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프랑스 순례: 솔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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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8-16 ㅣ No.1143

[영원을 향하여 시간을 걷다 - 프랑스 순례] 솔렘


- 신자들은 신랑(身廊)과 내진(內陣) 사이의 칸막이 너머로는 들어가지 못한다. 제대가 저만큼 멀다.


솔렘(Solesmes)은 잘 정돈된 박물관 같은 마을이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텅 비어있는 길들이 아주 깨끗했다.

솔렘 마을의 성당에 잠시 들어갔다가, 성당과 이어진 파란색 문을 통해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수사님으로부터 잠시 개략적인 수도원 소개를 들었다. 천 년 전 지어진 수도원이지만 대혁명과 나폴레옹의 전쟁 여파로 해산되고 파괴되고, 심지어 두 번이나 추방되기도 했다.

지금의 수도원은 그 폐허 위에서 다시 뿌린 씨앗이었다. 게랑제(Gueranger) 신부가 베네딕토회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고 수도원 재건에 나선 후, 고대부터 사람들이 부르던 그레고리오 성가를 수도원 안에서 되살려 지금처럼 발전시켰다고 한다.

솔렘의 수도자들이 부른 그레고리오 성가와 수도원 앞 저토록 깨끗한 길, 아기자기한 골목과 마을의 집들, 오늘의 평화로운 아침으로는 지나간 역사의 상흔과 아픔을 상상도 할 수가 없다.

수도원 성당에 들어서니 제대는 저만큼 먼데 내진(內陣) 칸막이 너머로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수사님이 가리키는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마을 신자들도 천천히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다. 입당송이 시작되자 수사들과 사제들의 뒤를 이어 복음서를 든 사제가 입장했다.

수사들은 두 줄로 나아가 먼저 제대에 절하고 나서 서로 마주보고 인사하더니 양옆으로 갈라져 자리를 잡았다. 두건을 쓴 한 사제는 제대 중앙에 그대로 앉아 있다가 말씀의 전례 시작 전에 두건을 잠시 벗더니 다시 뒤집어썼다. 그 행위 하나하나에도 다 의미가 있을 텐데 아는 게 없다 보니 난해한 그림을 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한 풍경. 전례가 시작된 다음에는 사진을 찍을 수가 없어서 그 순간은 가슴속에만 남아있다.

그야말로 지상의 전례와 천상의 전례가 맞닿는 순간, 하늘의 문이 열리고 천사들의 기도에 인간이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매일 저토록 달콤한 기도를 입으로 노래하며 살 자신이 없었다. 그 순간은 오히려 삶의 무수한 양상 안에 존재하는 기도들이 좋았다. 더 절실하고 더 슬프고 더 어여쁘고 더 애틋했다. 다만 들숨과 날숨마다 하느님의 영이 함께하도록 그레고리오 성가의 그 리듬에 호흡을 맞추려고 애쓰고는 있었다.

장엄하고 절도 있고 엄격하고 빈틈없고 적절한 화음으로 이뤄지는 전례. 그 순간 난 유물의 일부가 된 듯한 기분도 들었지만 그럼에도 프랑스 솔렘에서는 이렇게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전례가 계속되는 한편, 지구 반대편 강정에서는, 대한문 앞에서는 또 다른 미사가 생생하게 봉헌되고 있다는 사실이 가톨릭교회의 살아있는 생명력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새삼 떨리기도 했다.

성당 익랑의 한쪽 전면을 가득 채운 ‘예수님의 매장’(왼쪽 사진)에서 또 한 번 마리아 막달레나, 프랑스의 마들렌(오른쪽 사진)을 만났다. 그녀의 표정은 실로 심상치가 않았다.

예수님의 시신 너머 성모님마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고통을 어찌할 수 없어 거의 혼절 직전인데, 막달레나는 좀 더 냉엄한 표정, 어쩌면 오히려 더 이상은 두려울 게 없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이미 고통의 신비 속에 잠긴 듯한 그녀의 얼굴을 보자 깊고도 역동적인 평화가 나를 감쌌다. 그녀의 전 존재를 사로잡았던 ‘사랑’이 아득하게 되살아나 나에게로 왔다.

흐린 사르트(Sarthe) 강변을 따라 솔렘수도원과 멀어지며 또다시 그녀를, 우리에게 왔던 그 젊은 사제들을 생각했다.

마들렌, 당신의 사랑만큼 간절한 사랑으로 불탔던 프랑스의 젊은 사내들이 있었답니다. 김대건 신부만큼이나 젊고 아까운 청춘들이었지요. 오늘 새삼 당신이 사랑에 빠졌던 때를 생각하며, 사랑, 그 깊은 바다를 건넜던 우리 성인들을 기억합니다. 영원한 천상에서 이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 이선미 로사 - 서울대교구 혜화동본당 신자. 가톨릭교리신학원 성서영성학과를 수료했다. 여러 차례 해외 성지를 순례하다 보니 가까운 성지와 우리 전통에도 눈이 뜨여 조금씩 관심을 기울이는 중이다.


- 그레고리오 성가의 본산으로 잘 알려진 솔렘수도원 앞. 정면에 솔렘 마을 성당이 있고, 그 옆으로 수도원이 이어져 있다.


[경향잡지, 2013년 8월호, 글 · 사진 이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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