산사건'과 '북산사건'이다. 이 박해로 조선교회에서 첫 순교자가 나왔다. 외국에, 특히 교황청에 조선교회 첫 순교자 5위라고 알려진 이들이 바로 진산사건 순교자인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 세례명이 요한이라는 설도 있음), 북산사건 순교자인 윤유일과 최인길(마티아), 지황(사바) 등이다.

진산사건은 100년 가량 이어진 조선교회에 대한 대박해의 서막이었다. 신해년인 1791년 여름 전라도 진산군(현 충남 금산군 진산면)에 살던 선비 윤지충이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지한 사건의 파장은 엄청났다. 신해박해는 유교적 세계관과의 충돌을 불러온 첫 박해였으며, 조선에서 순교자가 발생한 첫 박해로 기록된다. 한국사로 보자면 융성했던 영ㆍ정조대 문화가 경색기로 접어드는 첫 단추이자 시발점이었다. 신해박해로 조선판 분서갱유가 벌어졌고, 정조대 문체반정이 벌어진다. 보수파 문인들은 박지원을 비롯한 진보적 문인들이 구사한 패사소품체(稗史小品體)를 바로잡아 정통고문(正統古文)으로 되돌리려 했고, 이에 서학서, 과학기술서를 포함해 중국서적 반입 금지조치가 이뤄지게 된다.

이처럼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진산사건으로 해남 윤씨의 일원이자 고산 윤선도의 6대손이던 윤지충, 안동 권씨이자 사헌부 지평을 지낸 권기의 고손자이던 권상연은 1791년 12월 8일 전주 남문 밖에서 참수를 당한다. 더불어 조선교회 밖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충청도 홍주(현 홍성)의 부유한 양민 출신인 원시장(베드로)도 진산사건으로 붙잡혀 1793년 1월 28일 홍주 관아에서 얼어 죽는다. 원시장을 때려죽이라는 충청감사의 명을 받은 홍주 목사가 끊임없는 고문에도 원시장이 배교하지 않자 그 추운 겨울에 원시장을 결박한 채 물을 부어 동사시킨 것이다.

진산사건 이후 조선교회엔 많은 변화가 생겼다. 교회 내적으로는 양반보다는 중인 이하 신자들이 교회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커졌고, 교회 외적으로는 천주교를 배척하는 사람들에게 신자들을 박해할 공식적 명분이 생겼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를 유지하고자 한 신자들은 윤유일과 최인길, 지황 등을 베이징에 보내 성직자 영입 계획을 추진한다. 이를 위해 1794년 1월 말, 지황은 박 요한(혹은 백 요한)과 함께 베이징에 가서 구베아 주교를 찾는다.

신해박해 등 조선에서의 박해소식을 접한 구베아 주교는 조선으로 선교사를 파견하기로 하고 주문모 신부를 선발한다. 1794년 2월 베이징을 떠난 주 신부는 조ㆍ청 국경 관문인 책문에 도착했으나 감시가 심해 만주를 순회하며 사목하다가 그해 12월이 돼서야 입국에 성공한다.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1795년 1월 서울 최인길의 집에 도착한 것이다.

중국인 사제의 입국과 활동이 예비신자 한영익의 밀고로 알려지면서 북산사건이 벌어진다. 이에 1795년 주 신부를 안전하게 피신시키고 나서 신부 행세를 하던 최인길이 체포되고, 윤유일과 지황도 같은 날 체포된다. 이들은 포도청에서 심한 고문을 받는 가운데서도 주 신부의 행방을 끝까지 발설하지 않았으나 1795년 6월 28일 매를 맞고 순교한 뒤 강물에 버려진다.

북산사건으로 빚어진 박해는 3인의 순교자가 나온 뒤 한동안 소강상태를 보였지만, 주 신부를 쫓는 과정에서 결국 1797년 충청도에서 시작된 정사박해로 비화된다. 이로 인해 노론과 남인 공서파가 남인 친서파에 공격을 가하면서 이들의 정치적 입지가 약화됐고, 결국 이같은 박해가 연속되면서 정조 사망 이후 신유박해가 발발한다.
 
[평화신문, 2013년 4월 14일, 조현범 박사(한국학중앙연구원 종교학과 교수), 정리=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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