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성미술ㅣ교회건축

성미술 이야기: 그리스도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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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7-09-28 ㅣ No.50

[성미술 이야기] 그리스도의 부활

 

 

예수 부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1463~65년. 225×220㎝. 팔라초 데이 프리오리, 산 세폴크로.

 

 

돌무덤이나 동굴무덤이 미술에서는 흔히 석관으로 대체된다. 석관을 의미하는 「사르코파구스」는 「육체를 씹어 먹는 자」라는 뜻이다. 죽음의 상징이던 석관은 13세기 이후 제단의 의미로 윤색되면서 미술의 부활 주제에서 자리를 확고하게 굳힌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 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렸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1고린토 15,54~55)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부활을 설명하다 말고 갑자기 말을 돌려서 죽음을 놀림감으로 삼는다. 원래 첫 사람 아담과 둘째 아담 예수를 비교하면서 생명과 불멸의 가치를 설명하던 참이었는데, 애꿎은 죽음이 옆에 서성거리다가 봉변을 당한 것이다. 죽음을 골탕 먹이는 솜씨에서도 알 수 있지만 설득의 기술에서는 세상에서 바오로를 따를 자가 없다. 논리의 순간적인 방향전환도 일품이지만, 좌우연타에 이어 절묘한 어퍼컷을 구사하는 허리의 탄력과 펀치의 속도감은 이종격투기의 원조로 나서도 손색이 없다.

 

죽음이란 놈은 바오로 때문에 무척 속이 상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죽음의 체통이 이처럼 실추된 적이 없었다. 죽음은 무릇 하느님이 내신 모든 아름다운 생명을 거두어 파괴하고 추악하게 망가뜨려서 어둠속에 가두는 권능을 가졌다고 자부하지 않았던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형용무쌍한 아킬레스도 『죽어서 임금노릇 하느니 살아서 날품팔이가 낫겠다』며 도리질을 쳤고, 세상을 호령하던 영웅들치고 죽음의 족쇄를 벗어난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부활은 그리스도 수난의 역사 가운데 맨 마지막 사건이다. 또 구원사의 미스터리 가운데 가장 난해한 부분이다. 앞선 다른 기적들, 가령 물이 포도주로 바뀌거나 소경의 눈이 밝아졌다는 기적 정도로는 갖다대지도 못한다. 사도 바오로는 부활을 못 믿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모두 헛된 것이고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사람」이 되고 만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만큼 알쏭달쏭하기도 하고 세상 이치로 가늠하기 어렵다는 뜻도 된다.

 

그런데 복음서를 읽다보면 의문이 하나 고개를 든다. 기록만 보면 이건 엄연히 시신 증발사건이다. 여자들이 시신에 향유를 발라드리려고 무덤을 찾았는데, 무덤 돌이 치워져 있고 시신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누가 시신을 몰래 훔쳐서 달아났다고 보아야 자연스럽다. 더구나 시신의 분실을 부활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좀 억지스러워 보인다. 그때 제자들이 보였던 반응들도 납득하기 어렵다. 시신이 없어졌다는 말을 전해 듣고 왜 직접 현장을 확인하거나 또 용의자를 추적하고 사후처리에 만전을 기하지 않았을까? 마태오의 복음서에는 베드로가 달려가서 무덤을 살폈다고 하지만, 그 이상의 행동은 취하지 않았던 것 같다.

 

만약 그때 제자들이 초동수사에 충실했더라면 그후 2000년 동안 예수의 시신이 사실은 누군가에 의해 탈취되었다는 둥, 무덤가의 여자들이 집단 착시를 일으켰다는 둥, 예수님이 처형된 뒤 완전히 숨이 끊어지지 않고 빈사상태에 빠졌다가 차가운 동굴 속에서 다시 정신을 차렸을 것이라는 둥 어처구니없는 추측들이 난무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제자들이 시신을 빼돌렸다는 의혹까지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런 논의는 다 신학자들의 몫이고 미술의 역사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만 다루면 그만이다. 그런데 문제는 성서에도 빈 무덤 이야기만 나오지 정작 부활 순간의 기록이 누락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화가들은 부활장면을 지어내서 그리기보다는 「무덤가의 여자들」이나 「림보를 방문한 그리스도」의 주제를 통해서 부활 이야기를 돌려서 설명하기 좋아했다. 눈부신 옷을 입고 무덤 속 석관 위에 걸터앉은 천사와 놀란 표정의 여자들이나, 지옥문을 부수고 악마를 밟고 서서 관속에 누워 있던 아담을 일으켜 세우는 림보의 그리스도는 죽음의 족쇄를 풀고 어둠의 세력에게 승리를 거두는 부활의 주제를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에서는 아예 부활 주제가 다루어지지도 않았다. 이후 카롤링거 시대에 이르러 가옥처럼 생긴 무덤 뒤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태양신처럼 얼굴만 살짝 내밀다가 차츰 윗몸을 보이는데, 10세기에 오면 전신이 드러나고 석관에서 몸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후기 중세에 드디어 화가들의 상상력에 힘입어 공중부양에 성공한 것도 눈여겨볼 만한 도상적 변화이다. 온 몸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오른손은 축복의 표시를 보이거나 십자가나 어린양을 그린 승리의 깃발을 들기도 한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그린 「예수 부활」은 무척 대담한 그림이다. 한쪽 발을 석관 가장자리에 턱 올린 예수님이 당장이라도 걸어 나오실 것 같다. 깃발을 쥔 오른손에도 아귀힘이 잔뜩 들어갔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빛을 뿜어내며 하나도 힘을 안 들이고 공중으로 두둥실 떠오르는 신비주의적 재현과는 거리가 멀다. 육신부활의 사상을 웅변하는 14세기 이후 이탈리아 자연주의 미술의 생명력이 잡힐 듯이 느껴진다.

 

한편, 무덤 지키는 병사들은 파수꾼의 역할을 깜빡하고 석관 주위에서 웅크려서 잠이 들었다. 이들은 예수 부활의 증인이자, 석관 앞에 배치되어서 화면의 공간적 구성을 확장하는 역할을 맡았다. 앞선 시대의 미술작품에서는 병사들이 눈부신 빛에 놀라서 눈을 가리거나 부활을 목격하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자세를 취하게 마련인데,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이런 식의 과장어법을 철저히 절제하고 있다. 화가는 예수님의 몸에서도 광채를 전부 닦아냈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그림에서 석관 앞쪽에 누런 갑옷을 걸친 병사의 얼굴은 화가의 자화상이라고 한다. 그는 몸을 비튼 자세로 잠들어 있다. 화가는 눈을 감고도 부활의 기적을 증언하고 싶었던 것일까? 병사의 눈꺼풀이 가만히 떨리는 것 같다.

 

[가톨릭신문, 2004년 4월 11일, 노성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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