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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콘스탄츠 공의회1 - 서방 교회의 대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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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15 ㅣ No.162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콘스탄츠 공의회 (1) 서방 교회의 대분열

 

 

아비뇽에서 교황이 돌아왔다. 그레고리오 11세는 1377년 1월에 로마로 돌아와 주교좌인 라테라노 대성전이 아니라 베드로 사도의 무덤 곁에 거처를 정해 ‘바티칸 시대’를 열었다. 교회 개혁의 기대가 높아졌다.

 

 

교황이 아비뇽에서 돌아왔지만

 

이듬해 교황이 죽자, 로마 시민들은 프랑스인이 새 교황으로 뽑혀 아비뇽으로 돌아갈까 불안해졌다. 실제로 로마에 있던 16명의 추기경 중 11명이 프랑스인이었다. 시민들은 새 교황으로 이탈리아인을 뽑으라고 폭동에 가까운 시위를 하며, 교황 선거장에까지 난입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이탈리아 바리 대교구장인 프리냐노 대주교가 교황 우르바노 6세로 즉위하였다.

 

그는 추기경단 밖에서 뽑힌 마지막 교황이다. 아비뇽 교황청의 상서원에서도 일했던 그는 교황권 확립을 위하여 처음부터 강력한 개혁 의지를 내보였다. 추기경단부터 손을 댔다. 추기경들의 부도덕과 사치, 성직매매를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기득권을 잃게 된 추기경들은 교황의 과격한 언행을 빌미로 그를 베드로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인격 파탄자로 몰아세우며, 자기네가 직접 뽑은 교황 선거가 이탈리아인들의 강압에 따른 것이므로 무효라고 선언하고 교황을 해임하였다.

 

프랑스 추기경들은 클레멘스 7세를 대립 교황으로 뽑아 아비뇽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것은 두 교황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부유한 추기경들이 야욕에 눈먼 집단 이기주의에서 벌인 파벌 싸움이었다. 두 교황은 자기 심복들을 추기경으로 임명하고 각기 따로 교황청을 구성하였다.

 

서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가 둘로 갈라졌다. 국가는 물론 교회도 수도원도 가정도 모두 갈라졌다. 서로 이단자라고 파문하였다. 결국에는 모든 신자가 모조리 파문당하고 말았다. 40년이나 지속된 이 교황 분규사태를 서방 교회의 대분열[西歐 大離敎]이라고 한다.

 

 

공의회가 교황보다 높다?

 

이러한 분열 위기에서 공의회 우위설이 힘을 얻기 시작하였다. 보편 공의회가 교회를 대표한다는 사상이다. 교회 권력은 ‘신자들의 모임’에서 나오며, 공의회가 교황 위에 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렇다는 것이지, 국민 주권을 내세우는 민주주의 이론은 아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유기체 사상에 근거하여, 교회의 힘은 머리뿐만 아니라 그 지체에도 있다는 것이다. 신앙의 오류를 범하거나 권력을 남용하여 교회에 해를 입히는 그릇된 교황은 더 이상 교황이 아니다. 교황 개인은 오류를 범할 수 있으나, 교회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따라서 교황의 잘못은 공의회가 판단한다.

 

이러한 공의회 우위설을 바탕으로 교황 분규에 대한 세 가지 해결책이 제시되었다. 두 교황이 모두 사퇴하거나, 직접 타협을 하거나, 공의회에서 해결하자는 것이다. 학자들과 군주들이 앞장서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처음 두 길은 아예 가망이 없었다. 두 교황이 죽고 각각 그 후계자가 선출되었다. 정치적인 구도도 바뀌어갔다.

 

프랑스는 아비뇽 교황과 관계를 끊겠다고 선언하였다. 양쪽 진영에서 이탈한 일부 추기경들이 피사에서 보편 공의회를 열자고 의견을 모았다. 소집 자체부터 대단히 불확실했던 이 공의회에는 1백여 명의주교들과 그 이상의 주교 대리, 수많은 수도원장과 그 대리들, 그리고 13개 대학 대표가 참석하였다. 그레고리오 12세와 베네딕토 13세 두 교황도 소환되었으나 출두하지 않았다. 두 교황을 불순종자로 여겨 폐위시키고, 1409년 6월 26일 필라르기 추기경을 교황 알렉산데르 5세로 뽑았다.

 

그는 크레타 섬에서 구걸하던 고아였다고 한다. 프란치스코회에서 자랐기에 그는 교황이 된 뒤 구걸[托鉢] 수도자들에게 너무 헤프게 특전을 베풀었다고 한다. 이듬해 봄 교황은 유력한 코사 추기경과 함께 머물다가 갑자기 죽었다. 독살 소문이 퍼졌다. 그래도 코사 추기경이 새 교황으로 뽑혀 요한 23세*(각주 참조)로 즉위하였다. ‘가증스런 두 교황’ 자리에 ‘저주받은 3위’가 들어섰다는 것이 당대의 탄식이었다. 피사에서 두 교황의 분규가 해결되기는커녕 교황만한 명 더 늘어났다. 교회 일치를 위한 노력은 실패하고 말았다.

 

 

새로운 공의회에서 교황은 도망치고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보덴 호수 근처 콘스탄츠에서 세계 공의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교황 요한 23세의 동의를 억지로 받아냈다. 명민한 군주였던 그는 다른 두 교황 측과도 협의하고, 비잔틴 제국의 마누엘 황제도 초대하였다. 소집 목적은 교회 일치, 개혁, 신앙 문제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1414년 11월 5일 콘스탄츠 주교좌성당에서 공의회 개회를 선언하였다. 다른 두 교황보다 지지자가 많았던 그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자신의 합법성이 확인되리라 믿었다.

 

그러나 이 공의회에서는 주교 개인이 의결권을 행사하는 대신 국가별로 나누어 토의와 표결을 하기로 하였다.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로 나누기로 한 것이다. 나중에 에스파냐가 공의회 국가로 들어왔다. 이 공의회의 독특한 의결 방식은 파리 대학교의 제도를 본떠 생겨난 것이다. 제2차 회의에서 요한 23세는 다른 두 교황의 퇴위를 전제로 자신의 사퇴를 약속하였지만, 기대에 빗나간 이 공의회를 어떻게든 해산시키고 싶었다. 그는 옷을 바꾸어 입고 몰래 도망을 쳤다. 지기스문트는 불굴의 인내로, 공황 상태에 빠져 너나없이 도망치려고 하는 그 도시를 추스르고 공의회를 지속시켰다.

 

제5차 회의는 교회의 전반적인 개혁에 공의회 우위설을 적용한 교령(Haec Sancta)을 발표하였다. 피신처를 전전하던 요한 23세를 붙잡아, 공의회는 세 차례의 재판을 거쳐 제12차 회의(1415년 5월 29일)에서 폐위시켰다. 지기스문트는 나머지 두 교황의 사임에 관한 협상에 나섰다.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2세는 콘스탄츠 공의회의 소집을 선언한 다음 사임하였다.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는 여섯 차례의 궐석 재판을 거쳐 공의회 제37차 회의에서 해임되었다.

 

이제 교황 선출과 교회 개혁의 순서가 논란이 되었다. 이 논란은 공의회를 통한 개혁을 보장하는 교령(Frequens)의 통과로 마무리되고, 공의회 5개 국가 대표들과 추기경단이 교황 선거에 들어가 1415년 11월 11일에 마르티노 5세를 새 교황으로 뽑았다. ‘투쟁하는 교회’(신앙인은 언제나 삼구三仇, 곧 세 가지 원수인 육신, 세속, 마귀와 싸워야 한다.)의 분열은 끝났다.

 

그러나 공의회는 위클리프와 후스 등이 주장하는 이단설과 교회 개혁 문제들을 다루며 1418년 4월 19일 제44차 회의까지 계속된다.

 

* 현행 “교황청 연감”의 교황 목록에는 이 시대 아비뇽과 피사의 교황들을 대립 교황으로 여겨 괄호 안에 묶어둔다. 그래서 1958년에 교황으로 뽑힌 론칼리 추기경은 요한 23세라는 이름을 선택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 강대인 라이문도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번역실에서 일하고 있다.

 

[경향잡지, 2008년 6월호, 강대인 라이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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