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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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하느님의 종 125위의 삶과 신앙 II: 전주의 기해박해(1839년)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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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11-09 ㅣ No.1178

[한국교회사연구소 2013년 하반기 공개대학 지상중계] '하느님의 종 125위의 삶과 신앙 II'


(5) 전주의 기해박해(1839년) 순교자 I



1801년 신유박해 후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잠잠했다. 물론 지방관의 과잉 색출이나 밀고 등에 의한 크고 작은 박해는 계속됐다. 그럼에도 신자들은 교회 재건과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며 새로이 공동체를 이루고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이 와중에 1827년 2월 전라도 곡성의 한 교우촌에서 사소한 다툼이 일어나 곡성현감에게 천주교 신자를 밀고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이 확대되면서 곡성에서 시작된 박해가 장성과 순창, 임실, 용담, 금산, 고산, 전주로 번져 정해박해가 발발한다. 그해 4월 전주 진영은 몇몇 신자들에 대한 밀고를 받고 포졸을 경상도와 서울로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정해년 2월에서 5월 사이에 전라와 경상, 서울, 충청 등지에서 무려 500여 명에 이르는 신자들이 체포됐다.

박해가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확대된 것은 전주 출신 신태보가 상주의 잣골(현 경북 상주시 함창읍 신흥리) 교우촌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잣골교우촌뿐 아니라 상주 멍에목(현 경북 문경군 동로면 명전리)과 앵무당(현 경북 상주시 화북면 평온리), 순흥 곰직이(현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 등지에서도 여러 신자들이 체포됐다. 당시 전라감사 이광문은 체포된 신자들을 귀양 보내거나 사형선고를 해놓고도 무한정 옥에 가둬두기만 했다. 정해박해로 전라도 교회는 거의 궤멸 상태에 빠졌다.

이처럼 정해박해 때 체포된 신자들 가운데 전주에서 기해년(1839년)에 순교한 신자는 5명이나 된다. 1827년에 체포됐으니 무려 13년 가까운 세월을 옥에 갇혀 있다가 순교한 셈이다. 이런 가운데서도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한 신자들의 노력이 이어지고 교황청의 관심 및 후원으로 1831년 9월 9일 조선대목구가 설정되기에 이른다.

정해박해 때 체포돼 기해박해 때 순교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신태보(베드로, ?~1839)다. 경기도 용인 근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이천 고을에 있는 동산 밑(현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동산리)에서 살았다. 1790년대 초 천주교를 접한 듯하지만 신심이 그리 깊지는 않았다. 사촌 이여진(요한, ?~1833)과 함께 주문모 신부를 만나기 위해 서울을 왕래하며 노력했지만 만나지는 못했다. 그저 마음속으로만 신앙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그가 용인의 가족들을 이끌고 강원도 산골로 이주해 교우촌을 이루면서 신심서적을 100권이나 필사하며 교회 재건에 나선다. 재건의 최종 도달점은 성직자 영입이었다. 1811년 이여진이 베이징 밀사를 자원하자 신태보와 권기인, 홍우송, 조동섬, 한 토마스 등은 교황 비오 7세와 베이징 주교에게 보내는 2통의 서한을 작성했고 이여진이 동지사 일행과 함께 베이징 입성에 성공한다. 이것이 이른바 그 유명한 '신미년 서한'이다. 이 서한은 1812년 베이징 교회에 접수됐고, 이여진은 1812년 말 재차 베이징에 들어가지만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원조가 단절되는 등 베이징 교회의 자체 사정으로 뜻을 이루지는 못한다.

성직자 영입이 뜻대로 이뤄지지 않자 신태보는 여러 도를 두루 다니며 전교에 열중했다. 그러다 정해박해가 발발하면서 체포돼 전주로 이송돼 혹독한 심문과 고문을 당했다. '살이 헤져 뼈가 드러나고 앉지도 못하고 밥을 먹을 수도 없는' 고통 중에서도 동료 신자들을 밀고하지 않았다. 그렇게 12년을 더 산 그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 그해 5월 29일 전주장터에 끌려가 순교의 화관을 썼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그의 나이 70세 가량이었다.

충청도 청양 수단이(현 충남 청양군 사양면 신왕리) 마을의 평민 집안 출신인 김대권(베드로, ?~1839)은 1816년 순교한 김화춘(야고보)과 함께 아버지에게서 교리를 배워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공주 옹기점에서 일하다가 고산으로 이주해 교우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중 동생의 순교소식을 듣고 순교 원의를 드러낸다. 그리고서 정해박해 때 체포돼 역시 12년간 옥중생활을 하다 1839년 전주장터에서 신태보 등과 함께 참수형을 받았다. 순교 당시 그의 나이는 알 수 없다.

충청도 홍주(현 홍성) 대벌마을 양인 집안 출신의 이일언(욥, 1767~1839), 역시 홍주 양인 집안 출신의 이태권(베드로, 1782~1839), 충청도 덕산 고을 출신으로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5촌 당숙 손에서 성장한 정태봉(바오로, 1796~1839)도 정해박해 때 체포돼 12년간 수감돼 있다가 1839년 5월 29일 신태보 등과 함께 각각 72세, 57세, 43세를 일기로 전주장터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평화신문, 2013년 11월 10일, 백병근(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정리=오세택 기자]

 

 

[한국교회사연구소 2013년 하반기 공개대학 지상중계] '하느님의 종 125위의 삶과 신앙 II'


(6) 전주의 기해박해(1839년) 순교자 II



4대가 순교한 집안도 있다. 홍낙민(루카, 1751~1801)을 시작으로 홍재영(프로타시오, 1780~1840), 홍봉주(토마스, 1814~66)와 심소사(바르바라, 1813~39) 부부, 홍봉주의 아들까지 4대가 순교하는 기막힌 일도 벌어졌다.

이 가운데 기해박해 당시 전주에서 순교한 이는 충청도 예산의 유명한 양반 집안 출신인 홍재영이다. 홍낙민의 셋째 아들로 충주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성장한 그는 부모 입교 당시에 함께 입교했다. 성장한 뒤 동료들과 함께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교리를 연구하고 교회활동에 참여했던 그는 신유박해(1801년) 때 체포됐으나 배교 뒤 광주로 유배됐다. 하지만 유배지에서 몇 년간 냉담한 뒤 다시 신앙을 되찾고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다고 전해진다.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과 「조선 순교사 비망기」는 그의 신앙생활을 이렇게 전한다.

"그는 모든 기도를 정확히 바쳤으며, 묵상에 전념하면서 하루 24시간 중에 잠과 휴식에는 겨우 몇십 분만을 할애했다. 그는 기도를 할 때면 항상 십자고상 앞에서 겸손하게 무릎을 꿇은 자세로 했으며, 게으르거나 무기력한 태도를 결코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무릎에 커다란 종기가 생겼다. 그는 일주일에 세 차례 금식했고, 항상 통회로 감정이 고조되곤 했다. 자선사업에 전념하기를 갈망하던 그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알게 되면 무언가를 몰래 가져다 줬고 그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직접 가기도 했는데, 여러 차례 현장에서 들켜 선행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기해박해(1839년)가 일어나면서 그는 피신하는 교우들에게 은신처를 알선 제공하다가 체포돼 전주로 끌려갔으며,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다가 1840년 1월 4일 전주형장에서 참수됐다. 그의 나의 60세였다.

홍재영의 며느리인 인천 양반 집안 출신의 심소사는 이에 앞서 1839년 11월 11일 전주 옥중에서 병사했다. 신앙심이 누구보다 높았던 그는 남편 홍봉주와 함께 시아버지를 모시고 살다가 두세 살 된 어린 아들 홍 베드로와 함께 체포돼 옥에 갇혔으나 위협적인 심문과 심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순교의 화관을 썼다. 아들 홍 베드로 역시 같은 날 사망했다. 남편 홍봉주는 1866년에 순교했다.

김소사(아나스타시아, 1789~1839)ㆍ이봉금(아나스타시아, ?~1839) 모녀도 차례로 순교했다. 충청도 덕산의 양인 집안 출신인 김소사는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해오다가 19세에 이성삼(바오로)과 혼인한 뒤 이웃에게 신앙을 권면하는 데 노력하던 중 정해박해(1827년)가 일어나자 전라도 장성으로 이주했다.

장성으로 이사한 뒤 딸 이봉금을 낳고 선교사를 집에 모시는 행운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 때 홍재영의 집으로 피신했다가 체포돼 전주로 이송됐고, 1839년 10월께 옥중에서 순교했다. 10세에 교리문답 전부와 아침, 저녁 기도문을 모두 배우고 첫 영성체를 했던 이봉금은 어머니와 함께 체포돼 전주로 끌려가 옥중에서 교살됐다.

1801년 여주에서 순교한 최창주(마르첼리노, 1749~1801)의 딸 최소사(바르바라, 1790?~1840)는 18세 때 신태보(베드로)의 아들과 혼인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을 잃고 시아버지 곁에 머물렀다. 1827년 신태보와 같이 체포됐으나 배교 없이 석방됐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홍재영의 집에 은신해 있다가 체포돼 1840년 1월 4일 참수됐다.

금산 고을 천주교 집안 출신인 이소사(막달레나, 1808~1840)는 15세 때 김성서(프란치스코)의 아우와 혼인했으나 20세가 채 못돼 과부가 돼 시부모를 봉양하며 살았다. 역시 홍재영의 집에 피신해 있다가 체포돼 1840년 1월 4일 전주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옥중에서 이소사가 교우들을 권면하던 일화가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을 통해 오늘에도 전해진다.

"무엇보다 천주님과 더불어 솔직하게 행동합시다. 그분께 충실해 모두 함께 천국에 올라갑시다. 하나도 빠지는 사람이 없도록 합시다."

끝으로 충청도 은진고을 양반 집안 출신인 오종례(야고보, 1821~1840)는 어려서부터 교리를 실천하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혼인 뒤 전라도 고산에서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진산에 살던 맏형을 보러갔다가 1839년 7월 형과 함께 체포돼 전주로 끌려갔다. 19세 어린 나이에도 갖가지 형벌을 이겨냈으나 형이 배교하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마침내 1840년 1월 4일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을 받았다. [평화신문, 2013년 11월 17일, 백병근(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정리=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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