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프랑스 순례: 프랑스 최초의 수도 공동체 리귀제 그리고 샤토뒤루아르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7-31 ㅣ No.1138

[영원을 향하여 시간을 걷다 - 프랑스 순례] 프랑스 최초의 수도 공동체 리귀제 그리고 샤토뒤루아르


투르의 마르티노(316?-397년) 성인이 살았던 당시만 해도 로마제국의 기세가 당당했다. 프란치스코나 로욜라의 이냐시오가 기사가 되겠다고 호기롭게 나섰던 것처럼 당시는 로마 군인이 되어야 세상에서 출세하고 사람노릇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르티노는 그리스도교에 입문한 후 ‘그리스도의 군대’가 되겠다며 로마의 군복을 벗었다. 아마도 사람들은 그를 비웃고 모욕하고 비난했을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수호성인 중 한 분인 그가 푸아티에의 힐라리오의 도움으로 리귀제(Liguge)에 세운 프랑스의 첫 번째 수도 공동체, 바로 그 수도원을 찾아간 길이었다.

먼저 베네딕토회 수사님들의 시간경에 함께하고자 수도원 성당(위 사진)으로 들어갔다. 앙증맞을 정도로 작은 스테인드글라스의 오렌지와 초록과 분홍, 연두와 파랑의 색채가 신선한 빛을 성당 안에 흩뿌리고 있었다.

성무일도가 시작됐다. 힘차면서도 부드럽고, 감미롭지만 단단한 뿌리 같은 기도를 듣다가 영화 ‘신과 인간’의 그 수사님들이 생각났다. 이 수사님들 사이에 크리스티앙과 그의 동료 수사들도 있을 것만 같은.

젊은 수사들이 순례자를 흘끔 쳐다보곤 했다. 아주 잠시. 그 시선이 오히려 예뻐 보이기도 했다. 빛이 흐르는 것을, 물결이 흐르는 것을, 마음이 흐르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신을 찬미할 수 있을까. 세상 모든 사물과 인간의 삶에 풀잎 끝 이슬처럼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프란치스코처럼 찬미와 찬양이 터져나올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들처럼 나 자신도 끊임없는 호기심으로 삶을 대면하되 그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것들 속에서 숨어있는 보물을 발견하고 그래서 더 단단하고 너른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밝은 햇빛이 가득한 정원을 지나 오래된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예전에 참사회 장소였다는 작은 방과 회랑을 지나고, 힐라리오 성인 당시의 유물이 발견되어 지금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는 옛날 성당을 지나고, 로마시대 물 저장소의 흔적이 남아있는 지하를 둘러봤다.

버스에 오른 뒤에야 수도원에 루오와 샤갈의 작품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더욱이 루오가 그 수도원에서 작업을 하기도 했다니 미처 보지 못하고 떠나는 게 무척 애석했다.

아쉬운 마음으로 향한 장 베르뇌 주교의 고향 샤토뒤루아르(Chateau-du-Loir)에서 미사를 드렸다. 조선교회 제4대 대목구장인 성인이 세례를 받은 성당이었다.

왕정이 끝난 지도 오래됐지만 제대포에 백합 문양이 남아있는 성당에서, 난 그때껏 보지 못한 가장 못난 성모님(왼쪽 사진)을 보았다.

세상에나, 얼굴은 거의 네모랄 정도로 넙데데하고 눈썹은 몇십 년 전에 해 넣은 문신처럼 어색한데 살짝 내리뜬 눈동자는, 어쩌자고 그렇게 슬픔으로 가득 차있는 것일까.

세상의 모든 슬픔이 그녀의 마음과 눈과 가슴에 들어가서 금방이라도 연민으로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1856년 조선에 들어와 1866년 병인박해로 새남터에서 순교한 베르뇌 주교는 사제가 된 후 신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다가 선교사의 길을 택하여 1839년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해, 마침내 길고 긴 여정을 떠나며 어머니께 편지를 드렸다.

“제 마음이 지금처럼 평안한 때는 없었습니다. 저는 영벌로 빠져드는 영혼들을 구하고자 달려가는 것이고, 어머니는 희생하시는 것이죠. 그러나 어머니, 우리는 가장 확실한 길로 가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 길이 예수님을 따르는 가장 어여쁘고 귀한 길이라 해도 살아생전 얼굴 한 번 다시 보지 못한 이별의 아픔을 어쩌랴. 전교지로 떠난 아들 뒤에서 매일 기도의 나날을 보냈을 어머니들의 시선이 바로 거기 있었다.

성인의 이름을 딴 골목이 있어서 가보았는데 벽에 생가터라는 표지 하나 덩그러니 붙어있었다. 자전거를 끌고 지나가던 한 아이가 아주 상큼한 소프라노로 인사했다. “봉주르?” 성인의 흔적이 거의 없는 고향마을에서 문득 어린 베르뇌를 만난 듯 반가웠다.

* 이선미 로사 - 서울대교구 혜화동본당 신자. 가톨릭교리신학원 성서영성학과를 수료했다. 여러 차례 해외 성지를 순례하다 보니 가까운 성지와 우리 전통에도 눈이 뜨여 조금씩 관심을 기울이는 중이다.

[경향잡지, 2013년 7월호, 글 · 사진 이선미]


1,001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