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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길 5000km 대장정4: 삼도구, 두도구본당, 화룡본당, 남평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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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6-24 ㅣ No.125

[연길교구 설정 80돌 특별기획] 연길 5000km 대장정 (4) 삼도구, 두도구본당, 화룡본당, 남평수용소


척박한 신앙의 땅에 교육사업으로 선교 꽃피우다

 

 

- 옛 두도구성당과 해성학교가 자리했던 신흥소학교. 운동장 맞은편 백양나무 오른쪽에 성당이 위치했고, 해성학교는 앞쪽에 있었다.

 

 

발해 5경 중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가 있던 고토 화룡(和龍, 허룽)시로 발길을 돌린다. 조선이주민 최창호(1897~1967)가 1921년 용정에서 최초로 사과 묘목과 돌배를 접목시켜 배양했다는 연변 특산 '사과배' 재배단지가 장관이다. 용정에서 화룡까지는 47㎞. 그 너른 들녘 풍경은 연연하고도 흰 사과배꽃으로 지천이다. 용정서 20㎞를 달리니 두도구(頭道溝, 터우또꺼우)본당이, 27㎞를 더 가니 삼도구(三道溝, 싼또꺼우, 현 화룡시)본당이 나왔다. 물론 퇴적한 역사의 기억만이 남아 있는 복음화의 터전이다. 이번호에서는 두도구ㆍ삼도구본당과 그 맥을 잇는 명성(明星, 밍싱)공소 및 화룡본당, 1946년 성 베네딕도회 연길수도원 선교사들이 끌려가 수용됐던 현장 '남평(南坪, 난핑)수용소'를 함께 찾는다.

 

삼도구, 두도구본당 위치도.

 

 

지목구 설정 이후 첫본당 '두도구본당'

 

대한제국 간도시찰 이범윤(1856~1940) 등의 무장독립투쟁, 1927~30년 '간도공산당사건' 등의 주무대 중 하나가 '두도구시'다. 1930년 3월, 3ㆍ1절 11주년을 맞아 일어난 항일투쟁인 제3차 간도공산당사건은 가장 큰 규모였고, 그 중심지는 특히 두도구였다.

 

그 척박한 신앙의 땅에 연길지목구 설정 이후 첫 본당으로 1929년 10월 4일 두도구본당이 설정된다. 용정본당에서 분가한 두도구본당은 원래 두도구시 인근 해안촌 공동체를 모태로 한다. 하지만 두도구가 점차 성장하자 초대 지목구장 브레허(T. Breher) 주교는 슈레플(C. Schrafl)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 두도구본당을 설정하기에 이르른다.

 

지금도 '수놈이 새끼를 낳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인심이 각박한 고장에서의 선교는 예상보다 성과가 컸다. 슈레플 신부에 이어 부임한 하프너(A. Hafner)ㆍ하이글(G. Heigle)ㆍ압쉬트(Abschied) 신부 등은 해성학원(훗날 해성학교)과 빈민 여성을 위한 해성여자학원 등을 설립, 선교에 박차를 가했다. 이에 1936년 본당 신자 수가 1300명을 넘어섰고, 1938년에 두도구시 북쪽에 성당과 학교, 사제관을 신축한다. 하지만 이 성당은 1946년 중국 공산당이 들어오며 폐쇄된다.

 

브레허 주교가 1937년 복사들을 앞세우고 두도구 성당에 입당하고 있다. 곁에는 교복과 한복 두루마기를 입은 어린이와 어르신들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그 성당과 학교 등은 현재 화룡시 두도진 북쪽 소년해군학교인 신흥소학 옆 광중학교 자리다. 학교 당국의 허락을 받지 못해 교내에 들어가 볼 수 없어 아쉬웠다. 하는 수 없이 혁명열사비가 세워져 있는 언덕바지로 올라갔다. 조광택(용정ㆍ화룡본당 주임) 신부에 따르면, 신흥소학 내 백양나무 몇 그루가 무성한 운동장 옆 광중학교 터가 두도구성당이다. 그 터에는 공소가 남아 있었는데 두도진에서 2~3㎞ 떨어진 명성촌으로 공소를 이전하며 사라졌다. 다만 두도구성당에서 쓰던 종 2개 중 작은 종을 광중학교에서 되찾아 명성공소 종탑에 걸어 옛 공동체의 체취가 아련하게나마 전해진다. 두도구본당의 맥은 그렇게 명성공소(회장 최천일 바오로)가 잇고 있다. 1996년 공소 봉헌식 당시 100여 명에 이르던 공소 신자들은 이제 30여 명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 열심은 살아있다. 공소는 최근 공소로 들어가는 길목에 5000위안을 들여 부지 300㎡를 확보했으며 이 터에 양로원을 세워 어르신들을 돌볼 계획을 세우고 있다.

 

옛 삼도구성당의 터전은 현재 농기계 제작 전문회사인 건덕공정기계제조 유한공사로 변해있다.

 

 

삼도구본당과 수난의 현장 '남평 수용소'

 

청산리대첩 현장을 지나려니 마음이 숙연해졌다. 김좌진(1889~1930) 장군이 이끄는 항일 무장독립군이 1920년 10월 6일간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둔 현장이 화룡시 이도구와 삼도구 일대이어서다.

 

이처럼 빛나는 독립운동사를 간직한 삼도구본당 역사는 그러나 아주 짧다. 1940년 9월 설립돼 1946년 5월 폐쇄됐으니 5년 9개월 여 남짓하다. 물론 공소 시절도 있지만, 전해지는 사진을 보면 민가 수준이었다. 두도구본당에서 사목하다 삼도구에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하프너 신부도 전교와 함께 성당 건립에 힘을 쏟았지만, 중국 공산당에 체포되며 침묵의 교회가 됐다.

 

1946년부터 2년간 중국에 억류됐던 알빈 슈미트 신부가 자신의 남평수용소 시절을 재현한 삽화. 수도자들이 밭을 갈고 장작을 쪼개고 통나무를 베는 노동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이같은 사실은 윤오복(마리아, 82) 할머니 증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 "22살 때(1947년) 용정에서 삼도구로 시집을 와서 성당엘 나갔는데 신자들이 없었어요. 몇몇 교우들이 모여서 공소예절을 드리긴 했지만 뿌리를 내리지 못했어요. 그래서 1979년 개혁ㆍ개방 후 90년대 들어 개신교회는 교회를 찾았는데, 우리는 성당을 되찾지 못했어요. 어디 신자들이 있어야지요."

 

그 성당은 현재 농기계공장으로 쓰이는 화룡시 용성진 부흥향 부흥교(富興橋) 못미처 '길림성건덕공정기계제조 유한공사' 내에 있었다. 비록 근대식 성당은 아니었지만, 전 공동체가 애환을 함께한 이 성당 또한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그 신앙의 맥은 현재 화룡본당이 잇고 있다. 2005년 8월 화룡시 흥화공로양호유한공사 남쪽에 신축 봉헌한 새 성당은 부지 1200㎡에 건축연면적 700㎡ 규모의 산뜻한 교회건축물이다. 2층 성당에서 다 함께 성가 238번 '자모신 마리아'를 부르며 화룡공동체를 당신 품 안에 항상 축복해주실 것을 청하고 나니 벌써 늦은 오후다.

 

성 베네딕도회 연길수도원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갇혀있던 초가는 이제 헐리고 그 자리에는 기와집이 들어서 있다. 뒷쪽 기와집이 수용소다.

 

 

화룡시를 들른 김에 내처 남평수용소가 있던 남평통상구로 향했다. 두만강변 비포장도로를 50㎞ 달려 화룡시 남평진 남평촌에 이르니 중국군의 경비가 삼엄하다. 민가가 드문드문 보일 뿐, 주민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브레허 주교와 성직자 및 수도자 30명, 수녀 3명을 나눠 방 세 칸에 2년간 감금해놓았던 현장이다. 길림과 연길, 삼도구본당을 거쳐 남평에 수용된 선교사들은 때로 '청산' 대상이 돼 깨진 고상 조각을 들고 시내를 도는 '조리돌리기' 등 수난을 당했다.

 

굶주림에 고량(高梁, 수수)밥 끼니를 기다려야했던 당시 풍경을 슈레플 신부는 훗날 자서전을 통해 이렇게 회고한다. "우선 수수쌀을 초벌로 삶아 거기서 우러난 붉은 뜨물을 버리고 헹군 다음, 다시 밥물을 부어 밥을 안쳐야 했다. 하루 세 끼니씩 30여 명 식사를 이런 식으로 지어야 한다는 것은 보통 작업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토록 수고해 차린 식탁이건만 그 거친 수수밥을 날마다 먹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큰 고역이었다. 그래서 하루는 어느 중국집에 있는 큰 맷돌을 얻어다가 수수가루를 내 빵을 구워보기도 했다." 좌절 속에서 비통의 눈물을 흘렸을 선교사들을 떠올리며 두만강 너머 북녘 산하를 돌아보니 무심하기 그지없다.

 

[평화신문, 2008년 6월 22일, 오세택 기자, 사진=전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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