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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35: 9세기 (1) 아니아네의 베네딕투스의 수도원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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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7-29 ㅣ No.983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35) 9세기 ① 아니아네의 베네딕투스의 수도원 개혁


세속에 물든 수도원에 분 개혁의 바람

 

 

- 프랑크 왕국의 수도원 개혁. 그래픽=문채현.

 

 

카롤링거 르네상스는 중세 초기 교구 성직자들과 평신도 그리스인들에게 부족했던 역량을 성장시키도록 격려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수도원들과 수도자들에게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수도원 개혁 운동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왕족과 귀족의 탐욕의 대상이 된 수도원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PP. I, 재임 590~604) 뜻에 따라서,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유럽 북방 선교를 시작한 이후 200여년 만에 유럽 전역에 베네딕도회 계열 수도원들이 설립됐습니다. 아일랜드 켈트족 수도자들의 종교적 열정과 잉글랜드 앵글로색슨족 수도자들의 선교적 열성으로 브리타니아 지역을 비롯하여 갈리아 지역과 게르마니아 지역에서 교회가 주도하는 수도원들이 설립됐습니다. 한편 일찍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던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거 왕족, 새롭게 교회의 수호자로 부상하게 된 카롤링거 왕족과 귀족들의 지원으로 프랑크 왕국 전역에서 세속 권력이 주도하는 수도원들도 설립됐습니다.

 

그런데 왕족과 귀족들이 점차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유로 수도원 설립을 지원하면서 수도원 안에 심각한 문제들이 생겼습니다. 왕족과 귀족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수도원 설립 자금을 봉헌한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이익에 활용하고자 수도원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왕족이나 귀족들은 성덕이 높은 수도자보다는 자신이 소유한 수도원을 잘 운영할 수 있는 행정가를 원장으로 원했기 때문에 수도원 원장을 마음대로 임명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과 뜻이 맞는 수도자나 심지어 결혼한 평신도를 원장으로 임명해 가족과 함께 수도원에 거주하게 했습니다.

 

또한 왕족이나 귀족들은 자신이 소유한 수도원 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었습니다. 탈세 목적으로 재물과 재화를 면세로 수도원에 반입시켰다가 임의로 처분해 경제적 이득을 취했습니다. 결국 수도원은 외부 세력에 의해 순수하게 기도하는 곳으로 머물지 못하고 세속적인 탐욕의 중심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왕들도 이와 같은 상황을 지지했기 때문에 이 상황은 쉽게 개선될 수 없었고 개혁을 위해 더 많은 시일이 필요했습니다. 수도자들은 성덕이 있는 수도자나 신심 깊은 평신도가 수도원 원장으로 오기만을 바랄 뿐이었습니다.

 

 

카롤링거 왕조와 아니아네의 베네딕투스의 개혁 운동

 

한편, 교회가 주도해서 설립한 수도원은 다른 문제를 겪었습니다. 지역 주교 및 성직자들이 도시 지역에 설립했던 수도원들은 왕족과 귀족의 자녀들을 교육하는 학교 역할을 하면서 지성과 학문의 중심지가 됐습니다. 따라서 관상 기도 생활 중심의 수도원 고유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수도자들이 넓은 시골 지역에 각각 설립한 수도원은 서로 고립돼 각 수도원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지역별 특성을 지닌 각기 다른 수도원 제도와 수도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샤를마뉴(Charlemagne, 재위 768~814)는 백부(伯父)인 카를로만(Carloman, 707쯤~754) 및 선왕인 페피누스 3세(Pepinus III, 714~768)와 함께 프랑크 교회를 로마 교회와 일치시키려고 했던 보니파키우스(Bonifacius, 672/75~754) 대주교의 노력을 계승했습니다. 샤를마뉴는 먼저 프랑크 교회 전례를 개혁하고자 교황청에 ‘그레고리우스 전례문(Sacramentarium Gregorianum)’을 요청했습니다. 또한 샤를마뉴는 787년 부제 파울루스(Paulus Diaconus, 720/26쯤~800 이전)를 몬테카시노 수도원 원장으로 보내어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Regula Monachorum) 사본을 요청했으며, 아니아네의 베네딕투스(Benedictus Anianensis, 750쯤~821)에게 수도원 개혁을 위임했습니다. 따라서 802년 아헨 교회 회의에서 샤를마뉴는 프랑크 왕국 내 수도원 제도 개혁에 대한 의결을 이끌어냈습니다. 다만 샤를마뉴는 교회에 ‘황제의 사절(missi dominici)’을 파견함으로써 교회를 통제하려는 정치적인 의도를 드러냈습니다.

 

샤를마뉴가 수도원 개혁의 성과를 보지 못하고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한 경건왕 루도비쿠스(Ludovicus Pius, 재위 814~840)도 이미 친분이 있었던 아니아네의 베네딕투스에게 다시 수도원 개혁을 위임했습니다. 루도비쿠스는 816년과 817년 아헨 교회 회의에서 아니아네의 베네딕투스의 수도원 개혁 의지를 담아 수도자들의 생활을 개선하는 규칙인 ‘수도회 참사규칙(Capitulare Monachorum)’을 공표했습니다.

 

아니아네의 베네딕투스.

 

 

같은 수도 규칙 따르며 본연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제2의 베네딕투스라 불린 베네딕도회 수도자 아니아네의 베네딕투스는 서고트족 귀족 가문 출신으로 페피누스 3세의 궁정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베네딕투스는 이탈리아에 주둔했던 샤를마뉴 군대에서 복무하다가 죽을 뻔했던 경험을 한 774년쯤 수도 생활을 통해 하느님의 종으로 봉사하기로 결심하고, 얼마 후 상센(Saint-Seine) 수도원에 입회했습니다. 동방 수도 생활을 동경하던 베네딕투스는 780년경 아니아네로 이주해 동방 수덕 생활을 실천하는 수도원을 설립했다가, 782년 생각을 바꿔 베네딕도 수도 규칙을 따르는 수도원을 다시 설립했습니다.

 

이때부터 베네딕투스는 다른 수도원도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각 수도원이 사용하던 여러 수도 규칙서를 베네딕도 수도 규칙서와 대조하면서 비교 연구했습니다. 결국 베네딕투스는 각 수도원이 같은 수도 규칙서를 수도 생활에 적용할 때 임의로 해석해서 실천하는 것이 문제임을 발견했습니다. 즉, 수도원 개혁은 수도자들이 수도 규칙 본연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노력이 주변에 알려지자 주교들은 베네딕투스에게 자신들이 돌보는 지역의 수도원도 개혁해 주기를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

 

경건왕 루도비쿠스 시절에 베네딕투스는 코르넬리뮌스터(Cornelimnster) 수도원을 설립하고 개혁의 중심지로 삼았습니다. 당시 사용되던 25개의 수도 규칙서를 모은 「수도 규칙서 전집」(Codex Regularum)과 그 규칙들을 베네딕도 수도 규칙서와 병행하며 주석한 「규칙서들의 대조」(Concordia Regularum)를 저술했습니다. 결국 아니아네의 베네딕투스는 수도원 연합의 수석 원장이 되어 모든 수도자가 같은 수도 규칙서를 따르며 세상을 포기하고 구원에 다다르기를 바랐습니다.

 

아니아네의 베네딕투스의 수도원 개혁은 실패한 듯 보였습니다. 수도자가 앞장섰던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아니라, 프랑크 왕국의 국왕들의 정치적인 관점과 베네딕투스 개인의 열정으로 시작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베네딕투스와 경건왕 루도비쿠스 사망 이후 카롤링거 왕조에 위기가 찾아오자 개혁을 이끌 추진력이 사라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개혁의 시도는 훗날 또 다른 개혁을 위한 전망과 과제를 남겼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7월 30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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