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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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대전교구 하부내포 서짓골성지 봉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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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11-09 ㅣ No.1177

대전교구 하부내포 '서짓골성지' 봉헌


병인박해 순교자 다블뤼 주교 등 4위 묻혔던 곳



유흥식 주교와 서봉세 신부, 이시우 보령시장 등이 서짓골 순교자현양비를 제막하고 있다.
 

한때는 교회사의 한 쪽을 뜨겁게 장식했지만 지금은 잊힌 하부내포성지가 점차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대전교구 하부내포성지(전담 윤종관 신부)는 10월 31일 충남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 67-2에서 교구장 유흥식 주교 주례로 '서짓골'성지 봉헌식을 거행했다. 봉헌식에는 유 주교를 비롯해 사제단 20여 명, 파리외방전교회원 서봉세 신부, 수도자, 평신도 등 800여 명이 함께했다. 서짓골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당시 보령 오천 갈매못에서 순교한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와 베드로 오매트르ㆍ루카 위앵 신부, 장주기(요셉) 회장 등 4위가 16년간 묻혀 있던 곳이다.

서짓골성지는 지난 5월 미산면 평라리 일대 886㎡(268평) 크기 시유지에 6개월간의 공사를 거쳐 부지를 정비하고 화장실과 파고라(정자), 주차장 등 기반을 조성한 후 야외 제대와 순교자 현양비, 성지 안내 비석, 성역 표지 시설공사를 마치고 이번에 봉헌식을 갖게 됐다.

무게가 50t이나 되는 제대석은 오석을 3.6×1.7×1.35m 크기로 잘라 만들었으며, 전면에 서짓골에 묻혔던 네 성인의 유해를 새겨 성인 무덤 모양으로 형상화했다. 8m(좌대 1.5m 포함) 높이 순교자 현양비에는 '한빛이어라, 임께 다다른 숨'이라는 뜻의 '광영위주치명(光榮爲主致命)' 한자 구절을 새겼다.

보령시 측에서 만든 파고라는 다블뤼 주교의 한국식 이름인 '안돈이(安敦伊)'에서 따와 '안돈정'으로, 제대석 주위는 '돈이정원'으로 각각 명명했다. 안돈정은 순례자들을 편안하게 맞는 정자, 돈이정원은 후덕함이 넘치는 정원이라는 뜻이 담겼다.

이로써 서짓골성지는 2011년 9월 충남 부여군 내산면 옛 교우촌 도앙골 기도의 집인 '우애의 집' 축복과 지난해 11월 천방산 줄기 옛 교우촌 산막골 작은재 줄무덤 터 현양에 이어 하부내포성지에서 세 번째로 봉헌된 성지가 됐다.

하부내포성지는 오늘의 충남 서남부, 곧 보령시와 부여ㆍ서천군, 논산시 일부를 포괄하는 금강 북쪽의 산줄기인 금북정맥 하부 산간지역으로, 곳곳에 교회사의 보화 같은 사적지와 성지가 숨겨져 있다. 솔뫼ㆍ합덕ㆍ해미ㆍ홍성ㆍ여사울 등 상부내포에 비해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하부내포 지역은 지난해 1월 교구에서 이 지역을 성지로 선포하고 윤종관 신부를 전담으로 임명하면서 새롭게 교회적 조명을 받았다.

서짓골은 이화만(바오로)과 아들 3부자, 인근 교우촌인 도앙골 교우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1866년 3월 30일 갈매못에서 순교한 성인 4위의 유해를 15일 가량에 걸쳐 삯배로 싣고 와 안장한 곳이다. 이씨 4부자는 안장 이후 병인년 그 해에 체포돼 한양에서 순교했지만 이들의 시신은 어디에 버려졌는지 알 수 없다. 16년 동안 서짓골에 묻혀 있던 성인 4위 유해는 1882년 명동성당 지하묘역으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절두산 순교성지 지하 성당에 안장돼 있다.

하부내포 성지로는 황석두 루카 성인 안장지였던 삽티(부여군 홍산면), 순교자 프티니콜라 신부 최초 사목지이자 황석두 성인 거주지였던 내대(부여군 외산면), 프티니콜라 신부 피란지였던 고갈(부여군 외산면) 등이 있다. [평화신문, 2013년 11월 10일, 오세택 기자]

 

 

대전교구 하부내포성지, 서짓골성지 축복


150년만에 명실공히 ‘성지’로 재탄생



대전교구장 유흥식 주교를 비롯한 관계자들이 순교성인 현양비 제막식을 거행하고 있다.


대전교구 하부내포성지(전담 윤종관 신부)는 10월 31일 오전 10시30분 충남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 437 현지에서 교구장 유흥식 주교 주례로 순교자 현양 미사를 봉헌하고 서짓골성지 축성봉헌식을 거행했다. 봉헌식에는 교구 사제 20여 명과 교구 신자를 비롯해 서울대교구 한국순교자현양회 회원 등 1300여 명이 참석 성황을 이뤘다.

이로써 병인박해 중 갈매못성지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 오매트르 신부, 위앵 신부, 장주기(요셉) 등 4명의 성인이 1866년부터 1882년까지 15년 6개월 동안 안장돼 성인들의 피와 살, 잔뼈가 진토된 서짓골은 150년 가까이 간과돼 온 성지로서의 중요성을 부여받게 됐다. 또한 보령시(시장 이시우)는 보령호의 빼어난 경관에 인접한 서짓골성지에 진입로와 주차장, 화장실 등의 편의시설을 설치해 신자들뿐만 아니라 시민들에게도 순례 명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유흥식 주교는 미사 강론에서 “서짓골을 포함해 하부내포성지에 너무 늦게 관심을 갖게 됐지만 새로운 인식에 따라 이곳을 성역화해 후손들에게 물려주게 돼 기쁘다”며 “윤종관 신부님께서 만수리공소에 거주하면서 도와줄 사람이 별로 없는 황무지 같은 상황임에도 우리의 장한 선조들의 믿음과 삶을 이어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계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서짓골성지는 부여 금사리본당 제3대 주임 정규량 신부(1883~1952)가 1925년 그 위치를 확인하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후 교회사에서 잊혀진 땅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윤종관 신부와 양업교회사연구소 소장 차기진(루카) 박사 등의 위치 고증과 학술적 연구 성과가 축적되면서 본격적인 성역화에 착수했다.

이날 성지 축성봉헌식에서는 순교자 이름이 새겨진 야외 제대와 ‘광영위주치명’(光榮爲主致命)이 한문으로 적힌 순교성인 현양비 제막식이 이어졌다. [가톨릭신문, 2013년 11월 10일, 박지순 기자]

 

 

[인터뷰] 하부내포성지 윤종관 신부


“선조들 믿음 배울 성지의 중요성 인식을”



윤종관 신부가 서짓골성지 안내비를 가리키며 성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대전교구 하부내포성지는 성 다블뤼 주교의 주 사목지이자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가장 많은 교우촌이 형성됐던 지역임에도 오랜 세월 동안 역사 속에 묻혀 있었다. 지난 2007년부터 부여 만수리공소에 윤종관 신부가 상주하면서 하부내포성지는 세상에 그 존재가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윤종관 신부는 수년간의 외로운 노력 끝에 10월 31일 서짓골성지 축성봉헌식을 마친 후 “다블뤼 주교와 오매트르 신부, 위앵 신부, 장주기(요셉) 등 4명의 성인이 1866~1882년까지 약 16년간 묻혀 있던 곳이면서도 사람의 발길조차 닿지 않았던 서짓골이 늦게나마 성지의 모습을 갖추게 돼 다행이지만 앞으로 풀어야 할 더 큰 과제가 남아 있다”고 소회를 밝혔다.

윤 신부는 “무엇보다 서짓골성지를 찾는 순례자들이 쉬고 기도할 수 있는 시설이 들어설 부지확보가 시급하다”고 밝혔다. 보령시의 협조로 주차공간과 화장실 등 최소한의 편의시설은 갖췄지만 성지 자체적인 재정이 턱없이 부족해 서짓골성지 인근에 약 960㎡(288평) 넓이의 부지만 빚을 얻어 매입한 상태다. 윤 신부는 “성지 조성에 5억 원 가까운 빚을 져 매월 이자 내기도 버거운 상황으로 뜻 있는 신자들의 후원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서짓골성지 조성 중 한국교회에 성지가 너무 많다는 교회 일각의 지적을 들었다는 윤 신부는 “불교와 비교하면 한국 천주교 신자들이 찾아갈 성지는 매우 부족한 것이 현실로 후손들이 신앙 선조들의 믿음을 보고 배울 성지는 많으면 많을수록 바람직하다”며 “일부 성직자들조차 성지에 대한 인식이 잘못돼 있다”고 비판했다. 특히 서짓골성지의 경우 목숨을 걸고 순교자들의 시신을 이장하고 결국에는 순교한 이화만(바오로) 일가도 성지의 또 다른 주역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가톨릭신문, 2013년 11월 10일, 박지순 기자]

 

 

부여 · 보령 일대 순교자 묘 관리 시급


지역 내 무명 순교자 묘 산재 … 성역화 서둘러야



대전교구 하부내포성지(전담 윤종관 신부)를 구성하는 부여, 보령, 서천, 청양 일대 순교자들의 역사를 품고 있는 묘지의 정확한 실태 파악과 적절한 관리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하부내포성지는 박해 때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순교자가 나온 곳으로 순교자 또는 순교자 가족 묘지가 산재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교회와 신자들의 관심 밖에 밀려나 있다.

대표적으로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 다블뤼 주교와 위앵·오매트르 신부, 장주기(요셉) 등 4명의 성인 시신을 이장하는 데 앞장섰다 1866년 병인박해 중 치명한 이화만(바오로)과 그의 아들들인 범인(끼수), 범식(그레고리오)의 가족묘를 예로 들 수 있다.

이들 삼부자는 서울로 압송돼 병인년 12월 12일 ‘무참히 맞아 죽어 시신이 버려졌다’는 간단한 기록과 구전만 전해질 뿐 시신의 소재를 찾지 못했다. 이화만의 증손인 이우철(시몬) 신부(1915~1984)는 이화만의 부인인 정 마리아의 묘(부여군 충화면 천당리 소재) 묘비를 직접 써 이화만 삼부자의 순교 내력과 시신을 발견하지 못한 경위를 기록했다.

이화만의 고손으로 부여 구룡면장을 지낸 이규성(바르나바·77·부여 금사리본당)씨는 “박해를 피해 후손들이 뿔뿔이 흩어져 순교자 묘지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며 “후손들이 순교자 묘지 관리에 1차적인 책임이 있겠지만 교구와 신자들도 묘지 성역화에 나서주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보령시 미산면 도화담리 죽산박씨 문중 묘에 모셔진 병인박해 순교자 ‘송 누시아’의 묘는 문중의 관리는 충실하게 이뤄지고 있는 경우다. 송 누시아의 증손인 박주현(시몬·86·보령 동대동본당)씨는 “제 조카뻘인 박한성(로렌조)이 1986년 2월 전주교구 박창신 신부 소장품에서 「치명일기」를 발견해 누시아 할머니의 정확한 순교사실을 확인, 묘지를 조성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박 씨는 “누시아 할머니의 순교자 묘지에 대해 집안에서만 알고 있을 뿐 교회에서는 관심을 보인 적이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윤종관 신부는 “무명 순교자 묘지의 위치와 실태 파악에는 어느 정도 시일이 필요하고 유명 성지만을 선호하는 신자들의 인식 개선이 급선무”라고 진단했다. [가톨릭신문, 2013년 11월 24일, 박지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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