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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이정식과 양재현, 권상문과 손경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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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12-19 ㅣ No.886

[한국 교회 124위 순교자전] 이정식과 양재현, 권상문과 손경윤

 

 

지난 2007년부터 시작하여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시복시성을 진행하고 있는 124위 순교자들을 모두 만나게 됩니다.

 

무과에 급제하였던 이정식 요한(1795-1868년)은 59세 때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회장으로서 교회 일에 충실하였고 외교인들에게 전교를 많이 하였습니다. 작은 방에 십자고상과 상본을 모시고 묵상 기도와 영적 독서를 부지런히 하였습니다.

 

다블뤼 주교는 1862년 서한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동래 지역을 둘러보는 일만 남았는데 … 도시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이 교우촌은 생긴 지 2년 반밖에 안 되고, 한 노인(이정식 요한)의 열심한 믿음 덕분에 생겨난 곳인데, 매우 희망적입니다. … 예비신자들도 상당히 많고 열의에 차있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때는 기장에서 3년을 살다가 울산으로 이주하였고, 1868년 동래 포졸에게 잡혀 47일을 갇혀있다가 9월 27일(음력 8월 9일) 동래 수영 장대(부산시 수영구 광안4동)에서 7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습니다. 이때 아들 이월주 프란치스코와 조카 이관복 베드로, 양재현 마르티노와 차장득 프란치스코, 이 야고보, 옥 바르바라도 함께 순교하였습니다. 그의 둘째 아들 타대오는 1868년 충주에서 순교하였습니다.

 

동래 북문 밖 신내동리(부산시 동래구 금사동의 사천, 실내동)에 살던 이정식의 대자 양재현 마르티노(1827-1868년)는 1868년 2월 16일 체포되었습니다. 태장 10도를 맞으면서도 “아무래도 배교는 못하겠소.”라고 하였습니다. 이송된 통영에서 청동화로 불에 달구어진 인두로 수족을 지지는 형벌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다시 동래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여기서 대부 이정식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대부가 여기 계시오니까 반갑고 반갑도다. 천주의 은혜가 무궁함이라.” 그의 말에 대부 이정식도 대답하였습니다. “마르티노를 만나게 되었으니 이렇게 된 일은 천주의 은혜올시다. 서로 붙들고 즐거우면 우리가 잃은 영화를 다시 만나 보겠소. 천주께 열심히 기구나 드리십시다. 그럭저럭 영복고저(永福高邸)에 들어갑시다.” 처형장에서 그는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면서 “가세, 가세, 천당으로 가세. 주 성모를 따라가세.”라고 하였습니다. 41세의 나이로 칼을 받았습니다.

 

부산교구 평협은 부산교회사연구소와 함께 2008년 8월부터 마지막 주 토요일마다 도보성지순례를 하고 있습니다. 장대골 순교신앙 사적지를 출발해서 온천천을 거쳐 오륜대에 이르는 14,7km입니다. 수영 장대 순교자 8위는 1977년 9월 동래구 명장동에서 오륜대로 이장하였습니다. 지난 8월 부산교구장 황철수 주교는 도보순례 2주년 미사 강론에서 “시복시성은 순교자들을 신앙의 모범으로 따른다는 것을 선언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분들을 통해서 우리 신앙을 성찰하는 것입니다.”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권상문 세바스티아노(1769-1801년)는 경기도 양근에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권철신 암브로시오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1791년에 남대문 안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1795년에 고향으로 돌아가 살았습니다.

 

1800년 6월 일어난 박해로 동료들과 함께 체포된 그는 감옥에 갇혔고 혹독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한창일 때 한양으로 압송되어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며 배교하였으나, 이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배교를 번복하였습니다(다블뤼 주교의 “조선순교사 비망기”).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양근 한감개(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33세였습니다.

 

손경윤 제르바시오(1760-1802년)는 한양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안국동에서 약방을 운영하면서 살았습니다. 1790년에 최필공에게 교리를 배웠고, 회장으로서 성실하게 신자들을 가르치고 격려하였습니다. 큰 술집을 사서 비신자들에게 술을 팔았는데, 사랑채의 소란스러움으로 가리면서 안채에서는 많은 신자들을 모아 가르쳤습니다.

 

1801년 박해 때 서울과 지방으로 피신한 그는 형제와 처자식들이 체포되자 3개월 뒤에 자수하였습니다. 심문을 받으면서 마음이 약해졌으나, 형조로 이송되어서는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굳은 신앙으로 모든 시련을 극복하였습니다.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 서소문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권상문과 손경윤은 박해 상황에서 천주교를 증오하는 권력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죽음을 당하게 될 때 적극적으로 하느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순교하겠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고 신앙 안에서 죽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곧 시복될 124위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과 영성을 통하여 내 자신과 공동체의 신앙을 성찰하고 좀 더 나은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경향잡지, 2010년 12월호,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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