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자료

2011-0417.....수난성지주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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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1-04-16 ㅣ No.1035

수난 성지주일 (가해)
입성기념식 복음 : 마태오 21,1-11
이사야 50,4-7          필리피 2,6-11        마태오(짧게....... 27,11-54)
2011. 4. 17. 등촌3
주제 : (드러내야 할) 우리의 마음
올해 2011, 우리가 지내온 사순절을 마감하는 주간으로서, 성주간의 첫째 날이 되었습니다. 오늘 전례의 첫 번째 순서로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였던, 히브리백성들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나뭇가지를 들고 환영하는 예루살렘입성기념식을 짧게 거행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마음으로 그 순간을 지냈는지는 모르지만, 웬만한 땅 어디에나 심으면 계속해서 자랄 수 있는 나뭇가지를 손에 들고 생명의 주님을 기억한 예절이 그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금요일에 이루어질 예수님의 수난에 관련된 이야기를 마태오복음을 통해서 수난기라는 이름으로 읽었습니다.
 
사람의 삶에는 항상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그 시작은 모르고 끝만 아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시작은 알지만 끝은 모르는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또한 시작이 언제였는지도 모르고, 끝이 내 삶에 과연 언제 다가올지도 모르는 일들 가운데 우리가 생명을 마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올 해 사순절은 지난 39일부터 시작했고, 이번 주간 423, 성주간 토요일까지 40일간을 지낼 것이고, 다음 주 이 시간쯤에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다시 살아난 것을 기념하는 부활은 더 없이 행복한 일이지만, 그 일에 앞서, 죽는 일을 먼저 받아들여야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복음시간에는, 마태오복음사가가 쓴 예수님의 수난기를 짧게 읽고 들었는데, 기억에 남은 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혹시라도 왜 이렇게 오늘 복음은 너무 길었어! 뭐 특별히 기억해야 할 내용이 있나?’ 하실 분들은 없을까요? 우리가 그렇게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런 사람들을 대할 예수님의 마음은 답답하거나 허전하시지는 않을까요?
 
히브리백성의 민족 해방절이었던 과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모였던 사람들이 사람을 살리는 일에 마음을 모은 것이 아니라, 바랍빠라고도 하는 예수와 메시아라고도 하는 예수 사이에서 이미 한 사람을 죽이기로 작정한 그 장소에서, 그 사람들의 힘에 눌려 빌라도는 로마의 행정장관으로서 한 사람을 사형에 처하도록 명령하는 죄를 짓게 됩니다. 이 자리에서 빌라도를 편들어주자는 것은 아니지만, 히브리민족들의 위세(?)에 눌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고 말해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그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무죄확신을 하면서도(마태 27,23?)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명령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이 사람의 피에 책임이 없다는 뜻으로 손을 씻는 일로서 그 자리에서 도망칩니다. 사람이 하는 일은 옳고 그름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보다는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서 움직이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간밤의 꿈자리가 뒤숭숭했다고 부인이 와서 얘기는 했지만, 빌라도는 그 소리를 들을 상황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빌라도처럼 손을 씻기만 하면, 내 앞에서 지금 일어나고 벌어지는 일들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참으로 그것이야 말로 참으로 신기한 일이고, 그렇게 느끼면서도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욱 더 신기한 일이 될 것이며, 연구할 가치가 있는 아주 재미있는 주제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시간에 우리는 예수님의 재판과 수난에 대한 것을 읽었습니다만, 실제로 오늘 주일의 초점은 수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지(聖枝)주일에 있습니다. 성지주일은 미사의 시작부분에 성지를 축성하면서,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에 모셨던 일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나뭇가지를 들고서, 내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인류의 구원자라고 인정하며 환호할 사람일까요? 만일 내가 예수님을 가리켜서 인류의 구세주라고 인정한다면, 나는 과연 어떤 일을 통해서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낼 것이며, 내가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일에 다른 사람들도 함께 할 수 있도록 얼마나 좋은 본보기를 보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신앙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 의미이겠습니까? 올바른 신앙인이라면 그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이런 소리를 들을 때, 내 옆에 있는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내용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같은 질문을 들을 때, 나는 그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받아들이며, 어떻게 행동으로 드러내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고, 그 사실을 드러내며 사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세상일에서는 어렵고 힘든 일이라고 하는 일들도 이익에 관련된 것이라면,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말할 것이 사람의 기본자세일 텐데, 신앙에 관련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에 우리가 쉽게, 아주 소홀하게 생각하는지 그것이야 말로 신비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올리브산 언덕 너머 동쪽, 벳파게 지역에서부터, 어린나귀를 준비하고, 길에 옷자락과 나뭇가지를 깔면서 메시아라고 외치면서 예수님을 가리켜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요, 다윗의 자손이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치는 영광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라고 받아들였던 사람들이 며칠도 지나지 않아, 아주 돌변한 마음을 가졌던 그 싹이 우리들에게는 없는지 잘 돌아봐야 할 일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했던 성지주일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성실하게 살면서 같은 마음자세를 갖추고 드러낼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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