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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36: 9세기 (2) 베네딕도 수도 규칙서 주해와 수도원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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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8-05 ㅣ No.985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 산책] (36) 9세기 ② 베네딕도 수도 규칙서 주해와 수도원 개혁


초심을 찾고자 한 베네딕도회 수도자들

 

 

- 성 베네딕도가 수도자들에게 「수도 규칙서」를 전하는 모습을 담은 성화.

 

 

카롤링거 르네상스 시절 수도원 개혁 운동이 카롤링거 왕조의 지원을 받은 아니아네의 베네딕투스(Benedictus Anianensis, 750쯤~821)에 의해서만 진행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817년 아헨 교회 회의에서 발표된 ‘수도회 참사규칙(Capitulare Monachorum)’이 821년부터 프랑크 교회 주교들 사이에서 아니아네의 베네딕투스 수도 규칙서로 인식되면서, 카롤링거 수도원 개혁 운동은 아니아네의 베네딕투스가 모두 주도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동시대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서를 해설했던 노력들도 수도원 개혁 운동을 확산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수도 규칙」 원본을 접한 부제 파울루스의 주해서

 

베네딕도회 수도자였던 부제 파울루스(Paulus Diaconus, 720/26 쯤~800 이전)는 저서 「랑고바르드족의 역사(Historia Langobardorum)」 때문에 역사가로도 유명했습니다. 필력이 뛰어났던 부제 파울루스는 782년 샤를마뉴에게 발탁돼 아헨 궁정에서 카롤링거 르네상스 학자로 활동했습니다. 마침 수도원 개혁을 계획했던 샤를마뉴는 787년 부제 파울루스를 몬테카시노 수도원 원장으로 임명하면서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서 사본을 요청했습니다.

 

부제 파울루스는 몬테카시노 수도원으로 돌아온 787년 이후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랑고바르드족의 역사」를 비롯해 「대교황 그레고리우스의 생애(Vita sancti Gregorii Magni)」와 교부들의 설교들을 엮은 244개의 「강론집(Homiliarus)」을 저술했습니다.

 

이 시기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서의 중요성을 인식했을 부제 파울루스는 수도 규칙서와 관련된 저술을 시도했으리라 추정됩니다. 사망 직전인 800년쯤 저술된 「베네딕도 수도 규칙 해설(Explanatio in Regulam sancti Benedicti)」은 교회에서 오랫동안 부제 파울루스의 작품으로 여겨졌으나, 오늘날 학자들은 「베네딕도 수도 규칙 서문 해설(Expositio Prologi Regulae sancti Benedicti)」만 부제 파울루스의 작품이라고 추정합니다. 비록 「베네딕도 수도 규칙 해설」이 다른 저자 저술이더라도, 한동안 이 작품은 부제 파울루스의 권위 아래 널리 읽히며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단순하고 엄격한 해설을 담은 스마라그두스의 주해서

 

아일랜드 출신으로 추정되는 성 미카엘 수도원 원장 스마라그두스(Smaragdus, ?~830쯤)도 베네딕도회 수도자였습니다. 스마라그두스는 805년쯤 카스텔리온(Castellion) 수도원 원장으로 선출됐는데, 814년쯤 그를 따르는 수도자들과 함께 인근 지역으로 이주해 성 마카엘 수도원을 설립하고 원장 직분을 수행했습니다.

 

샤를마뉴는 교황 레오 3세(Leo PP. III, 재위 795~816)에게 신경에서 ‘성자에게서도(Filioque)’라는 문구를 첨가한 선택을 존중하는 809년 아헨 교회 회의의 입장을 알리는 서한을 작성할 인물로 스마라그두스를 영입했습니다. 경건왕 루도비쿠스(Ludovicus Pius, 재위 814~840)도 스마라그두스를 신임했습니다. 스마라그두스는 루도비쿠스에게 자비와 정의의 덕을 특별히 강조하면서 왕족의 영적 양성에 관해 연설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왕실의 길(Via Regia)」을 저술해 루도비쿠스에게 정헌했습니다.

 

스마라그두스는 817년 아헨 교회 회의 이후 820년쯤 「베네딕도 수도 규칙 주해」를 저술하면서 수도원 개혁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단순하면서도 매우 엄격한 내용을 담고 있는 주해서는 수도 생활 모습을 정확하게 소개했습니다. 아니아네의 베네딕투스의 수도원 개혁이 그 당시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스마라그두스의 위치와 영향력으로 보았을 때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서에 대한 그의 주해서도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단순한 묵상 기도를 강조한 힐데마루스의 주해서

 

생애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힐데마루스(Hildemarus, ?~850쯤)도 베네딕도회 수도자였습니다. 힐데마루스는 수도 생활 초기에 프랑크 왕국 북쪽 코르비(Corbie) 수도원에서 수도 생활에만 전념했습니다. 이후 생애 후반에 랑고바르드 왕국 지역이었던 밀라노 근처 치바테(Civate) 수도원에서 수도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830~840년대에 많은 작품을 저술, 작가로서 경력을 쌓으며 명성을 떨쳤습니다. 힐데마루스는 루카복음 주해서도 남겼지만, 악습과 죄에 대한 주제를 다룬 작품을 저술함으로써 수도자들의 수도 생활을 돕고자 했습니다.

 

845년쯤 힐데마루스는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서를 주해한 「수도 규칙 해설(Expositio Regulae)」을 저술했습니다. 최근 일부 학자들은 힐데마루스의 주해서가 필사돼 전해질 때 복잡한 과정을 거침으로써 세 가지 필사본이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본문의 양이 가장 많은 필사본과 요약한 필사본 및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서 제61장까지만 주해를 마친 미완성 요약본이 전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학자들은 두 번째 요약본은 최근까지 부제 파울루스의 작품으로 알려졌던 필사본이고, 세 번째 미완성 요약본은 그 당시 또 다른 베네딕도회 수도원 원장이었던 바실리우스(Basilius, 9~10세기)의 작품으로 알려졌던 필사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바실리우스에 대해서는 몇몇 고전 문헌에서 이름과 신분과 활동 시기 정도만 전해질 뿐이었습니다.

 

힐데마루스는 수도 규칙 주해서에서 베네딕도회 원칙인 ‘기도하고 일하라’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수도자의 기도 생활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시편을 암송하는 것은 세상사에 휘둘려 하느님과 깊은 일치에 들지 못할 때 큰 도움이 된다고 했습니다. 묵상 기도도 간단하게 실천하는 것이 좋다고 강조했습니다. 긴 시간 동안 너무 진지하게 묵상 기도를 실천하다 보면 오히려 분심과 잡념에 더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차라리 거룩한 독서나 육체 노동을 하는 편이 좋다는 것입니다. 다만 드문 일이지만 거룩한 독서나 육체 노동을 실천하다가 하느님 은총 속에서 관상 기도 단계로 들어가게 된다면 즉시 모든 일을 중단하고 기도에 전념하라고 언급했습니다. 아마도 과도하게 기도 생활에 매달렸던 수도자들이 많았기에 힐데마루스는 주해서에서 이렇게 강조했던 것 같습니다.

 

훗날 수도원이 왕족이나 귀족에게 벗어나기 위해 수도자들은 기부금에 의존해서 살아서는 안 되고,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육체 노동에 친숙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9세기에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서를 주해한 수도자들은 기도 생활과 활동 생활이 조화를 이루는 수도 생활을 복원시킴으로써 수도원이 개혁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8월 6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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