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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32: 8세기 (1) 로마 교회와의 일치 앞장선 잉글랜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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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7-10 ㅣ No.973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32) 8세기 ① 로마 교회와의 일치 앞장선 잉글랜드 교회


복음화된 앵글로색슨족, 보편 교회 수호자로 나서다

 

 

앵글로색슨족 역사가 존자 베다.

 

 

서방 교회는 3세기 초부터 아일랜드 켈트족 복음화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켈트족 종교 심성과 앵글로색슨족과의 적대감 때문에, 켈트족 그리스도교는 로마 교회와 일치하지 못하고 고립을 자초했습니다. 반면에, 서방 교회가 7세기 초에 앵글로색슨족 복음화를 위한 노력들은 8세기에 들어서서 잉글랜드 본토뿐 아니라, 유럽 대륙 게르만족 복음화에도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앵글로색슨족 그리스도인 영성 발전에 기여한 존자 베다

 

앵글로색슨족 역사가였던 존자(尊子) 베다(Beda Venerabilis, 672/73~735)는 잉글랜드 교회가 서방 교회 전통과 일치하며 영성 생활을 실천할 수 있도록 기여했습니다. 잉글랜드 중부 타인(Tyne) 강 남쪽에 위치한 노섬브리아(Northumbria) 왕국 출신인 베다는 이미 7세에 웨어머스(Wearmouth)에 있는 성 베드로 수도원에 들어가 교육을 받았으며, 13세쯤에는 재로우(Jarrow)에 있는 성 바오로 수도원으로 옮겨 19세에 부제품을, 30세엔 사제품을 받고 베네딕도회 수도자로 평생을 살다가 그곳에서 사망했습니다.

 

베다는 731년 저술한 「영국 교회사(Historia Ecclesiastica gentis Anglorum)」를 통해 훗날 ‘영국 역사의 아버지’로 불렸으며, 1899년에 교황 레오 13세(Leo PP, XIII, 1810~1903)에 의해 영국인으로서 유일하게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습니다. 베다는 다른 시기에 부활절을 지내는 켈트족 그리스도인을 거슬러 서방 교회 전통에서 부활절 날짜를 계산하는 방식을 다룬 저서 「시대에 대하여(De Temporibus)」와 「시대의 계산에 대하여(De Temporum Ratione)」를 출간했습니다. 베다는 문학가로서 시집, 서한집, 강론집, 순교록, 전기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남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다는 세속 학문 분야도 섭렵했는데, 문법, 작시법, 역사 기록학 및 연대기 등과 관련된 작품들도 남겼습니다.

 

비록 베다는 고대 영어 지역에서 평생을 살았지만, 그는 라틴어를 익혀 라틴어 성경을 비롯해 서방 교회 전통과 사상을 섭렵했습니다. 먼저 베다는 성경을 주석하면서 문학적인 의미보다는 영성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베다가 살던 시기는 이미 성경 문학이 형성되던 시대와 큰 차이가 있었으므로, 베다는 동시대 그리스도인에게 죄에 대한 경계심과 합리적인 생활양식을 제공하기 위해서 영성적인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베다는 방대한 성경 주석 작품을 남겼습니다.

 

또한 베다는 그리스도인에게 더 많은 영성적인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서방 4대 교부들을 비롯하여 여러 교부들의 가르침을 인용했습니다. 특히 베다는 말년에 요한 복음서를 고대 영어로 번역함으로써, 라틴어를 모르는 평신도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말씀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베네딕도회 수도자였던 베다는 기도하고 일하며 거룩한 독서를 실천하면서 잉글랜드 교회에 큰 귀감이 됨으로써, 사후에 바로 사람들에게 ‘존자’(尊者)로 불렸습니다.

 

보니파키우스는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지 않은 게르만 지역 복음화에 힘쓰다 이교도의 습격으로 끝내 순교했다. 그림은 보니파키우스의 선교 활동을 담은 성화.

 

 

게르만족 복음화에 앞장선 보니파키우스

 

한편 앵글로색슨족이면서 ‘게르만족의 사도’로 불린, 잉글랜드 남서부에 위치한 웨식스(Wessex) 왕국 귀족 가문 출신 보니파키우스(Bonifacius, 672/75~754)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에 엑세터(Exeter)에 있는 베네딕도회 수도원에서, 그리고 너슬링(Nursling)에 있는 베네딕도회 수도원으로 옮겨 교육을 받았습니다. 교육받는 동안 보니파키우스는 학문과 로마 교회와 선교 활동에 강한 애정을 보였습니다. 결국 보니파키우스는 그곳 수도원에 입회했으며, 30세에 사제품을 받고 수도원 학교 교장이 되었습니다.

 

선교사의 꿈을 키웠던 보니파키우스는 716년 수도원장의 허락을 얻어 오늘날 네덜란드 지역인 북유럽 프리즐란트(Friesland)로 선교를 떠났으나, 그 지역 귀족의 방해로 선교는 실패했습니다. 다시 너슬링의 수도원으로 돌아온 보니파키우스는 717년 수도원장으로 선출되자 이를 수락하지 않고, 718년 로마로 떠났습니다. 결국 719년 보니파키우스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Gregorius PP. II, 재임 715~731)를 알현했고, 교황으로부터 라인 강 동쪽 게르마니아 지역에 사는 게르만족을 복음화시키라는 선교 사명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보니파키우스는 먼저 게르마니아 중부 튀링겐(Thringen)을 경유해 또 다시 프리즐란트로 가서 3년간 선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보니파키우스는 722년 거의 복음화 되지 않은 게르마니아 중서부 헤센(Hessen)으로 이주해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건설하고 선교한 결과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는 보니파키우스에게 주교품을 주었습니다. 725년까지 헤센에서 선교했던 보니파키우스는 다시 튀링겐으로 이주해 수도원을 설립하고 잉글랜드 수도자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10여 년간 그리스도교 정통 신앙과 교리를 전했습니다. 신임 교황 그레고리우스 3세(Gregorius PP. III, 재임 731~741)는 732년 보니파키우스를 대주교로 임명했으며, 737년 교황 특사로 임명해 게르마니아 교회 설립을 위임했습니다. 따라서 보니파키우스는 741년까지 게르마니아 남부 바이에른(Bayern)에 몇몇 교구들과 수도원을 설립했으며, 744년 헤센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선교 중심지로 삼았습니다.

 

 

프랑크족 그리스도인 개혁에 앞장선 보니파키우스

 

보니파키우스는 742년 프랑크 왕국 북동부 지역 아우스트라시아(Austrasia) 궁재(宮宰)였던 카를로만(Carloman, 707쯤~754)과 함께 ‘게르만 민족 종교 회의’를 개최했으며, 744년 프랑크 왕국 북서부 지역 네우스트리아(Neustria) 궁재였던 페피누스 3세(Pepinus III, 714~768)의 도움으로 개최된 ‘전체 왕국을 위한 종교 회의’에 참석했다가 마인츠(Mainz) 교구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745년 보니파키우스는 쾰른(Kln)에 대주교좌를 설립할 계획을 세우고 종교 회의와 교황의 승인까지 받았으나, 그의 개혁적인 성향을 싫어했던 프랑크 왕국 주교들의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따라서 보니파키우스는 747년 개최된 종교 회의에서 신앙 고백과 충성 고백을 통해 프랑크 왕국의 주교들을 로마 교황과 묶어 주려고 시도했습니다.

 

752년 마인츠 교구장직을 사임한 보니파키우스는 다시 프리즐란트 선교 계획을 세웠고, 1년간 성공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754년 프리즐란트 지역 이교도들은 보니파키우스와 동료 선교사들을 습격하고 살해했습니다. 결국 프리즐란트에서 시작되었던 보니파키우스의 선교는 프리즐란트에서 끝났습니다.

 

프랑크 왕국이 유럽을 통일하고 로마 교회와 우호 관계를 직접 맺기 전까지 게르만족의 복음화와 프랑크족 그리스도인의 개혁은 역설적으로 잉글랜드 출신 앵글로색슨족이 담당했습니다. 그들은 북유럽 교회와 로마 교회를 일치시키려고 노력했으며, 여러 지역에 수도원을 설립하여 영성 생활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7월 9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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