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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일요일의 탄생 - 일을 그치고 기도와 선행을 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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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8 ㅣ No.117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일요일의 탄생

 

일을 그치고 기도와 선행을 하는 날

 

 

전통시대 한국사회에는 오늘의 일요일과 같은 정기휴일이 있었을까? 근대 이전의 우리나라는 태음력을 사용해 왔고, 책력에 따라 입춘 · 우수 · 경칩 등과 같은 24절기를 특별히 기념하고 있었다. 전통시대의 세시풍습을 살펴보면 이 24절기가 곧 휴일의 기능을 일부 담당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상적 시간을 7일 단위로 편성하고 일요일에 업무를 쉬기 시작한 때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는 천주교 신앙이 수용된 이후의 일이다. 일요일과 같은 정기휴일에 대한 인식은 노동의 가치와 더불어 휴식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새로운 삶의 태도를 일깨워주었다.

 

 

일요일을 찾아서

 

천주교가 한자 문화권에 알려지기 이전, 태음력을 기준으로 했던 동양사회에서는 일요일이나 주일이란 용어가 없었다. 이때 선교사들은 태양력에 관한 천문지식과 함께 교회의 가르침을 동양사회에 전했다. 그들은 “성경직해” 등과 같은 책자를 통해서 천주교에서 7일마다 하루를 ‘주일’로 삼고 있음을 가르쳤다. 그리고 주일은 “매달 28개의 별자리 가운데 허성, 묘성, 성성, 방성 등 네 개의 별자리가 태양과 만나는 날이다.”라고 규정해 주었다.

 

당시 신도들이 ‘주일’을 정하는 데에 관한 이 천문학적 설명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17세기 아담 샬 신부는 천주교 전례의 기본이 되는 주일을 중국인들이 정확히 산정해 내는 데에 도움을 주고자 중국의 태음력을 보완하여 시헌력을 만들었다. 그리고 음력을 기준으로 생활하고 있던 신자들에게 주일을 알려주려고 교회는 ‘첨례표’ 또는 ‘첨례단’을 만들어 보급했다.

 

우리나라에 주일 또는 일요일의 개념이 들어온 시기도 천주교 신앙의 실천과 일치된다. 예를 들면 최창현은 “성경직해”를 번역한 바 있는데, 그는 이 책을 통해 ‘주일’이라는 개념을 분명히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첨례단은 18세기 말엽의 교회 때에도 있었다.

 

주일은 ‘주님의 날’을 줄여서 부르는 낱말이었다. 2백여 년 전부터 신자들이 읽었던 “성경직해”에서는 “이날을 맞으면 교회에 있는 사람은 모든 일을 파하고, 성당에 나아가 미사에 참례하며 강론하는 도리를 듣는다. 그리고 공경함과 간절함을 더하여 국왕과 부모를 위하고, 친척과 붕우를 위하며, 또 자기를 위하여 천주께 복되이 거느려주시기를 기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일은 휴식과 기도와 선행 실천의 날이었다. 주일에 지켜야 할 휴식의 의무를 당시의 교회에서는 ‘파공(罷工)’이라 했다. 파공은 ‘모든 일을 파하다[罷百工]’는 말의 준말임에 틀림없다.

 

교회는 원래 주일에는 하루 온종일을 쉬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략 17세기경 교황청에서는 중국과 베트남 등 선교지역의 경우에 예수 부활 대축일 등 4대 축일은 하루 종일 파공하도록 했고, 일반 주일이나 ‘파공첨례’ 날은 오전에만 일을 쉬라고 규정했다. 그러므로 1862년에 간행된 “성찰기략”에서는 천주십계의 제3계를 성찰하면서 주일이나 파공첨례 날 “정오 이전에 일을 했는지를 반성하라.”고 했다. 물론 파공에 관한 규정은 비신자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신자인 주인은 주일 오전이라 하더라도 비신자 일꾼을 부릴 수 있었다.

 

 

주일에 한 일들

 

주일은 여느 날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날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 교회가 정식으로 세워지기 전 천주교 서적을 읽고 이를 실천했던 홍유한은 매달 7일째 되는 날이면 “경건하게 일을 쉬고, 속세의 모든 일을 물리치고, 기도에 전념했다.” 교회가 세워지고 나서 “성경직해”나 “천주성교공과” 등 기도서가 번역되자 신도들은 이 기도서에 규정된 기도를 드리며 주일을 거룩히 보낼 수 있었다. 물론 주일에는 무엇보다도 미사전례에 참례해야 했다. 그러나 박해시대의 특수사정으로 미사에 참례할 수 없던 경우에는 기도문을 ‘대신 외우도록[代誦]’ 했다.

 

박해시대 간행된 “천주성교공과”에는 특정 축일이나 주일미사의 대송으로 해당 축일에 정해진 기도를 드리라고 했다. 그러나 기도서가 없는 경우에는 성로신공 곧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쳐야 했다. 성로신공도 할 수 없는 경우에는 ‘천주경 두 꿰미’ 곧 ‘주님의 기도’를 33번씩 두 차례 하도록 규정했다. 또한 주일에는 글을 아는 사람들은 마땅히 성경을 보아 도리를 밝히고, 아랫사람들을 가르치도록 명했다.

 

한편, 주일에는 특별한 선행을 하면서 선교해 나갔다. 충청도 홍주 응정리에 살던 원 야고보는 주일과 축일에는 음식을 많이 장만하여 모든 사람들을 청하여 먹게 하였다. 사람들이 모이고 나면 그는 말하기를 “오늘은주님의 날이니 거룩한 기쁨으로 이날을 지내야 하고, 또 천주께서 주신 재산을 나누어줌으로써 그분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며 천주교의 여러 가지 교리를 설명할 기회를 만들었다. 그는 지체 있는 집안의 덕목이었던 ‘접빈객’을 실천하면서 이웃을 대접했고, 대접한 이들에게 신앙을 전파시켜 나갔다. 이러던 그는 1799년 청주 병영에서 매를 맞아 순교했다.

 

순교성인 베르뇌 주교는 1857년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에 보낸 편지에서 조선 교우들이 주일의 공소예절에 참례하는 광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주일이 되면 신자들 12명 내지 15명이 어떤 때는 이 집에, 어떤 때는 저 집에 모이는데, 외교인들에게 미행당하지 않으려고 언제나 은밀히 모입니다. 그들은 주교가 명한 기도를 낮은 목소리로 외고 그날 복음의 해석을 듣습니다. 그날의 나머지 시간은 묵주신공을 하고 교리문답을 배우고 아이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치는 데 보냅니다.”

 

 

남은 말

 

1925년에 간행된 “천주교요리”를 보면 신자들에게 일요일에는 ‘종일토록’ 파공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미 이전부터 조선 교우들이 주일날에 매괴경을 외우며 ‘성경직해’를 낭독하며 연도하는 풍속이 있었으니… 그런 좋은 풍속을 전심으로 지킬지니라.” 하여 주일 파공의 의무를 강화했고, 기도하던 풍습을 장려하고자 했다. 그런데 주일을 ‘일요일’이라 부르며 이 날을 휴무일로 정하게 된 때는 1895년이었다. 곧 1876년의 개항 이후에도 음력을 사용하다가 조선정부는 1895년 11월 17일(음력)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정하여 태양력을 공식적으로 채택했다. 그리고 ‘양력을 세우다.’라는 의미로 ‘건양’이라는 연호를 새롭게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우리나라에서도 박해시대 천주교 신도들이 시간 계산의 기준으로 삼고자 했던 양력이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에 몇 달 앞서 1895년 5월 갑오개혁의 결과로 각령 제7호로 ‘관청집무시한’이 발표되었다. 내각에서 정한 이 규정 제4조에 “일요일은 전일 휴가하고 토요일은 정오 12시부터 휴가한다.”고 명시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일요일과 정기적인 휴무에 대한 확실한 규정이 마련되었다.

 

이렇게 일요일 파공의 개념이 알려지기 시작한 지 1백여 년 이상이 지나서 이땅에서 일요일은 새롭게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천주학쟁이’들이 주일을 지키던 이질적 풍속을 이제는 나라님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상생활에서 휴식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하며 선행을 다짐하는 날들을 우리나라도 갖게 된 것이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5년 10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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