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6일 (수)
(녹)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강론자료

2013-1027...연중30주일 다해

스크랩 인쇄

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3-10-26 ㅣ No.1415

 

연중 제 30 주일 (다해)

집회서 35,15-17. 20-22ㄴ      2티모테오 4.6-8.16-18      루카 18,9-14

2013. 10. 27. 등촌3.

주제 :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올바른 가치를 가지려면, 제대로 봐야 한다는 전제(前提)가 지켜져야 할 것이고, 눈으로 본다고 하는 것이 삶에 도움이 되는 일이어야 한다는 전제도 필요할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면 사람이 본다거나 볼 수 있다는 것은 삶에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전제들을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적용시켜 말하면, 어떤 표현이 가능하겠습니까? 저는 이 자리에서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거나 세상을 대하기라는 표현으로 부르고 그에 관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사람이면서도,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대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내가 하느님이 아니고 사람이라고 하면서,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대하는 것을 어렵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반응을 보일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행동할 모습은 두 가지 중에 한가지 일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이 아니고 사람이므로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는 없지 라고 말하는 첫 번째와, 사람으로서 한계는 있겠지만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과 같은 일을 찾겠다는 것이 두 번째입니다. 포기하거나 부정하는 마음이 먼저인 첫 번째는 고려할 가치가 없는 일이니 접어두고, 우리가 삶에 드러내야 할 두 번째 방법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며칠 전에 아주 심각한(!) 소리를 들은 것이 있습니다. 물론 제게 말한 사람의 입장에서 심각(!)하다는 것이지,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다르게(?) 대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기도는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겠다(!)는 것이고, 어떻게 기도해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소리를 들으면, 어떤 대답을 해주겠습니까?

 

오늘 복음에는 두 사람이 하는 기도가 나왔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감에 찬 바리사이였고, 다른 한 사람은 의기소침한 세리이었습니다. 노파심(老婆心,=남의 일을 지나치게 걱정하고 염려하는 마음.)에서 하는 소리입니다만,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결론만 생각하면서 의기소침한 사람이었던, 세리와 그 사람이 세상에서 보인 삶의 모든 것을 최고의 덕목이라고 생각해서는 큰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간 사람에 관한 말씀을 하신 것은 둘 중의 하나를 말할 때 선택한 요소이지, 그것 이외에 다른 이유나 필요는 생각하지 말아야 할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자기의 삶에 자신감이 흘러넘쳤던 바리사이가 세상에서 잘못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가 하는 기도에 나오는 것처럼, 자신이 삶에서 그가 했다는 모든 행동들이 잘못된 것이었고 하느님의 뜻을 어기는 행동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요? 판단은 조심스럽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판단을 잘못하게 되면, 잘못된 길을 가게 될 것이고 그렇게 잘못된 행동을 하면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가 잘못한 것이라고 말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살아온 삶의 자세나 태도가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말로 표현하는 것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에 나온 두 번째 사람, 세리가 잘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역시 판단을 잘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세리로서 그가 세상에서 보인 행동은 다 옳다고 생각하고, 잘못된 본보기를 좋은 것이라고 따를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세리(稅吏,=세금을 받는 관리.)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글자로 생각하면, 세금을 받는 관리라는 뜻이니, 잘못될 요소가 없다고 하겠지만, 그 직책을 맡은 사람에 대한 평가는 역사적인 배경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세리는 자기민족이 살던 곳을 식민통치로 지배하던 힘 있는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세력을 등에 업고 동족들에게서 세금을 능력껏 걷어서, 경락(競落,=경매로 동산 또는 부동산의 소유권을 얻는 일)받은 만큼 돈을 통치자에게 바치고, 나머지로는 자기 호구책으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먹고 산다는 미명(美名,=그럴듯한 명목이나 명칭)아래 한 행동가운데서 어떤 것까지 용서해줄 수 있느냐는 심각한 문제를 만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온 사람이 성전에서 기도를 바쳤고, 그 기도로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는 루카복음서의 말씀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어찌하여 하느님은 한쪽만을 보고, 우리로 하여금 잘못된 판단을 하게 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인 우리가 사람의 눈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우리와는 다르게 보시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해석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신앙인으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올바른 가르침을 얻겠습니까? 이래서 신앙인의 길은 쉽지 않다고 말해야 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오로지 믿음만 강조하는 오류!!!>

 

오늘 첫 번째 독서로 읽은 집회서의 말씀도 한쪽 방향만을 얘기합니다. 하느님은 왜 가난한 사람의 말을 들어주신다고 말하며 부자는 언급하지 않는지, 과부의 하소연을 들어준다면서 그렇지 않은 사람의 얘기는 왜 없는지, 우리도 다 가난한 사람이나 과부로 살아야 한다는 얘기인가....하고 생각하게 합니다. 잘못 생각하면, 잘못 판단하게 되고, 결국에 우리는 세상에서 잘못된 자세로 살게 될 것입니다.

 

한쪽을 편애(偏愛)하는 신()으로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잘못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우리들 각자가 세상을 심판할 사람이고, 세상전체가 올바른 길로 가기를 바라는 구원자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생각보다 쉽게 하느님의 눈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사람이 자기혼자만 생각하는 아집(我執,=자기중심의 좁은 생각에 집착하여 자신만을 내세워 버팀)을 버려야합니다.

 

내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대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685 1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