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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유박해 순교자들의 천주교인으로서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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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1 ㅣ No.50

신유박해 순교자들의 천주교인으로서 정체성

 

 

1. 머리말

 

신유박해 순교자들의 참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 문제는 달레(Dallet)의 [한국 천주교회사], 황사영의 [백서] 등에 전기적 형태로 서술된 것이 있고, 또 [사학징의](邪學懲義), [추안](推案), 이기경의 [벽위편](闢衛編) 등 신문 기록을 통해서도 단편적으로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체계 있게 정리된 것은 없는 것으로 안다. 이 문제가 심도 있게 논의되려면 먼저 신유박해 전후 순교자들의 명단이 확정되고 또 그들에 관한 국내외의 모든 기록이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자료의 불비(不備)와 정리의 미흡으로 거기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앞에서 제시한 몇 가지 국내 기록을 중심으로 대표적 순교자들의 정체, 그 참 모습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천주교 신자로서 외부로 나타나는 징표는 무엇이었을까? 세례를 받고 십계명을 지키며 천주경과 성모경을 암송하고, 미사를 봉헌하며 명도회의 모임에 참석하는 것 등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외부적 징표만 가지고 천주교 신자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보다는 내면의 변화, 인식의 변화가 더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고 하겠다. 그 좋은 예로 김백순(金伯淳)을 들 수 있다. 그는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순교하였다. 이러한 예로 보아, 외부적 징표도 중요한 것이지만, 내적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진정한 천주교 신자라면 형식적으로 세례를 받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 영혼 안에서 먼저 천주를 만물의 창조주, 천지의 큰 임금(大君), 큰 어버이(大父)로 인식하고 섬기며, 천주교를 사학이 아니라 바른 종교, 정학(正學), 정도(正道)로서 인식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 밖에 교회의 중요한 가르침을 따르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가령 당시 교리의 중요한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던 삼구(三仇)를 물리치고, 칠죄종(七罪宗)을 이겨내며(七克), 영혼불멸, 상선벌악, 십계명, 미사 봉헌, 기도 생활 등 신앙 생활에 따르는 중요한 가르침을 따르는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글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외적 징표보다는 내적 징표―의식의 변화―에 중점을 두고자 한다. 그 내적 징표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그 당시 가장 중요하게 떠올랐던 몇 가지 문제, 곧 ① 천주교에 대한 인식, ② 천주에 대한 인식, ③ 조상 제사 금지령에 대한 반응 등에 한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방법상으로는 양반 지식인, 중인 지식인, 부녀자와 무식한 하층민 순교자들에게서는 그것이 각각 어떻게 나타나고 있었던가도 아울러 살펴보고자 한다. 이렇게 계층간의 반응을 아울러 살펴보는 까닭은 지식이 있는 일부 양반 순교자들만이 자신이 천주교인이라는 의식을 지니고 타종교의 신자들과 달리 차별화된 삶을 살다가 순교의 길을 걸어갔던가, 아니면 무식한 부녀자·하층민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천주교인이라는 인식을 갖고 타종교인과 차별화된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가 여부를 파악해 보기 위해서다. 이러한 인식의 문제는 또 한편으로는 교리 지식과도 깊은 연관이 된다. 그러나 교리 지식의 많고 적음이 신앙심의 깊고 얕음과 큰 함수 관계를 갖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교리 지식이 적어도 신앙심이 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유박해 순교자들의 참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 문제는 순교자들의 신앙심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면에서도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2. 천주교에 대한 인식

 

양반 지식인들의 경우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신유박해 전후 양반 지식인 순교자 중 순교자로서의 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 인물로는 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야고보, 윤유일 바오로, 김백순, 이명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홍인 레오, 황사영 알렉시오, 이경도 가를로 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도 많은 순교자가 있지만, 이들만 놓고 보아도 그들의 공통된 특색은 천주교를 사학이 아니라, 정학,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약종은 추국 제1차 신문에서 입을 열자 첫마디에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저는 본래 천주교를 정학으로 알았을 뿐, 사학으로 알지 않았습니다. ...... 만약 사학으로 인식하였다면 어찌 감히 믿겠습니까? 천주교는 대공지정하며 지극히 진실한 도(진리)이기 때문에 몇 년 전 나라에서 금지령이 내린 후에도 애초에 개혁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비록 만 가지 형벌을 받고 죽을지라도 조금도 후회가 없습니다. ...... 제가 생각할 때 하느님을 마주하고 밝게 섬기라[對越昭事]는 말은 옳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1)

 

이렇게 천주교를 정학, 정도로서 인식하였다는 것이 모든 순교자들의 공통된 특색이며, 동시에 그것은 유학자들과 차별화된 특색의 하나이다. 정약종은 천주교는 대공지정하며 지극히 진실한 도(진리)라는 것이다. 천주교를 대공지정하며 진실한 진리로 인정한 근거로서, 그는 유학의 경서인 [시경]과 [서경]에 나오는 말을 제시하였다. 하느님을 마주하고 밝게 섬긴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말은 "對越上帝", "昭事上帝"를 줄인 말이다. 유학의 경서에 나오는 말은 한 글자도 고칠 수 없다. 만약에 고친다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죽음을 면치 못한다.

 

그런데 "경서에도 "對越上帝", "昭事上帝"라 하지 않았느냐? 상제(하느님)를 섬기는 천주교가 어찌하여 사학이란 말이냐?" 하고 항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인유해석적(引儒解釋的) 방법에 의하여 천주교를 정학, 정도로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윤지충 바오로도 천주교를 "사람의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하여 주는 공부"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천주교는 결코 미신이 아니라고 하였다.2) 이것은 윤리적인 면에서도 훌륭한 종교이지만, 허황한 미신이 아니라 바른 종교·진리임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김백순도 1801년 2월 13일 추국에서 "저는 이 학문의 옳지 않은 곳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비록 죽을지라도 고칠 마음이 없습니다."3)라고 하였고, 황사영도 추국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저는 과연 서양학을 합니다. 그러나 바른 도로 인식하고 있지, 無父無君의 術로는 여기지 아니합니다."4)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 황사영은 아예 '사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서양학'이라 하였다. 이것은 서양학일 수는 있으나, 사학은 아니라는 항변인 것이다. 그는 또 10월 10일 추국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제가 서양학을 한 것은 11년이 됩니다. 처음 배운 그 이듬해에 조정에서 금령이 지엄하여, 친척과 벗들이 모두 반대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백 번 생각해 보아도 이것은 결단코 구세의 양약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성심으로 신앙하였습니다."5)

 

이 진술로 볼 때, 황사영은 천주교를 정학, 정도로서 인식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구세의 양약'으로까지 인식하고 있었다. 황사영이 천주교를 구세의 양약으로 인식하였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조선 시대 건국 이념이었던 성리학이나 불교는 이미 민중 구원의 힘을 상실하였고 오직 천주교만이 민중 구원의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김백순의 진술에서 보는 것처럼 옳지 않은 곳이 없는데 옳지 않다고 하니, 거기에 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그들의 순교 정신이 내포되어 있다.

 

이제 중인 계층 지식인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한다. [사학징의]에 나타난 이들의 진술을 보면 양반 지식인들처럼 천주교가 정학, 정도라고 직접 진술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순교로써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김현우 마태오는 "비록 형벌로 죽임을 당할지라도 끝내 사학(천주교)을 옳다 한 죄,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라고 하였으며,6) 최필제는 "제가 사학을 하는 마음은 죽어도 변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7) 최인철도 "형벌로 죽이면 달게 받겠으며 죽어도 변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8) 최필공은 형장에 나가 형리가 목을 내려쳤을 때 목에서 흐르는 피를 움켜쥐고 "보배로운 피!" 하고 외쳤다. 보배로운 피로써 천주교가 진리요 올바른 종교임을 증명한 것이다.

 

그러면 부녀자와 하층민들에게서는 어떻게 나타났을까? 폐궁 나인이었던 강경복 수산나는 "비록 사형을 당할지라도 다시 변혁할 마음이 없다."라고 하였으며,9) 신궁 나인이었던 문영인 비비안나도 "비록 죽임을 당할지라도 조금도 변혁할 마음이 없다."라고 하였다.10) 동정녀 정순매 발바라 역시 "비록 형육 아래 죽을지라도 조금도 변혁할 마음이 없다."라고 하였다.11) 그리고 말총으로 갓을 만들던 장덕유도 천주교를 정도로 알고 믿어 왔으니, 빨리 죽여 달라고 하였고,12) 황일광 알렉시스도 천주교를 정도로 인식하고 "지금 비록 죽을지라도 배척하고 버릴 마음이 전혀 없으며 속히 죽임을 당하는 것이 지극한 소원"이라 하였다.13) 최설애도 천주교를 정도로 인식하였다.14)

 

이처럼 부녀자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천주교를 정학, 정도로 인식하고, 그것을 순교로써 증명하였다.

 

 

3. 천주에 대한 바른 인식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들이 천주교를 정학, 정도로 인식하고 순교로 증명할 수 있었던 것은 천주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주에 대한 바른 인식이 없었다면 순교도 할 수 없고 또 천주교를 정학, 정도로서 인식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천주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윤지충은 천주를 "우리 공동의 아버지시오, 하늘과 땅과 천신과 사람과 만물을 창조하신 분"15)이라고 하였다. 정약종도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천주는 즉 천지의 큰 임금(大君), 큰 어버이(大父)이시다. 천주님을 섬기는 도(천주교)를 모르는 사람, 이런 사람은 천지의 죄인으로, 살아 있어도 죽은 것만 같지 못하다."16)

 

천주를 만물의 창조주, 천지의 큰 임금, 큰 어버이로 인식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일일이 나열할 수 없지만, 이러한 인식은 비단 윤지충·정약종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당시 모든 순교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들이 천주를 만물의 창조주, 천지의 대군, 대부모로 인식한 것은 [천주실의](天主實義) 등 교리서의 영향이 컸다. 이마두(Matteo Ricii)는 [천주실의]에서, 천주는 서양말로 'Deus'(徒斯)인데, 동양의 옛 경서에서 말하는 '上帝'라 하고, 만물을 내는 '원인(Arche) 중 최초의 원인'(所以然之初所以然)이라 하였다. 그리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여 기르시는 천주는 유일하시며 만물의 큰 부모(大父母), 큰 임금(大君)으로, 우리 인간이 마땅히 받들고 공경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 하였다.17) 이러한 교리를 그대로 이해한 정약종은 마침내 [주교요지]를 편술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권철신도 추국에서 동생 권일신의 말이라 하며 "흠숭 주재지설과 생혼, 각혼, 영혼의 삼혼설과 火, 氣, 水, 土의 사행설은 진실로 지극한 이치가 있다."라고 하였다.18) 뿐만 아니라 강완숙 골롬바도 "천주는 천지의 주인"(天主者天地之主)이라고 하였다.19) 그가 비록 양반 부녀자이기는 하지만, [천주실의] 같은 한역 교리서를 직접 읽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천주를 천지의 주인으로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신앙 공동체의 강론과 강습을 통해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확신된다. 교리 교육이 철저하였다는 의미다.

 

 

4. 조상 제사 금지령

 

1790년 윤유일이 가져온 구베아(Gouvea) 주교의 사목 서한 중에 들어 있던 조상 제사 금지령은 유교 윤리와 가장 큰 갈등을 빚으면서 천주교인과 천주교인 아닌 사람을 구별하는 외부적 징표 역할을 하였다. 조정의 관리들은 이를 계기로 천주교를 무군무부의 사학으로 규정짓고,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라고 비난하였다. 이 일로 박해를 받아 맨 먼저 희생된 분이 윤지충 바오로다. 윤지충은 해남 윤씨, 공재(恭齋) 윤두서의 증손자로, 전라도 진산군에서 태어났다. 명문가의 후예로 태어난 그는 품행이 단정하고 총명하여, 25세 때인 1783년 진사시에 합격,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길도 열려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김범우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천주교에 입교하여 세속적인 모든 명예를 버리고 오로지 신앙 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런데 1790년 윤유일이 가져온 구베아 주교의 사목 서한 속에 조상 제사 금지령이 들어 있었다. 조상에 대한 제사는 효를 행하는 가장 큰 덕목 가운데 하나다. 당시 사람들로서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양반층에서는 천주교를 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이가환 같은 사람은 "신주에 절하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한 구절이 있어 깜짝 놀라, 칼로 도려내 버렸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조상 제사 금지령은 유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는데도 천주교를 정학, 정도로 인식한 윤지충은 그에 흔들리지 않고 교리의 가르침을 그대로 준행하였다.

 

"천주를 제 아버지로 알아본 뒤에는, 그분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양반 집에서 관례로 되어 있는 신주(神主)는 천주교에서 금하는 것이므로, 제가 그 종교를 따르는 이상 거기서 명하는 것에 복종하지 않고 달리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4계가 '우리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므로, 만일 사실로 우리 부모들이 그 신주 안에 계시다면 천주교를 믿는 사람도 누구나 신주를 공경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신주들은 나무로 만든 것이고, 그것들은 저와는 살이나 피나 목숨으로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 어떤 일꾼이 만들고 꾸민 물건을 감히 가져다가 제 부모를 삼고, 또 실제로 그렇게 부를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바른 이치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제 양심은 그것을 승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그로 인하여 말씀대로 양반 칭호를 박탈당해야 한다 해도 천주께 대하여 죄인이 되기는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신주들을 저희 집 땅 속에 묻었습니다."20)

 

이처럼 윤지충은 어떤 목수가 만든 신주를 부모처럼 모시고 공경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므로 땅 속에 묻었다고 답하였다. 그가 이처럼 답할 수 있었던 것은 천주의 존재에 대한 바른 인식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주의 존재에 대한 바른 인식과 신앙이 없었다면 유교의 관습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상 제사 금지령은 당시 천주교 신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정약종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며 산소에 성묘하는 것, 부모님 상을 당했을 때 혼백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모두 죄를 짓는 것"이라고 일기에 기록하였다. 그랬으면서도 위관이 "어찌 그런 망측한 말을 하였느냐?" 하고 다그치자, 지금은 후회한다고 답하였다.21) 그리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은 유교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 불효막심한 일이기도 하였다. 또 당시 천주교 신자들을 가려내는 외부적 행위의 한 징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윤지충, 권상연, 권철신, 유항검 등은 그 신주를 불태우거나 땅에 묻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정인혁도 제사를 폐지한다는 말을 듣고 천주교가 크게 그른 학문인 줄 알고 곧 영원히 버리려 하였으나, 그후 다시 신앙 생활을 시작하여 순교하였고, 최인철도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며, 고광성도 신주를 땅에 묻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며, 윤운혜도 시가의 제사에 참례하지 않았다. 이중배도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버렸으며, 원경도 정종호도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며, 이부춘도 집안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고, 한정흠, 이기연 등도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당시 천주교 신자들이 얼마나 교회의 명령을 잘 따르며 지켰던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맹목적인 준행은 아니었다. 그것은 윤지충이 말한 것처럼 신주가 부모일 수 없듯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5. 맺음말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신유박해 전후 순교자들은 양반 지식인, 중인 지식인, 부녀자,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천주교를 정학, 정도로 인식하였다. 그들이 천주교를 정학, 정도로 인식한 데에는, 천주는 유일하며 만물의 큰 임금, 큰 어버이로 마땅히 흠숭, 공경하여야 한다는 확실한 믿음이 내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외형적으로 세례를 받고 또 천주경과 성모경을 잘 암송한다 하여도 천주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공경심, 신앙심이 내재해 있지 않았다면 순교의 길을 걸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신주를 불태우거나 땅에 묻고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천주의 존재에 대한 확고한 신앙심이 내재해 있었기 때문에 조상 제사 금지령도 아무 의심 없이 따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양반 지식인들에게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중인 계급은 물론, 부녀자, 상민 계층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았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지 17년 정도밖에 안 되었고, 또 선교사가 많은 것도 아니었는데도 교리 교육이 그만큼 철저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은 놀라울 따름이다. 올해는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만약 지금 신유박해와 같은 처절한 박해가 일어난다면 윤지충, 정약종, 강완숙, 황일광, 장덕유, 최필공처럼 천주교가 정학, 정도라고 신앙을 고백하고 순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천주교인으로서의 참 모습을 확실히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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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丁若鍾供招"(1801.2.12.), [罪人李家煥等推案]:"矣身本來只知此爲正學 不知爲邪學. ...... 矣身若爲邪學則豈敢爲之乎? 知其爲大公至正極眞實之道 故年前邦禁之後 初無改革之心 雖萬被刑戮 少無悔悟矣. ...... 矣身對越昭事 無處不可矣." 

2) 샤를르 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상권, 한국교회사연구소, 340-341면. 

3) "金伯淳供招"(1801.2.13.), [罪人李家煥等推案], 74면:"矣身不見此學之不是處則 雖死萬無變改之心矣." 

4) "黃嗣永供招"(1801.10.9.), [邪學罪人嗣永等推案], 727면:"矣身果爲西洋學 而認以正道 不知爲無父無君之術." 

5) 위의 책, 811면:"矣身爲洋學者爲十一年 始學之翌年 朝家禁令至嚴 親戚朋友 無不毁斥 而百爾思之 決是救世之良藥 故誠心爲之矣." 

6) [邪學懲義], 84면. 

7) 위의 책, 76면. 

8) 위의 책, 82면. 

9) 위의 책, 100면. 

10) 위의 책, 106면. 

11) 위의 책, 110면. 

12) 위의 책, 161면. 

13) 위의 책, 148면. 

14) 위의 책, 146면. 

15) 샤를르 달레, 앞의 책, 345면. 

16) "丁若鍾供招", [罪人李家煥等推案], 50-51면:"天主則天地之大君大父也 不知事天主之道則 是天地之罪人 生不如死矣." 

17) [天主實義], 제1-2편 참조. 

18) "권철신 공초"(1801.2.11.), [罪人李家煥等推案] 

19) [帛書], 66행. 

20) 샤를르 달레, 앞의 책, 346-347면. 

21) "丁若鍾供招"(1801.2.12.), [罪人李家煥等推案], 52면.

 

[사목, 2001년 9월호, 하성래(안양대학교 교수, 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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