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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박해시대의 세례성사 - 박해시대의 대세와 보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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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8 ㅣ No.114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박해시대의 세례성사

 

박해시대의 대세와 보례

 

 

세례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입문하는 절차다. 교회는 이 성사로 사람들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세례는 그만큼 신자들의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일이기에 우리나라 초기교회에서는 신자들도 세례성사를 집전하도록 교육받았다. 회장을 비롯한 신자들은 당당히 세례성사를 집전하였고, 이리하여 신자 공동체가 확산되고 교회의 성사와 전례가 신자들의 일상생활과 결합되어 갔다. 이러한 사실은 박해시대의 교회사에서도 분명히 확인되고 있다.

 

 

대세란 무엇인가?

 

1876년 이전에 우리나라 교회에서 사용했던 “성교요리” 같은 교리서에는 “뉘 세를 부치느뇨? 본래 탁덕의 본직이로되 다만 위험을 만나면 어떤 사람을 의론치 말고 다 능히 세를 부치나니라.”고 되어있다. 곧 세례는 탁덕(鐸德 : 신부)이 집전해야 하지만 급할 때에는 누구든지 이를 수행할 수 있다고 설명해 왔다. 이를 ‘대세’라고 한다. 곧, 대세는 사람의 생명이 위독하나 사제를 청해올 겨를이 없을 때 비상조치로 신자들이 직접 집전하는 세례를 말한다.

 

원래 세례성사는 성사 자체가 효력이 있기 때문에 성직자뿐만 아니라 설령 외교인이 집전한다 하더라도 그 성사는 유효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박해시대와 같이 성직자의 활동이 여의치 못하거나 불가능할 경우에는 회장을 비롯한 일반신자들이 직접 세례성사를 베풀었다. 이때 갓 태어난 어린아이나 입교를 희망하는 어른들에게 대세가 행해졌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유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인정해 왔던 우리나라 박해시대 교회에서는 이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태어난 다음 사흘 이내에 세례를 주도록 권장해 왔다. 이 과정에서 유아들에게 베푸는 세례의 대부분은 신자인 회장들의 몫이 되기도 했다. 물론 부모가 자신이 낳은 자식에게 집전하기도 했다.

 

박해시대 교회사에서 유아세례에 관한 기록은 1801년에 순교한 정광수(鄭光受)의 말을 통해서 처음으로 확인된다. 정광수는 포도청에 잡혀서 신문받는 과정에서 “내가 몇 년 전에 아들을 낳을 때, 주문모 신부가 가르쳐 주기를 이마를 깨끗한 물로 씻으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주문모 신부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말하기를 ‘조상의 원죄와 신생아의 본죄를 씻는 일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그의 말에 따라 그대로 행했다.”고 말했다.

 

이 기록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우리나라 초기교회 때부터도 유아에 대한 대세가 행해지고 있었다. 박해시대 신자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교우촌을 만들어 살게 되자, 이곳에서 태어난 새로운 생명들은 교우촌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회장에게서 대세를 받았다. 그리고 19세기 중엽 조선에 파견된 프랑스 선교사 메스트르 신부는 죽을 위험에 처한 어린 영혼을 구하고자 대세를 장려했다. 그가 설치한 ‘영해회’의 목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위험에 처한 어린이들에게 대세를 주는 일이었다.

 

선교사들이 이들에게 세례를 전문적으로 집전할 회장을 특별히 고용할 만큼 당시 교회는 어린이 대세를 소중한 신앙행위로 여겼다. 박해시대 대세는 어른들에게도 베풀어졌다. 박해 때문에 성직자의 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할 경우 신도들은 입교 희망자들에게 주요 교리를 가르치고 직접 세례를 행했다. 물론 박해 당시의 사회에서도 목숨이 경각에 이른 사람들에게 ‘조건부 대세’를 베풀기도 했다.

 

 

보례가 왜 필요했을까?

 

보례(補禮)는 보충예식의 줄임말이다. 세례의 핵심은 물과 성령으로 씻는 의식이다. 그러나 교회는 세례성사에 여러 의미를 부여하면서 기름을 바르는 의식과 같은 일부 절차를 추가했다. 대세는 이 의식을 채우지 못하고 있었다. 교회 공동체에서는 이 의식을 마저 베풀어 대세를 통해서 받은 세례의 효력이 대세자의 믿음을 완성시키도록 배려하게 되었다. 보례를 집전하는 사람은 물로 씻는 예식만을 제외하고 세례성사를 집전할 때 수행하는 기타 절차를 거행해 주어야 한다.

 

흔히 대세는 정상적 경우와 달리 비상시에 집전되는 일이므로 세례를 받은 이후 수행해야 하는 여러 신앙행위에 대한 교육을 충분히 시행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보충교육의 필요성이 대두하게 되었다. 곧, 대세자가 살아나서 신앙생활을 계속하려면 보례를 받아야 했다. 따라서 보충 교육을 마친 대세자에게는 세례의 보충예식인 보례를 요구하게 되었다. 대세자는 보례를 받기 전에 고해성사를 먼저 하도록 했다. 이는 대세도 완전한 성사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례를 받은 다음 다른 성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1795년 조선에 입국한 주문모 신부는 우선 대세를 받았던 사람들에게 보례를 집전해야 했다. 그는 신문과정에서 자신이 해야 했던 중요한 교회 업무 가운데 하나로 보례를 들었다. 아마도 그는 이를 신자 재교육의 기회로 이용한 듯하다. 1850년대에 조선에 입국했던 다블뤼 신부도 어른과 어린이들에 대한 보례에 열심이었다.

 

다블뤼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최양업 신부도 마찬가지였다. 1857년 한 해 동안 최양업 신부는 어른 171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대세 받은 어른 17명에게 보례를 주었다. 이 기록을 통해 우리는 당시 최양업 신부가 관할하던 신자 가운데 적어도 10퍼센트 가량은 성직자가 아닌 신자 회장 등에게서 대세를 받고 입교한 사람들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선교사들은 보례로 대세가 올바로 집전되었는 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다블뤼 신부가 그의 사목 보고서에 “그리스도교의 기본적인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외교인 여자가 신랑과 결혼하는 날 그 여자가 무슨 일인지 알지도 못하는데 그에게 세례를 준 일이 있습니다.”라고 기록한 대로 박해시대 당시 교회 일부에서 세례는 그 의미마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채 집전된 사례가 있었다. 이 경우에서처럼 보례는 세례성사의 유효성을 다시 검토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남은 말

 

세례는 박해시대 신참자가 신자 공동체에 들어오는 예식이었다. 그러므로 다블뤼가 보고한 예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이마에 무조건 물을 부어 공동체의 일원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박해가 끝난 다음에도 한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사제 수가 많지 않았으므로 공소회장이 유아세례를 준 다음 본당신부가 공소를 방문할 때 보례를 받도록 하였다. 그리고 보례를 받은 뒤에는 보례떡을 만들어 이웃과 나누어 먹었는데, 마치 관례를 치르고 성인이 되는 예식과 비슷하게 인식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어린이들이 교회 공동체의 정당한 구성원으로 성장해 나가던 과정에서 반드시 통과해야 했던 의례가 보례였다. 또한 신자들의 처지를 정상으로 되돌리는 생활의 의례이기도 했다. 이렇게 보례를 통해서도 신앙은 이땅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5년 7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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