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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길 5000km 대장정2: 개산둔 → 대랍자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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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6-09 ㅣ No.123

[연길교구 설정 80돌 특별기획] 연길 5000km 대장정 (2) 개산둔 → 대랍자본당


간도땅에 뿌려진 첫 복음의 씨앗을 찾아

 

 

- 연길교구 삼원봉, 대랍자본당 위치도.

 

 

간도 복음화는 '호천포(湖泉浦, 후첸푸)'에서 '용정(龍井, 룽징)'으로 가는 길에서 비롯한다. 간도로 떠난 조선 이주민들이 용정으로 가는 길은 사도 바오로의 1차 전도여행 여정(사도 13-14장)에 견줄 수 있다. 그 길은 간도 전역으로 뻗어나가 공동체를 이루고 복음화 기틀을 굳히는 계기가 된다. 그 길목 부처골(佛洞)에 1898년 간도교회 첫 공소 '대교동(大敎洞, 따쵸우둥)공소'가 세워졌고, 1909년 첫 본당 삼원봉(三元峰, 싼웬펑)본당과 용정(훗날 용정하시, 龍井下市, 룽징싸쓰)본당이 동시에 설립된다. 이번호에서는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첫 선교지 호천포와 첫 본당 삼원봉(영암촌)본당, 그리고 삼원봉에서 이전한 대랍자(大拉子, 달라즈)본당을 돌아본다.

 

 

간도 복음화의 요람 '호천포'

 

함북 종성에서 두만강을 건너면, 용정시 개산둔(開山屯, 카이산툰)이다. 둔(屯)은 군 주둔지라는 뜻이니, 일테면 국경마을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분위기가 삼엄하지 않다. 강 건너 손에 잡힐 듯한 북측 위장초소만 아니라면, 한적한 시골이다. 하지만 강폭이 3~4m에 불과해 굶주린 탈북난민들이 식량을 구하고자 드나들어 경계가 강화됐다.

 

140여 년 전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1860~70년 '대흉년'에 조선 농민들은 두만강 모래톱을 개간하고, 이를 간토(墾土), 혹은 간도(墾島)라고 불렀다. 이 이름이 간도(間島)라는 지명으로 굳어져 이 땅에 '사이섬 표지석'이 세워지기도 했지만, 곧 훼손돼 지금은 흔적만 남았다.

 

- 서로 1~2㎞ 남짓 떨어져 있는 삼원봉성당터와 대랍자성당터, 그리고 두 마을 전경. 사진 왼쪽 아래마을이 삼원봉본당이 있던 터이고, 오른쪽 윗마을이 대랍자본당이 위치해 있던 자리다.

 

 

양대언(토마스 데 아퀴노) 연변과학기술대 교수에 따르면, '간도의 사도' 김영렬(세례자 요한, ?~1931)이 첫 선교를 시작한 호천포는 개산둔진에 있다. 또 현지 주민들은 호천포가 개산둔진에서 3~4㎞ 가량 떨어진 '회경촌 1대(隊)'라고 입을 모은다. 지금도 '호천개(개는 개울의 사투리)'로 불리는 이 동네는 김영렬과 같은 성씨인 김해김씨 집성촌이었다. 당시 원산본당 주임 브레(A. Bret) 신부도 1898년 4월 12일자 서한에서 "이곳을 관할하던 관청은 호천포 이웃 개산둔에 있었고, 개산둔은 길림장군 휘하 혼춘 부도통(副都統)이 다스렸다"고 기록,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렇지만 호천포는 교우촌이 아니었다. 브레 신부도 당시 호천포에는 교우들이 4가구 밖에 없었다고 전한다. 김영렬은 친지들을 중심으로 30여 명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이 중 12명이 1897년 원산본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들이 바로 '북관(北關, 북간도) 12종도'로, 이들은 간도 각지로 퍼져 나가 공동체를 만들고 간도교회 초석이 됐다.

 

성 베네딕도회 고진석 수사신부(왼쪽부터)와 송대석 수사가 삼원봉본당터에서 영암동공소 신자 박정수씨에게 삼원봉성당 진입구 및 석축 유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오른쪽이 1990년대 들어 세운 용정본당 관할 영암동공소다.

 

 

회경촌에 김영렬의 선교 숨결이 남아 있지는 않다. 다만 1999년 당시 서울대교구 시흥동본당 주임 김승훈(마티아, 1933~2003) 신부가 사비 500만 원을 지원, 개산둔진 친선 골목(友誼南路) 민가를 구입해 세운 개산둔공소(회장 박영애 베르나데타)가 신앙의 맥을 잇고 있다. 지금은 신자가 30여 명밖에 남지 않았지만, 1995년 공동체가 만들어진 이후 80여 명이나 세례자를 낼 정도로 단단한 공동체다.

 

 

첫 본당 삼원봉본당과 대랍자본당

 

개산둔에서 용정으로 가는 대로변에 '영암동(英岩洞)' 표지판이 나왔다. 곧바로 길을 꺾어 들어가니 마을 한복판에 초라한 공소가 있다. 영암동공소(회장 이신자 아가타)다. 공소에 들어서니 김인석(욥, 58)씨가 공소 뒷방에서 나왔다. "연길교구 첫 본당이니 잘 관리해 달라"는 조광택(용정본당 주임) 신부의 말에 두말없이 달려와 8년째 공소와 삼원봉성당터를 정성껏 보살피고 있다.

 

그의 안내로 찾은 공소 옆 성당은 대부분 텃밭으로 변했고, 성당 진입구 계단과 2~3m쯤 이어진 일부 석축만이 남아 있다. 1909년 간도 첫 본당으로 설립돼 1931년 화룡현청이 있던 대랍자(현 용정시 지신진 지신촌)시로 옮기기까지 22년간 교회역사가 배인 사적지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황량하다.

 

김영렬의 첫 선교지 호천포는 현재 개산둔진 회경촌으로, 마을 주민이 거의 다 조선족이다. 그래서인지 농사거리를 매만지는 주민들 손길이나 곁에 쌓아둔 땔감 등이 친숙하기만 하다.

 

 

삼원봉본당은 그러나 '빛나는' 교회사를 간직하고 있다. 김영렬의 전교로 1897년 봄 원산본당 5대 주임 베르모렐(Vermorel)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12종도 중 두 사람인 유패룡(라우렌시오)과 김성준(안토니오)의 숨결이 서려 있다. 함북 회령에서 간도 화룡현에 이주한 이들은 외교인들 난동으로 공소가 파괴되자 사가(私家)에서 공소예절을 드리다 1908년 영암촌에 새 집을 사서 공소 겸 학교로 쓴다. 이 학교가 화룡서숙(和龍書塾)으로, 훗날 덕흥(德興)학교로 발전한다.

 

이같은 열심으로 간도 신자 수가 2362명에 이르러 사목 필요성이 커지자 서울대목구장 뮈텔 대주교는 1909년 5월 1일 파리외방전교회 라리보(A.J.Larribeau, 훗날 초대 대전교구장) 신부를 초대 삼원봉본당 주임에 임명한다. 라리보 신부는 본당 부임 3년 만인 1912년 10월 새 성당을 준공한 뒤 충청도로 임지를 옮겼고, 페랭(P. Perrin)ㆍ다베르나스(K. D'Avernas)ㆍ자이라이스(V. Zeileis) 신부를 거쳐 에베를(H. Eberl) 신부 재임 때 삼원봉에서 1~2㎞ 떨어진 대랍자로 본당을 옮긴다. 본당을 옮긴 데는 술에 취한 한 사람이 낫을 들고 에베를 신부를 위협한 게 계기였다. 대랍자에 있는 이 본당은 당시 화룡현청이 지신현에 있었기에 화룡본당으로 불렸다. 에베를 신부는 먼저 덕흥학교를 대랍자로 옮기고, 사제관과 성당도 이전한다. 이 무렵 덕흥학교가 6년제 보통학교로 개편되면서 '대랍자 해성학교'로 개칭됐다.

 

하지만 1946년 간도를 점령한 소련군에게 성당을 비롯한 교회재산을 몰수당하며 대랍자본당은 침묵의 교회가 된다. 다만 해성학교만이 현재 지신촌 내 명동(明東)소학교로 명맥을 잇고 있다. 삼원봉성당과 대랍자성당은 1965년에 시작돼 10여 년간 계속된 문화혁명 때 파괴됐다. 또 대랍자성당은 현재 바닥 콘크리트 기초만 남아 있다. 대랍자본당 사제관 또한 건물 외관은 그대로지만, 내부는 폐허로 변했다. 

 

영암동공소에서 만난 박정수(고스마, 73)씨는 "대랍자본당 시절만 해도 신자 수가 7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대단해 선교촌이라고 하면 간도에선 다 알아들었다"며 "그렇게 컸던 본당이 이제는 신자수 10명 남짓한 공동체로 남아 아쉽다"고 전했다.

 

[평화신문, 2008년 6월 8일, 오세택 기자, 사진=전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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