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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19: 4세기 (6) 서방 교회 영성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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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10 ㅣ No.922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19) 4세기 ⑥ 서방 교회 영성 생활


금욕 · 애덕 · 윤리 토대로 그리스도인 영성 생활 강조

 

 

고대 그리스도교는 언뜻 동방 교회 중심으로 활동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박해 이전에는 서방에 로마 제국의 수도가 있어서 서방 교회 지역이 상대적으로 더 활동의 제약을 받았을 것이었고, 박해 이후에는 로마 제국의 수도가 동방으로 이전함으로써 동방 교회 지역이 제약 없이 더 활발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소수의 사도 및 호교 교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동방 교회 교부들의 활약이 많았으며, 수도 생활도 동방 교회로부터 확산되었습니다. 게다가 서방 교회 수도 생활의 기원은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고대 말기부터 서방 교회 교부들도 서서히 활약을 펼치면서 그리스도인 영성 생활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 암브로시우스.

 

 

금욕 생활과 윤리 생활을 강조한 암브로시우스

 

훌륭한 설교가였던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Ambrosius Mediolanensis, 339~397)는 주교로서 사목적인 배려로 그리스도인의 영성 생활을 돕고자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를 위해 다방면에서 많은 작품을 저술했습니다. 로마 황제의 행정관이었다가 갑자기 밀라노교구장 주교로 선출된 암브로시우스는 성경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방법론으로 구약성경에 담긴 윤리적, 영적 의미를 탐구했습니다. 또 안티오키아 학파의 방법론으로 신약성경에 담긴 문자적 의미를 연구했습니다. 그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대해서 우의적이고 예형론적인 해석을 시도함으로써 두 성경의 통일성을 강조했습니다. 결국 성경 말씀을 열심히 묵상했던 암브로시우스는 여러 성경 주석 작품들을 남길 수 있었으며, 감동을 주는 좋은 강론도 할 수 있었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저서 「사제 직무론(De Offi -ciis Ministrorum)」에서 그리스도인의 윤리 생활을 강조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해지기 위한 삶과 일반적으로 영생을 얻기 위해 요구되는 최소한의 삶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일차적으로 성직자들을 위한 권고였으나, 폭넓게는 평신도를 향하면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영성 생활 발전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 암브로시우스는 여성 그리스도인들의 영성 생활에 도움을 주고자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저서 「과부(De Viduis)」와 「동정녀(De Virginibus)」에서 결혼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정을 지키는 것이 더 우수한 복음적 삶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게다가 암브로시우스는 교회를 정결한 동정을 지닌 그리스도인의 어머니로 제시했습니다. 따라서 동정 상태에 있는 교회는 성령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녀를 출산한다는 것입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저서 「동정론(De Virgin- itate)」에서 동정에 대한 주제를 금욕 생활로 확장시켰습니다. 하지만 암브로시우스의 금욕 생활은 현세 생활을 희생하면서 실천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즉, 현세 생활에서 애덕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현존 체험에 도달하는데, 그 체험을 통해 영생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금욕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이 이외에도 다양한 주제들을 다룬 작품들을 통해 암브로시우스는 체계적인 윤리 생활을 바탕으로 하는 그리스도인의 영성 생활을 권고했습니다.

 

- 히에로니무스.

 

 

금욕 생활과 수도 생활을 실천한 히에로니무스

 

우리에게 예로니모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스트리돈의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Stridonensis, 347/48~419/20)는 성경 번역자이자 주석가로 명성을 떨쳤지만, 이면에 수도 생활을 동경했습니다. 유복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난 히에로니무스는 로마에서 공부하는 동안에 잠시 쾌락에 빠지기도 했지만, 세례성사를 받고 진지한 신앙인으로 살고자 투신했습니다.

 

20대 중반 히에로니무스는 루피누스(Rufinus Aquileiensis, 345~410/11)와 함께 고향 근처 아퀼레이아에 위치한 수도 공동체에서 금욕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이후 예루살렘 순례를 마친 히에로니무스는 안티오키아에 머물면서 안티오키아 학파의 성경 주석 방법을 배웠습니다. 또 수도 생활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면서 시리아 사막에서 본격적으로 수도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하지만 그곳 수도자들이 이단사상 문제로 서로 다투는 모습에 회의를 느껴 안티오키아로 나왔는데, 뜻하지 않게 그곳에서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히에로니무스는 다시 콘스탄티노플에서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Nazianzenus, 326/30경~390경)를 만나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성서 주석 방법을 배우고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에게 관심을 갖기도 했습니다.

 

잠시 로마로 돌아와 다마수스 1세 교황(Damasus PP. I, 재위 366~384)을 보필했던 히에로니무스는 로마 귀족에게 금욕 생활을 가르쳤습니다. 당시 로마에는 이미 동방 교회 수도 생활이 전래되었고, 많은 귀족들이 수도 생활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심지어 세련된 예절을 보이는 성직자보다 금욕 생활을 실천하는 성직자를 더 존경하는 분위기가 귀부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습니다. 교황 선종 이후 히에로니무스는 자신을 도와주던 부인들과 함께 이집트 사막 은수자들을 방문하고 베들레헴으로 건너가 수도 공동체를 설립, 수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히에로니무스는 이곳 수도원에서 성경 번역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죽을 때가지 머물렀습니다.

 

히에로니무스는 암브로시우스보다 극단적인 금욕 생활을 주장했습니다. 즉, 결혼 생활을 반대하는 분위기에서 금욕 생활을 권장했던 것이었습니다. 히에로니무스의 금욕 생활이 과도하다고 느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히에로니무스를 강력하게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히에로니무스는 그런 비판을 무시하고 어린 소녀에게까지 정결에 대한 가르침을 아주 섬세하게 교육했습니다.

 

4세기 서방 교회 수도 생활은 동방 교회의 도움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Alexandrinus, 295/300~373)는 아리우스 일파와의 갈등 때문에 로마 황제에 의해 339년 로마로 유배를 떠났을 때에 이집트 수도자들과 동행함으로써 동방 교회 수도 생활이 서방 교회에 알려지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또한 이미 고향에서 히에로니무스와 수도 생활을 실천했으며 베들레헴에 여성 수도원을 설립하고 수도 생활에 대한 경험을 축적했던 루피누스는 오리게네스 사상을 변론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하면서 동방 교회의 수도 생활을 전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박해가 끝난 4세기부터 서방 교회에서도 서서히 수도 생활과 수도원 제도의 기틀이 마련되기 시작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4월 9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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