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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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성지순례 실태와 문제점: 갈 때는 거룩하게 올 때는 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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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9-16 ㅣ No.1158

[커버스토리] 순례하지 않는 순례자


“갈 때는 거룩하게 올 때는 놀면서” - 성지순례 실태와 문제점



‘성지순례’는 믿는 이들이 가장 효과적으로 영적 성숙을 꾀할 수 있는 대중적 신심 행위이다. 하지만 한국교회 안에서의 성지순례는 관광이나 견학, 공동체의 친교를 위한 단순한 행사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한국 천주교회 성지순례의 실태를 살펴보고, 올바른 성지순례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 지를 성찰해본다.

그럼으로써 ‘신앙의 해’를 마무리하는 이때, 새로운 복음화와 영적 성숙을 위한 ‘성지순례’의 놀라운 힘을 재발견하고자 한다.
 

A본당 ‘전 신자 성지순례’ 풍경

A본당 본당의 날 아침 이른 시각. 신자들이 ‘전 신자 성지순례’를 가기 위해 근처 초등학교로 삼삼오오 밝은 표정을 지으며 모이기 시작했다. 학교 운동장에는 본당에서 대절한 관광버스 10여 대가 ‘A본당 성지순례 0호차’라는 안내문을 달고 신자들을 맞아들였다.

A본당은 매해 본당의 날에 신자 500명 이상이 참여하는 하루 코스 지방 성지순례를 전통으로 지키고 있다. 전 신자 성지순례는 본당 공동체가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드문 기회인데다 순교 신심을 다지면서 공동체의 화합과 결속도 동시에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각 차량 봉사자의 선창으로 묵주기도와 성인호칭기도를 드리고 성가를 불렀다. 경건하고 엄숙하기까지 한 분위기에 신자들은 순교자들을 본받겠다는 의지가 생겨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3시간을 달려 성지에 도착하자 “참 잘 해 놨다”는 탄성과 함께 신자들은 출발 때처럼 삼삼오오 다시 모여 ‘기념 촬영’ 하기에 바빠졌다. 버스 안에서 기도하던 모습과 달리 어수선하게 잠깐 시간을 보내자 금세 점심시간이 됐고 식사 후 성지 곳곳에서 쉬던 신자들은 성지 야외에서 미사를 봉헌한 후 전 신자가 모여 단체 사진을 찍는 것으로 일정을 마쳤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일부 신자들은 성지에서 느낀 순교신심을 되새기며 묵상과 기도를 했지만 다른 신자들의 시끄러운 노랫소리에 분심이 들었다. 술잔을 돌리는 신자들의 모습도 보여 기도하는 자신이 오히려 겸연쩍고 소외되는 것 같았다. A본당 신자 대부분은 집으로 돌아가며 그날 찾은 성지에 어느 순교자의 사연이 깃들어 있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성지순례 중인 신자들의 모습. 참다운 성지순례를 하고 있는지 우리의 모습을 돌아볼 때다.(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 관련 없음)
 

성지순례, 아직 양적 성장에 머물고 있어

한국교회는 세계 어느 나라 못지 않은 많은 순교자와 성지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상당수 성지순례가 ‘갈 때는 거룩하게 올 때는 놀면서’라고 표현될 정도로 왜곡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

유흥식 주교(대전교구장)는 2011년 8월 전국의 111군데 성지를 소개하는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책자를 발간하며 “성지순례는 생각없는 ‘성지 관광’이 아니라 은총이 충만한 순례”라고 성지순례의 참 의미를 간결하면서도 명확하게 밝혔다. 성지순례가 아직도 ‘성지 관광’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반증하는 말이기도 하다.

한국교회에서 성지순례가 본격화된 시기에 대해 양업교회사연구소 소장 차기진(루카) 박사는 “1925년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79위 시복식 때는 일제 치하라는 한계가 있었고 1968년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식을 맞으면서 ‘붐’이 인 후 1984년 103위 성인 시성식이 다시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차기진 박사 설명대로 현재 한국교회 신자들의 신앙생활 중 빠질 수 없는 한 부분이 성지순례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수원교구 손골성지 전담 윤민구 신부는 한국교회 성지 조성과 신자들의 성지순례 현황에 대해 “한국의 성지들이 외형적·양적으로는 큰 성장을 했지만 순교신심을 표출하는 신자들과 성직자들의 ‘소프트웨어’는 부족하다고 볼 수 있고, 비유하자면 재료는 충분하지만 그 재료를 이용해 요리를 못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윤 신부는 계속해서 한국교회 성지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순교성지를 찾는 신자들이 “역사 유적지에 들러 관광을 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는 성지순례를 하고 있다 보니 성지에서 ‘영혼의 양식’을 얻어 가지 못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교회 일각에서는 성지 담당 사제들이 성지나 교회사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하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다른 곳으로 발령 받아 이동하는 성지의 ‘행정 책임자’ 역할에 머무는 것도 신자들의 잘못된 성지순례 관행의 한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윤 신부는 이에 대해 “성지 담당 사제들이 본당 사목자처럼 자주 이동하지는 않지만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말도 틀리지 않다”며 “본당 사목자든 성지 담당 사제든 심포지엄 자리나 마련돼야 필요한 연구를 하는 실정이어서 주교님들을 포함해 교회 전체가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해야 한다”고 밝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추구하는 것이 순교신심

‘장소’만을 기준으로 성지순례를 하는 관행 역시 ‘관광성’ 성지순례를 조장하는 뿌리 깊은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국교회에서 이뤄지는 성지순례는 하루 코스로 특정 성지를 정해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신자들 상당수가 대열에서 이탈해 사진 찍기에 바쁘고 돌아오는 버스 안은 술과 노래로 유흥에 빠져드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회는 특정 장소를 정하지 않고 ‘다블뤼 주교의 순교 행적’이나 ‘윤지충 바오로의 압송로’를 따라 2~3일에 걸친 순례를 실시한 적이 있다. 이 순례에 참여한 신자들은 “허허벌판 같은 곳을 걸었지만 순교자들의 당시 모습을 머리에 그리며 순교의 고통과 영광에 동참한다는 감동을 받았고 순례를 마치고도 여운이 오래 남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대전교구 하부내포성지 전담 윤종관 신부도 “올바른 성지순례가 되려면 신자들이 순교신심의 핵심인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신부는 “신자들이 대형화 되고 편의시설을 잘 갖춘 성지를 선호하다 보니 자금력을 갖춘 성지들만 갈수록 커지고 있는데 예수님이 부활하고 마리아 막달레나가 처음 본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빈 무덤이었다”며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성지순례는 말짱 헛것에 불과하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서울 한국순교자현양회 이영애 시복분과 위원


“원형 잃어가며 대형 · 고급화 되는 성지 큰 문제”



서울대교구 한국순교자현양회(이하 현양회) 이영애(데레사) 시복분과 위원은 지난 2000년부터 14년째 현양회 정기 성지순례에 참여하고 있다. 공식적인 직책은 ‘성지순례 안내봉사자’로 현양회에서 실시하는 매월 셋째 주일과 넷째 화요일 성지순례의 처음과 끝을 책임진다. ‘성지순례에 미쳤다’고 할 정도로 순교자와 신앙선조의 흔적이 있는 곳이면 다녀보지 않은 곳이 없다.

이영애 위원은 한국교회 신자들의 성지순례를 ‘볼 곳, 쉴 곳, 먹을 곳’ 3가지를 찾아나서는 것으로 요약했다.

성지순례가 목숨까지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의 신심을 가슴으로 느끼고 배워 자기 삶 안으로 체화하는 여정이 돼야 하는데 실상은 ‘바람쐬기’나 ‘친교’의 수단으로 전락해 있다는 것이다.

성지순례가 본질에서 벗어난 원인에 대해 이 위원은 본당 사목자에게 일차적인 책임을 돌리면서 한 본당 사목자로부터 “신학교에서 한국교회사나 순교사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본당에 와서는 더욱이 신자들의 성지순례를 지도할 만한 교육 과정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본당 사목자와 신자들 모두 준비가 없는 순례를 하다 보니 외형적으로 보이는 것에 만족하는 순례가 된다는 설명이다.

이 위원은 “현양회는 교회사 수업과 현장 실습을 포함하는 6개월 과정의 성지순례 안내봉사자 양성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이 프로그램에 본당 사목자들이 참여하도록 교구에서 역할을 해준다면 우리나라 성지순례 문화는 확연히 달라질 것”이라며 “현양회에서도 고민을 안 한 것이 아니지만 성과가 없었다”고 아쉬워했다.

이 위원은 성지의 원형을 파괴하면서까지 대형화·고급화를 지향하는 성지가 날로 늘어가는 것도 심각한 문제라고 밝혔다. 신자들이 아름답다고 감탄하는 성지는 알고 보면 해당 성지의 연원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일본식 정원 양식을 좇아 순례객을 ‘관광객’으로 변질시킨다고 꼬집었다.

매월 2회 실시하는 현양회 성지순례는 ‘안 알려진 곳’을 위주로 진행하고 있고 2015년까지 3년치 순례지를 이미 짜 놓은 상태다. 우리나라 성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순교성지의 존재 근거가 되는 박해시대 교우촌이나 공소 자리를 밝히고 찾는 일이야말로 성지순례의 뿌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또한 순례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침묵 속에 각자 기도와 묵상을 하는 것을 철칙으로 지킨다.

이 위원은 마지막으로 “성지순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 선조들이 천국을 확신하고 살았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분명히 느껴야 한다는 점”이라며 “그래야만 박해로 인해 모든 것을 잃었어도 주님을 모시고 서로를 의지하며 참 행복을 얻었던 신앙 선조들의 삶의 자세를 배우는 진정한 성지순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가톨릭신문, 2013년 9월 15일,
박지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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