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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이도기, 김계완과 현계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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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12-10 ㅣ No.880

한국 교회 124위 순교자전 - 이도기, 김계완과 현계흠

 

 

이도기 바오로(1743-1798년)의 순교 행적이 담긴 “정산일기”에 따르면, 그는 충청도 청양에서 태어나 입교한 뒤 정산 옹기촌으로 이주하여 살았습니다. 1797년(정사박해) 6월 체포되었을 때 그는 “하느님을 위해서 죽는 것은 영혼의 영광이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포졸들은 온갖 욕설을 퍼부었고 침을 뱉고 따귀를 때렸으며 쓰고 있는 칼 위에 올라타 더욱 고통스럽게 하였습니다. 다달이 장터에서 얼굴에 회칠을 하고 글을 적은 판자를 목에 걸고 궤짝 하나를 등짐으로 진 채 조리 돌림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곤장을 맞고 몽둥이로 양 옆구리를 찌르는 형벌을 당하면서도, “저는 만 번을 죽을지언정 배교를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함께 있던 신자가 “참으로 어떻게 고문을 감당한단 말인가, 어찌하면 좋겠는가?”라고 하자, 그는 “나도 너무 고통스럽다네. 나는 자네보다 더 늙었으니 형벌을 감당하기가 더 힘들다네. 그러나 천당이 어디 헐값으로 얻어지는 것인가? 잠시 고통을 감내하면 그것으로 영복(永福)을 살 수 있다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추운 겨울을 지내면서 상처와 무릎 아래 부분의 고통이 극심하여 견디어 내는데 무척 힘들었습니다. 성탄절에도 매질을 당해 상처 부위와 무릎 아래가 온통 불덩이처럼 끓자, “주님께서 내 마음이 식을까 염려하시어 각별한 은총으로 매질하여 나를 다시 뜨겁게 해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이듬해에 관장이 벼슬을 주겠다고 회유하자 “정산 고을을 다 주신다 해도 저는 하느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처형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크게 기뻐하였고, 얼굴은 환하게 빛났습니다. 이도기는 청양군 정산면 역촌리에 있던 치성장터에서 삼모장으로 매질을 당하면서 대답을 할 수 없게 되자 고갯짓으로 배교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르며 “아베 마리아!”를 외치고는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다시 감옥에 갇힌 그는 7월 24일(음력 6월 12일) 매질을 당하여 숨을 거두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서울 서소문 밖 양대전동에 살던 김계완 시몬(?-1802년)은 1791년 최필공에게 교리를 배웠고 최창현에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최창현, 정약종, 황사영, 이현, 이합규 등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고, 정약종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를 두 차례 만나 가르침을 받았으며, 남다른 열성을 보여 칭송을 받았습니다.

 

1800년 12월 최필공이 체포되자, 김연이의 집에 숨어 지냈습니다. 그녀의 집에서 때마침 피신 온 황사영과 사나흘 같이 지내다가 서로 헤어져 이곳저곳으로 피신해 다녔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가족의 소식을 알아보려고 여기저기로 다니다가 체포되었습니다. 문초와 형벌이 시작되었지만 김 시몬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드러냈습니다.

 

관장이 하루는 그를 사흘 동안 가족과 함께 지내다가 오라고 풀어주었습니다. 그의 변함없는 마음을 흔들어놓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사흘 뒤 돌아온 그에게 관장이 “마음을 바꾸었느냐?” 하고 묻자, 그는 “저는 물론 바꾸었습니다. 전보다 더 열심히 수계하겠다고 단단히 결심을 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포도청에서도 “깊이 미혹된 학술은 비록 형벌 아래 죽을지라도 절대로 바꿀 마음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힌 지 4개월 뒤인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한양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현계흠 플로로(1763-1801년)는 일찍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면서 살았습니다. 1794년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 현계흠은 동료 신자들과 함께 열심히 교회 일에 참여하였습니다. 주문모 신부가 피신을 해야 했을 때, 그는 자신의 집을 피신처로 제공하였습니다. 서울 장흥동(현 중구 충무로, 회현동, 남창동에 걸쳐있던 마을)에 살던 그의 집은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하부 조직이자 집회소인 ‘육회’의 하나였습니다.

 

1797년 9월 아우가 살고 있는 경상도 남쪽의 동래지방에 갔을 때 마침 그 지역에 나타난 영국배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배에 올라가 그들에게 십자를 그려 보이고는 “이 배 한 척만으로도 조선의 전함 백 척은 쉽게 부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상경하여 황사영 알렉시오를 만나게 되자 그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피신하였으나 자신 때문에 가족과 친척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숨어있던 곳에서 나와 포도청에 자수하였습니다. 그는 포도청에서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지만 아무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교회에 해가 되는 일은 입 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져 의금부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았으며 38세 때인 1801년 12월 10일(음력 10월 24일)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현석문 가롤로 성인이 그의 아들이며, 현경련 베네딕타 성녀가 그의 딸입니다.

 

묵주기도성월입니다. 생애 마지막에 하늘을 우러르며 “아베 마리아!”를 불렀던 이도기 순교자, 더 열심히 수계하겠다고 고백한 김계완 순교자, 성인들의 부친인 현계흠 순교자의 삶과 신앙을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경향잡지, 2010년 10월호,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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