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강론자료

2013-0505...부활6주일...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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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3-05-04 ㅣ No.1353

부활 제 6 주일 (다해)

사도행전 15,1-2.22-29         묵시록 21,10-14.22-23        요한 14,23-29

2013. 5. 5. 주일. 등촌3

주제 : 우리가 규칙과 규정에 사로잡혀 산다면.....?

사람의 삶은 수많은 규칙과 규정에 싸여 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 귀에, 세상에 있다는 규정들과 규칙들에 대한 얘기를 들려준다면, 놀랄 만큼 많다고 말할 것입니다. 당장 이 성당에 들어와 있는 여러분에게도 그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성당에 들어오면, 어떤 자세와 어떤 마음가짐으로 있어야 한다든지, 밖에서는 자유롭게 받을 수 있는 휴대전화도 성당 안에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규칙에 이르기까지, 삶에는 우리가 지키고 따라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규정들을 지킬 것을 얘기합니다만, 누구나 바랄 법한 가장 좋은 세상이라면 이러한 규범과 규칙들이 모두 사라지고 아무 것도 없는 세상일 것입니다.

 

구속력을 갖는 온갖 규칙과 규범이라고 해석하는 법()이라는 한자도 물이 흘러가는 모양을 보고 만들어졌다는 소리가 있습니다.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흘러가는 것이 순리입니다. 그런 자연의 순리에 사람의 힘이 더해지면, 낮은 데서 높은 데로 물이 가기도 하고, 흐르고 싶은 물을 흐르지 못하도록 막아두는 일도 생깁니다. 이 일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 이라고 부르는 것이 만들어졌는가 싶을 만큼, 우리에게 다가오는 규칙들과 규범들이 사람의 삶을 늘 편하게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이 사도행전 독서로 들은 말씀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사람으로 머물고 싶다면 지키고 받아들여야 할 규정이었던 유대인의 율법이,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교의 복음선포에 걸림돌이 되었다고 판단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 이제 율법은 더 이상 구속력을 갖지 않는다고 선언한,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결정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가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 예루살렘 사도회의가 세상에 통용되던 모든 규칙과 규범을 폐기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흔히 기억하던 율법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더 이상 힘을 쓰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지, 세상에 있는 모든 규칙과 규범들을 모두 없애는 데에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회의의 결정으로 율법을 지켜야하는 것은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따르거나 지킬 필요가 없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삶에 규범과 규칙은 필요합니다. 사람을 제한하고, 그 사람을 못살게 굴려고 하는 입장에서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자기 앞에 펼쳐진 일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할 것 같은 존재이면서도 또한 예상외의 행동을 하는 존재이기에, 사람에게는 실천해야하는 적절한 규범과 규칙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때, 생각할 수 있는 새로운 규범과 규칙은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사랑의 완성을 당신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잘 지키는 것에서부터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짧게 요약하면 그것은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평화안에 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평화는 사랑만큼이나 알아듣기가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요즘, 같은 민족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가장 가까워야 할 남쪽과 북쪽의 나라가 서로 만나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아주 무서운 관계로 변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생긴 이런 문제를 극복하려면, 우리가 평화를 말해야 하지만, 이때 말하는 평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와 같은 것이 아니라, 무자비한 폭격을 감행할 수 있는 전투기와 인정사정 볼 것 없는 사람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폭탄을 배경으로 하는 평화라면, 우리 민족의 앞날은 캄캄하고 험난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일부 어른들의 말씀이나 우리나라 정치지도자들의 말처럼, 남쪽에 사는 우리가 북쪽에 무조건 퍼주었더니 돌아온 것은 우리가 사는 남쪽을 멸망시키려는 위협밖에 없다는 판단도 참으로 겁나기는 합니다만, 그러한 말을 듣는 우리가 우리 앞에 펼쳐진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진정한 평화와 사랑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시기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무력이나 힘을 바탕으로 하는 평화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합니다만, 그것만으로는 우리 앞에 펼쳐진 현실을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길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겠는지 참으로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로 존경을 받고 흠숭을 받는 방법이 따로 있어서 특별하게 되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고통을 피할 방법을 몰라서, 제자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의 배반과 그가 판 허방을 뻔히 알면서도 그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길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나아가셨을까요? 예수님이 가졌을 마음이 궁금해서 질문하는 것이기는 합니다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모르는 사람이 오늘 이 미사에는 얼마나 많겠습니까? 현실 세상에 신앙인으로 살고 있는 우리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런 모습대로 실천하면서, 진정으로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길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없겠느냐는 것입니다.

 

신앙의 길과 세상의 길은 다릅니다. 우리가 세상의 사정에만 매여 있는 인간이라면 신앙의 길에서 말하는 방법들이 얼토당토않다(=전혀 상관이 없다/전혀 가당치 않다)고 말할 것이고, 우리가 신앙의 길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세상이 그렇게 행동하지 않은 모습을 보면서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천사가 사도요한에게 보여주었다는 하늘의 예루살렘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실현될 수 없는 것일까요?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고, 그와는 반대로 실현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그 생각에 맞춰 지금 어떻게 살고 있다고 판단하십니까?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삶을 우리가 이룰 수 있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과연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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