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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소현세자와 아담 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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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15 ㅣ No.160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소현세자와 아담 샬 신부

 

 

17세기 동아시아 사회는 일대 변혁이 진행되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명나라 망하고 청나라로 바뀌었으며, 일본의 경우에도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이 몰락하고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되었다. 조선 또한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 급격한 변화의 물살을 타게 되었다. 이 변혁의 과정에서 일본이나 중국에 와있던 서양인 선교사들은 조선 선교를 시도했다. 조선왕조의 처지에서도 천주교와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갔다. 소현세자와 아담 샬 신부의 만남도 이렇게 이루어졌다.

 

 

소현세자와 아담 샬은 누구인가?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년)는 조선의 국왕 인조(仁祖)의 맏아들이다. 그는 13세 때에 세자로 책봉되어 왕위를 이어받을 재목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은 세자 소현의 운명을 크게 뒤흔들어 놓았다. 만주족이 일으킨 청나라의 침략을 받은 조선 왕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한 달 남짓한 기간 항전을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었다.

 

조선이 항복한 뒤 소현세자와 그의 동생인 봉림대군은 청국에 저항하는 정책을 주장하던 여러 신하와 함께 인질이 되어 청국의 수도 셴양[瀋陽]으로 끌려갔다. 여기에서 9년 동안 머물던 소현세자는 현실적으로 청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청의 왕족 그리고 장군들과 친교를 맺고 양국 간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는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발생하는 일을 처리하는 외교적 소임을 수행하고 있었다.

 

한편 청국군은 만주를 석권하고 조선을 굴복시킨 데 이어서 마침내 베이징을 함락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1644년 9월 청군을 따라 베이징에 들어가 70여 일을 머물던 소현세자는 예수회원인 아담 샬(Adam Schall von Bell, 湯若望, 1592-1666년) 신부를 만났다. 아담 샬 신부는 독일 쾰른에서 태어나 예수회에 입회하여 중국 선교를 자원하여 1619년 중국 마카오에 도착했고, 1623년 베이징에 진출할 수 있었다.

 

중국의 황실은 ‘천하’에 표준을 정해주는 일을 수행해야 했다. 이 작업 가운데 시간의 정확한 기준을 정해주기 위해서는 천문학에 대한 지식이 필요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천문학이 ‘제왕의 학문’으로 중요시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아담 샬 신부도 당시 중국에 들어왔던 다른 예수회원처럼 자연과학에 관한 지식을 통해서 서양 오랑캐가 아닌 당당한 지식인으로 대우를 받았다.

 

아담 샬 신부는 중국사회의 인정을 받은 이후 명나라의 조정을 위해 역서(曆書)를 편찬하아여 제공했다. 그리고 대포를 비롯한 화기를 제작하여 명의 숭정황제에게 포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일식이 일어날 날짜를 정확히 예측하여 자신의 천문학 지식이 기존의 중국 천문학보다 정확함을 확인시켜 주었다.

 

1644년 명나라가 망하고 청왕조가 들어섰다. 아담 샬 신부는 곧 청나라 조정에 자신의 베이징 체류를 허락해 달라는 청원문을 제출했다. 그는 체류 허가를 얻은 다음 정부의 천문 관측기구인 흠천감에 소속되어 천문기구를 제작했고, 새로운 달력 편찬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는 1645년 흠천감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중국에 머무는 진정한 목적은 그리스도교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조정의 신임을 바탕으로 1629년에 시안[西安]에 천주당을 세울 수 있었다. 그가 머물던 베이징의 예수회 선교원은 외관상 교회로서 특성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작고 평범한 집이었다. 이 집에서 그는 언제나 그리스도교의 포고 방안을 모색하였다.

 

 

두 사람의 만남

 

베이징의 첫 성당인 남당이 세워진 때는 1652년이었다. 소현세자가 머물던 1644년 당시 베이징에는 변변한 교회 건물이 한 채도 없던 때였다. 이러한 시기 베이징에 도착한 소현세자는 아담 샬의 명성을 듣고 예수회 선교원을 방문하여 아담 샬 신부와 대화를 나누었다. 소현세자는 선교사의 명성을 듣고 평범한 선교사의 집을 일부러 찾아갔다. 뜻밖에 소현세자를 만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 신부는 그와 소현세자의 만남을 동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서술하였다.

 

“세자는 매우 정중히 저를 방문했고, 또한 자기 궁전에서 역시 정중히 저를 손님으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는 중국에서 좀 더 역학을 익히게 하려고 조선에서 역관(歷官)으로 일하던 이들 몇몇을 데려왔습니다. 저는 기꺼이 그들을 도와주었습니다. 저는 그들과도 우의가 두터워져서 그들은 귀국할 무렵에 사은의 정표로 적지 않은 선물을 제게 주었을 뿐 아니라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조선인이면 흔히 그렇듯이 조선 임금 역시 학문을 즐겼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닌 책을 모조리 선물했습니다. 역서뿐 아니라 (천주의) 계명을 다루는 책도 선물하고 천구의(天球儀)와 구세주상(救世主像)도 선물했습니다.”

 

소현세자는 아담 샬 신부한테 선물을 받고 곧 감사의 답장을 보냈다. “어제 뜻밖에 제게 보내주신 구세주 천주상, 역서들, 기타 서학서들을 선물로 받고 제가 얼마나 감격했는지 상상도 못하실 것입니다. 몇몇 서책을 대충 살펴보니 저희가 이제까지 모르던 교리였습니다. 마음을 닦고 덕을 기르는 데 매우 적절한 교리입니다. … 이제 책들과 성화상을 본국으로 갖고 들어가고 싶사오나, 제 백성이 경신예식을 알지 못하니 잘못된 경신예식으로 천주의 존엄성을 손상할까 두렵습니다. 이 두려움 때문에 저는 적지 않게 번민하고 있습니다. 성화상을 가져갔다가 무슨 잘못을 범하느니, 차라리 신부님께 돌려드리려 했사오니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소현세자는 이 새로운 만남에 대해 감격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소현세자는 아담 샬 신부에게 이러한 글을 전했다. “저희 두 사람은 출신국이 다를 뿐 아니라 대양이 가로놓여 멀리 떨어진 땅에서 각기 태어났건만, 이 외국 땅에서 상면한 이래 마치 혈연으로 맺어진 것처럼 상호 경애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인간 본성 속에 숨은 어떤 힘이 작용해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매우 먼 땅에서 서로 떨어져 있어도 사람의 마음은 학문으로 합치될 수 있다는 사실만은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듯 세자와 선교사 사이에는 고귀한 우정이 시나브로 움트고 있었다.

 

 

나머지 말

 

조선의 세자는 셴양에 머물면서도 세자시강원의 관리들에게서 경학(經學)과 성리학적 정통 유학사상에 대한 교육을 꾸준히 받았다. 그런 소현세자가 베이징의 아담 샬을 찾아서 천문학에 대해 물어보았다는 것 자체는 상당한 의미를 가진 사건이다. 소현세자는 중국의 각종 문물과 만나면서 경학보다는 천문이나 수학과 같은 실용적인 학문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선교사 아담 샬이 전해주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각별한 관심을 표현했다. 그러나 그가 정통 유학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사실은 새로운 비극을 잉태하는 행위였다.

 

소현세자는 귀국 직후 의문의 죽임을 당한다. 세자빈 강씨(姜氏)도 세자가 죽은 지 이태 뒤 인조를 독살하려고 했다는 혐의로 죽임을 당했다. 이로써 천주교 신앙에 스스로 가까이 접근했던 소현세자와 그 가족의 비극은 끝이 났다.

 

이 무익한 고통과 죽음은 후일 이 땅에서 천주교 신앙인이 당할 고통과 죽음을 예시하는 사건인 듯도 하다. 세자가 죽은 다음 130년이 지나서야 이 땅에서는 천주교회가 세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가족이 겪은 비극이 되풀이되었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8년 5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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