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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박해시대의 부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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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1 ㅣ No.38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박해시대의 부활절

 

 

박해시대 한국교회에서는 축일을 어떻게 지냈으며, 어떤 축일을 가장 성대하게 지냈을까? 물론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축일', '대축일' 등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박해시대 신자들은 '부활첨례'를 가장 성대히 지내고자 했다. 그리고 이 부활축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새로운 축제로 만들어갔다.

 

 

박해시대의 수난과 부활

 

한국교회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교회창설 직후부터 각종 축일을 기념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우리 나라에 전래되었던 한문 교회서적이나 "천주성교공과"와 같은 기도서에는 각종 축일에 관해 전하고 있다. 이러한 책자나 기록들 가운데 예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기록이 적지 않다. 또한 신자들의 신심 실천을 전하는 기록도 많이 남아있다.

 

그런데 1801년 관헌들이 신자들의 집에서 압수한 교회서적에는 "봉재후", "수난시말", "예수수난도문" 등과 같은 한글로 번역된 책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신자들이 예수 부활을 직접 드높이기보다는 인간이 되어 고통을 당하신 예수께 대한 신심이 매우 깊었음을 말한다. 신자들의 신문기(訊問記)나 일대기를 분석해 보면 신자들 사이에는 예수의 수난에 관한 깊은 묵상이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신자들의 그리스도관에서 예수 수난이 차지하였던 비중은 상당히 높았다. 그러나 수난은 찬란한 부활이 있었기에 의미가 있다. 따라서 당시인의 수난에 대한 묵상은 부활로 이어지게 마련이었다.

 

순교자들이 즐겨 봉독했던 "천주성교공과"의 '예수 부활주일' 항목에는 "이 날이 천주(天主)이 특별히 내신 날이라. 우리들이 마땅이 크게 용약하고 즐거워하야 지낼지어다. 알네뉘아 알네뉘아."라는 설명이 들어있다. 당시 교회에서는 부활절이 하느님께서 직접 마련하신 날이고, 신자들은 마땅히 기뻐해야 할 날이므로 '알렐루야'를 소리 높이 외치라고 말했다. 그리고 '예수 도문' 곧, '예수 호칭기도'와 '부활 때 찬미경'을 수록하여 부활의 의미를 특별히 강조했다.

 

 

1801년 부활절 여주에서 있었던 일

 

박해시대의 신자들은 부활절을 매우 성대하게 지내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부활절이면 일종의 축제를 지냈고, 멀리 떨어졌던 가족들이 함께 모여 즐거워했다. 박해시대 한국교회가 부활절에 축제를 지냈다는 사실은 당시의 서양 관습과 차이를 드러낸다. 서양 교회에서는 부활절이 아닌 사순절 직전에 축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부활절에 축제를 지냈다는 것은 1801년 경기도 여주에서 일어났던 일을 통해서 확인된다. 당시 이곳에 살던 이중배 마르티노와 원경도 요한은 친구 정종호의 집에 가서 부활절 잔치를 벌였다. 정종호는 그들을 기꺼이 맞아들였고, 개를 잡고 술을 많이 장만했다.

 

그리고 그의 가족과 손님들, 이웃에 사는 몇몇 교우들과 함께 길가에 모여, 모두 큰소리로 '알렐루야'와 '부활 삼종경'을 외고 나서, 바가지를 두드려가며 기도문을 노래했다. 그런 다음 가지고 간 고기와 술을 먹고, 식사가 끝난 다음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이 부활절 잔치 소식을 탐문한 수령은 고을의 형방, 아전들을 보내서 잔치에 함께 있던 이들을 '일망타진'하여 감옥으로 끌고 갔다. 이때 잡혀간 신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며 순교의 길을 걸었다.

 

 

부활절에 단행된 1815년의 박해

 

부활절 잔치를 계기로 박해가 진행되었던 사실은 1815년 경상도 지방의 박해에서 확인된다. 그때 경상도 신앙공동체에는 전지수라는 신자가 있었다. 그는 신자들에게서 푼돈을 받아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신자들의 애긍이 시원찮다고 생각하고는 이들을 고발하여 한몫을 잡아보고자 했다. 그는 교우들이 큰 축일이면 집에 돌아와 함께 지낸다는 풍습을 알고 있었으므로, 부활절에 신자들을 습격하기로 작정했다.

 

그 해 부활절, 청송 노래산의 평화스런 교우촌에서 주민들은 함께 모여 큰소리로 기도문을 합송하고 있었다. 이때 전지수를 앞세운 청송고을 형방 아전들이 들이닥쳤다. 박해를 당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던 교우들은 너무도 의외여서 처음에는 도둑들이 쳐들어오는 줄 알고 대적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관헌임을 알게 되자 어린양처럼 양순하게 포승을 받았다. 이때 고성운 요셉과 구성열 바르바라, 장애인이었던 김시우 알렉스를 비롯하여, 김 아가다 등 여성 교우들도 체포되었다. 이들은 여러 차례의 문초와 고문을 용감무쌍하게 감수하며, 순교의 길을 걸었다. 그들은 부활을 실천했고, 부활에 살았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그들의 시복을 추진하고 있다.

 

 

부활절의 의미

 

우리 교회 지도자들은 예수의 수난이나 부활의 의미를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해 왔다. 1866년 충청도 보령 수영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를 비롯한 다섯 명의 순교자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서울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후 집행지인 보령으로 이송되던 중 시편을 읊고 성가를 부르며 감사의 기도를 하느님께 드렸다. 이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관헌들이나 일반인들 모두는 뜻밖으로 여겼다.

 

그들은 예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신 성목요일 저녁에 형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르렀다. 다블뤼 주교 일행을 압송해 가던 포졸들은 이 이튿날 길을 꽤 많이 돌아 이웃 읍내에 가서 사형수들을 조리돌림하려고 했다. 이에 다블뤼 주교는 포졸들에게 단호하게 "안되오. 당신들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불가능하오. 내일 형장으로 곧바로 가시오. 왜냐하면 우리는 내일 죽어야 하기 때문이오."라고 했다.

 

다블뤼 주교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신 성금요일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피를 흘리고자 했다. 이러한 경건한 소원을 하느님께서 들어주셨다. 그리하여 다블뤼 주교 일행을 압송하던 포교는 더 이상 찍소리 못하고 곧바로 보령의 수영으로 가서 형을 집행했다. 뒷날,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한 안중근 토마스 의사는 자신의 사형이 예수 수난일에 집행되기를 청원했다. 그의 이 청원은 거절되었다. 그러나 안중근도 다블뤼 주교처럼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하고자 하는 자신의 소망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추석이나 설날이 되면 고향을 억세게 찾아서 가족과 함께 지내고자 한다. 박해시대 신자들은 부활절이면 그렇게 함께 모였다. 그들은 가족간의 우의와 믿음을 다졌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남긴 기록에는 예수 수난에 대한 언급이 많다. 박해 당시의 신도들은 그리스도의 수난에 특별한 일체감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찬란한 부활을 신앙하는 사람에게나 의미있는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박해시대의 신자들은 기쁜 부활절을 지내고자 했다. 교회 지도자들과 신자들은 예수와 함께 수난당하고 부활하고자 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박해시대 한국 신자들이 가지고 있던 부활신앙의 특성을 확인하게 된다. 또한 부활절이 우리의 잔치라면 우리 한국교회는 부활절 음식을 생각해 볼 때도 되었다. 200년 전 부활절에 여주 고을 정종호가 마련했던 개고기여도 좋을 듯하다. 

 

[경향잡지, 2001년 4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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