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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교회사3: 제1차 세계대전과 한국 교회의 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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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8-04 ㅣ No.375

한국 교회사 (3) 제1차 세계대전과 한국 교회의 침체

 

 

1914년, 유럽에서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은 한국 교회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프랑스 동원령에 의하여 징집되어 감으로써 사제 부족 현상이 빚어졌고 사목상에도 큰 차질을 가져왔다. 그런 와중에 탄생한 다섯 명의 사제는 침체된 교회의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1914년, 이해 7월 말 유럽에서 큰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곧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다. 독일은 8월 3일 러시아와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는 즉시 프랑스를 침범함으로써 전쟁을 개시하였다. 이에 프랑스 정부는 전반적인 동원령(動員令)을 내리게 되었다.

 

8월 5일, 서울 주재 프랑스 영사는 서울교구장 뮈뗄 주교에게 정부에서 동원령을 내린 사실과 이에 따라 소집에 해당되는 선교사들은 서둘러 서울에 집합할 것을 통고하였고, 뮈뗄 주교는 같은 날 회람을 통해 해당 선교사들에게 영사의 그러한 지시 내용을 전달하였다.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도 영사로부터 같은 내용의 통고를 받고, 이날 밤 급거 상경하였다.

 

8월 6일, 서울과 대구의 양 교구장은 공동교서를 발표하고, 전쟁으로 외방 전교회의 많은 선교사들이 소집되어 유럽으로 떠나버린 사실을 알리는 동시에 다음의 네 가지 지시 사항을 모든 신부와 교우들에게 하달하였다. 첫째, 매일 미사 때 여행자와 전쟁 때를 위한 기도문을 바칠 것. 둘째, 신자들은 주일과 축일 때 성모호칭기도를 바칠 것. 셋째, 저녁기도 때도 성모호칭기도를 같은 의향으로 바칠 것. 또한 주교들의 공동교서에 첨가된 회람에서 르쟝드르 신부는 서울교구에서 14명, 대구교구서 12명이 소집된 사실과 아울러 소집된 선교사들의 명단을 소개하면서, 비록 한국 교우들이 프랑스 국가와 상관은 없을지라도 일찍부터 프랑스 선교사들이 한국에 나와 한국 교우들에게 영육간에 크고 많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승리를 위해 열렬히 기도해야 할 것을 권고하였다.

 

8월 9일부터 선교사들의 출발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우선 일본의 모지(門戶)로 가서 거기서 대기 중인 프랑스 기선 아마존 호를 타고 프랑스로 향하게 되어 있었다. 이날 아침 기차로 맨먼저 망(Meng, 明), 드브레(Devred, 兪), 르레드(Lereide, 申), 기요(Guillot, 吉), 불로(Boulo, 吳) 등 5명이 떠났고, 이어 11일에는 페랭(Perrir, 白)이, 12일에는 루블레(Rouvelet, 黃), 조제(Jaugey, 楊), 프와요(Poyaud, 表) 등이 13일에는 샤보(Chabot, 車)가 14일에는 크렘프(Krempff, 慶)와 폴리(Polly, 沈)가, 17일에는 부이용(Bouillon, 任)이 잇달아 떠남으로써 서울교구에서는 모두 13명이 떠나게 되었다. 한편 천진(天律)으로 소집되어 갔던 북간도의 라리보(Larribeau, 元) 신부는 거기서 징병유예를 받고 서울로 돌아왔다.

 

이상 13명의 신부들은 모지에 이르러 대구교구의 신부들과 함께 아마존 호를 타고, 8월 20일 모지를 떠나 상해를 거쳐 28일에 홍콩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홍콩에서 의사의 검진을 받게 되었는데, 그 결과 무려 13명이 징병 유예를 받았다. 이들 13명은 서울의 프와요와 부이용 신부를 제외하면 드망즈 주교를 포함해서 모두 대구교구 신부들이었다. 징병 유예를 받은 주교와 신부들은 9월 중으로 서울과 대구로 다시 돌아왔다.

 

특히 드망즈 주교의 경우 그가 소집을 면제받게 된 데에는 그의 애견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그는 소집에 응하면서 10년 이상 키워온 애견과 헤어지기가 싫어서 같이 데리고 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배에서 동물을 태우기를 거절하였다. 주교는 다음 배를 기다리기로 하였고, 다행히도 그 배는 그의 애견을 함께 받아주었다. 홍콩에 도착하니 당지 영사관에서 막 주교에 대한 징병유예 지시를 받았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그래서 주교는 그의 교구로 돌아갈 수 있었다. 만일 드망즈 주교가 첫 번째 배를 탔더라면 그는 곧장 전쟁터로 나가게 되었을 것이 분명했었다.

 

동원령은 그것이 내려진 시초에는 매우 모호하였고, 따라서 해석 여하에 따라서는 엄격할 수도 있었고, 관대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한국과 일본에서는 엄격하였고, 반면 중국에서는 관대하였다. 중국에서는 한 지역의 책임자인 본당신부에게도 소집을 면제해 주었고, 그 결과 중국으로 소집되어 갔던 북간도의 라리보 신부도 쉽게 징병 유예를 받았다. 반면 한국에서는 포교지의 최고 책임자인 주교에게조차도 소집을 면제해 주지 않았다. 또한 중국에서는 사전에 의사의 검진을 거쳤는데, 한국에서는 그러하지가 않았다. 한국에서도 사전에 의사의 검진이 있었더라면 홍콩에서 면제된 13명은 떠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부이용과 프와요 신부의 귀환으로 서울교구에서 징집된 신부는 13명에서 11명으로 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숫자는 전체 선교사수의 3분의 1을 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서울교구 당국은 11명의 부재로 말미암아 일어날 수 있는 큰 혼란에 미리 대처하기 위해 서둘러 본당들의 구역을 새로 조정하고 또는 이웃 본당에 편입시켰다.

 

합덕과 결성 본당은 라리보 신부를 북간도에서 소환, 그를 합덕 본당신부로 임명하는 동시에 결성본당을 겸임하게 하였다. 진남포는 평양의 르메르(Le Merre, 李)와 평원의 보랭 신부에게 부담시켰고, 매화동은 재령의 멜리장(Melizan, 梅) 신부에게, 이천(伊川)의 망답은 내평(內坪)의 뤼카스(Lucas, 陸) 신부에게, 내평은 원산의 프와요 신부에게, 용소막은 시잘레(Chizallet, 池) 신부에게, 공주는 비룡(飛龍)의 이종순 신부에게 각각 책임을 지웠고, 수원과 하우현은 미리내의 강도영, 갓등이의 김원영, 압고지의 정규량 등 세 신부에게 분담시켰다.

 

이렇게 본당구역을 조정하고, 무엇보다도 이웃 본당신부들을 통해 연 2회의 정규적인 공소 방문을 보증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1915년도의 교세는 예측했던 대로 전년도에 미치지 못하였고 또한 성인 영세자도 6백 54명이나 줄었다.

 

이러한 사정은 대구교구에서도 매일반이었다. 대구교구에서는 처음에 출전한 나주의 카닥스(Cadars, 姜) 신부 외에 추가로 수류(水流)의 페네(Peynet, 裵) 신부와 목포의 카넬(Canelle, 簡) 신부가 소집되었었다. 그래서 자연 그 이웃 본당신부들의 부담이 배가 되었고, 이 과중한 부담으로 인해 전주본당의 보두네(Baudounet, 尹) 신부는 결국 사망하게 되었다.

 

신학교는 본당보다 더 큰 타격을 받았다. 용산신학교는 세 명의 교수 신부 중 드브레(Devred, 兪)와 기요 두 신부가 떠남으로써 교장인 기낭(Guinand, 陳) 신부만이 남아 강의를 도맡아야 하였다. 거기에다 1914년에는 신입생을 받게 되어 있어서 교사(校舍)신축을 시작했었다. 물론 이해에 대구교구의 신학교가 새로 문을 열게 되어 대구교구 학생들이 떠나게 됨으로써 좀 여유가 예측되었다. 그러나 새로 50여 명의 신입생을 받기에는 구 교사만으로는 역시 부족하였다. 그런데 공사가 시작되자 두 명의 교수신부가 소집되어 떠나게 되니 신입생을 받는 것을 취소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 재력의 부족으로 시작한 건축마저 중단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 다행히도 청부인이 그해에는 공사비의 반액만 받겠다고 제의해 옴으로써 공사를 계속하기로 하였다. 다음해 1915년에는 사정이 더욱 악화되어 예정된 9월의 개학조차 어려워졌다. 부득이 소신학생만을 등교시키기로 하고, 대신학생에게는 개학을 무기한 연기하는 비상조처까지 취하였다. 이때 서울과 제물포의 고아원들도 성영회(聖?會)로부터의 보조금이 3분의 1로 줄어, 그 유지마저 매우 어려워졌다.

 

이미 생긴 공백에 또 공백이 생기면 더 큰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일이 1916년에 발생하였다. 즉 1915년 말에서부터 1916년 초에 걸쳐 부여의 공베르(J. Gombert, 孔) 신부와 평원의 보댕(Bodin, ?) 신부가 또 소집되어 나아갔다. 부여의 이웃인 합덕, 수곡, 공주 등 세 본당은 본당신부들의 부재로 이미 다른 지역에 비해 소외되어 있는 편이어서 이 본당들에게 부여까지 맡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부득이 안성의 형 신부에게 동생 신부의 지역까지 부탁하게 되었다. 다음 공석이 된 평원본당의 공소들은 이웃인 의주의 서병익 신부가 이미 진남포 본당까지 담당하고 있는 평양의 르 메르 신부에게 분담시키기로 하였다.

 

한편 용산신학교도 1년 이상 휴교를 계속할 수가 없어서 교수 신부 한 명을 증원하여 개학하기로 하고, 장연의 김성학 선부를 신학교로 전임시키고, 그 후임에 김명제 선부를 임명하고, 그때까지 대구교구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명제 신부를 서울로 소환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917년 4월에 부주교인 동시에 약현본당 신부였던 두세(Doucet, 丁) 신부가 사망하게 되어 또 인사 이동이 불가피해졌다. 이에 따라 종현(명동)의 프와넬(Poisnel, 朴) 본당신부가 부주교를 겸임하고, 교구 당가인 빌모(Villemot, 禹) 신부는 약현(중림동)으로, 그리고 교구 당가에는 합덕의 라리보 신부를 전임시켰다. 합덕과 결성은 다시금 본당신부를 잃었다. 그러나 그해 9월에 새 신부들이 나오게 되어 있었으므로 공석 기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새로 사제가 된 네 명의 한국인 신부는 곧 본당신부로 임명되었는데, 박우철 신부는 합덕, 김휘중 신부는 행주, 백남희 신부는 공주, 안학만 신부는 서산(결성 대신)으로 가게 되었다. 새 신부들이 즉시 본당신부로 임명된 것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고 따라서 보좌신부로서의 수습기간을 거치지 않고 그들을 곧장 본당신부로 임명해야 하는 데 교구장으로서의 안타까움과 불안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사제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한편 대구교구는 김명제 신부가 서울로 돌아감에 따라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일시적으로 제주도를 포기하는 조처까지 취하였다. 또 용산신학교에서도 6년간이나 미루어왔던 신입생을 이해에 받아들였는데, 68명의 신입생 중에는 고 노기남 대주교도 포합되어 있었다.

 

4년간 계속된 세계 대전은 마침내 1918년 11월 11일 휴전 협정이 성립됨으로써 끝났다. 종전의 기쁜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에서는 17일 오후 종현 대성당에서 종전과 연합군의 승리를 감사하고 축하하는 “떼 데움”(Te Deum) 의식을 대외적으로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1919년 6월 강화조약이 조인된 후 출전했던 선교사들이 속속 귀환하기 시작하였는데, 9월 23일에는 루블레, 폴리, 샤보, 페랭 등이, 10월 15일에는 드브레, 크렘프, 조제 등이 돌아왔고 마지막으로 공베르 신부가 11월 3일에 돌아왔다. 이로써 소집되어간 신부 13명 중 8명이 돌아왔는데, 불로, 기요, 망, 이렇게 세 신부는 전사하였고, 보댕 신부는 독가스를 마신 관계로 요양이 필요하여 즉시 돌아오지 못하였다. 대구에서는 카닥스 신부가 마지막으로 돌아왔고, 카델 신부는 전사하였다.

 

서울에서는 선교사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감사하고 또한 전사한 선교사들의 영원한 안식을 빌기 위해 10월 21일 종현 대성당에서 떼 데움과 연미사 의식을 대내적으로 조출하게 가졌다.

 

4년간의 전쟁은 인력면에서나 재정면에서 한국 교회를 크게 위협하였다. 이 시기에 발전적인 일이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현상을 유지하는 것만도 힘겨운 일이었다. 인력의 부족은 그간 국내에서 네 명의 신부가 사망함으로써 더욱 심각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가 소집 당시와 거의 같은 현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인 신부들의 탄생으로 인한 활동 때문이었다. 이 어려운 시기에 다섯 명의 한국인 신부가 탄생한 것은 정말 하느님의 섭리였다. 아마 외방 전교회로서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이 그들의 본연의 사업이기는 할지라도, 이때만큼 그 사업에 대한 보람을 느끼고 또 고맙게 생각된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한국인 신부들에 대한 인식과 기대도 높아지게 되었다.

 

[경향잡지, 1988년 3월호, 최석우 안드레아(한국교회사연구소장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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