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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순교자 한성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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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9-22 ㅣ No.386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순교자 한성임 전

 

 

한국 교회는 103명의 순교성인을 배출했다. 그리고 현재는 124명의 순교자와 최양업 신부에 대한 시복을 추진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 순교자에 대한 관심이 충분한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나라 문헌기록에 보면 신앙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특히 1866년의 박해와 1868년의 박해에서 순교한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아직 그 이름마저도 제대로 밝히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거의 틀림없이 순교했으리라 판단되지만, 그 순교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을 남기지 못한 사람도 허다하다. 이러한 사례의 대표적 인물로 ‘포도청 등록’에 수록되어 있는 한성임(韓成任, 1814-1868년)을 들 수 있다.

 


한성임의 입교와 활동

 

한성임은 1868년 4월 14일에 우포도청에서 신문을 받았다. 그가 체포되어 신문을 받았던 때는 오페르트 사건이 일어나기 사흘 전이었다. 한성임이 취조받고 있던 1868년 4월 17일 충청도 덕산에서는 오페르트와 페롱 신부가 함께 저지른 남연군(南延君; 대원군 이하응의 생부) 묘 도굴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에 대한 복수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극도에 이르렀다. 관가에서는 배교하고 풀려났던 신자들까지도 다시 잡아들여 사형에 처하던 때였다. 이 광란의 시기에 한성임은 문초를 받으면서 자신의 신앙을 선명히 고백했다.

 

한성임은 55세 때에 우포도청에 체포되어 신문을 받았다. 이를 근거로 하여 계산해 보면 그는 1814년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교회 창설 이래 신앙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인 양근(楊根, 오늘의 남양주시)의 월곡(月谷, 다리실)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18세가 되던 1831년에 정하상의 여동생이었던 동정녀 정정혜(丁情惠, 엘리사벳, 1797-1839년)에게서 천주교를 배웠다.

 

한성임의 세례명은 ‘마야(馬耶)’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아마도 ‘마리아’의 잘못된 표기로 생각된다. 한성임을 가르친 정정혜의 세례명은 엘리사벳이다. 성경에 나오는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사촌 간이었다. 정정혜는 이를 연상하면서 한성임과 영적 유대를 다지려고 그에게 ‘마리아’라는 세례명을 권유했을 법하다. 한성임도 자신에게 신앙을 전해준 정정혜의 모범을 따르고, 자신의 주보성인 마리아처럼 평생 동정으로 지냈다.

 

그는 영세한 후 자신을 인도한 정정혜 등과 함께 선교사들의 복사를 해왔다. 그리고 박해로 말미암아 모시던 선교사나 동료들이 순교한 이후에도 계속하여 새롭게 들어온 선교사들을 보살피며 교회의 기둥을 다시 세우는 데 힘을 보태었다. 그는 1837년 조선에 입국한 엥베르(Imbert, 范世亨, 1796-1839년) 주교를 1년여 동안 모셨다. 이때 입국했던 프랑스 선교사들은 1839년의 박해 때에 교회의 지도적 인사들과 함께 체포되어 순교했다. 그러나 스물다섯 살 노처녀인 한성임은 살아남았다.

 

한성임이 서른한 살이 되던 1845년에 김대건 부제의 안내로 입국한 페레올(Ferreol), 高, 1808-1853년) 주교를 만났다. 그리고 한성임은 김대건 신부의 복사로 봉사활동을 계속했다. 또한 그는 1845년에 입국한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년) 신부 댁에서 3년 동안 복사로 지냈다. 이때를 즈음하여 한성임은 1849년에 서품을 받고 입국한 최양업(1821-1861년) 신부도 3개월 정도 모셨다.

 

한성임은 선교사를 보필하는 데에 남다른 경험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한성임은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면 그들의 초기 정착을 돕는 데에 가장 적임자로 인정받아 봉사하게 된듯하다. 한성임은 조선교구 제4대 교구장인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년)가 1856년에 입국한 다음에도 그를 위해 7개월 동안 복사를 했다. 그만큼 그의 지혜와 덕성이 뛰어났다는 말이 된다.

 

 

한성임의 믿음살이

 

한성임이 박해시대 선교사들한테 절대적인 신임을 받은 데에는 그의 뛰어난 믿음살이 때문이었다. 포도청의 신문 기록을 통해서 살펴보면, 그가 학습했던 수덕서(修德書)로는 “칠극”(七克)을 들 수 있고 기본적 교리서로는 “성교요리문답”(聖敎要理問答)이 있었다. 한성임이 가지고 있던 천주교 교리지식은 주로 ‘사본문답(四本問答)’이라고도 불리던 “성교요리문답”에 근거하였다.

 

한성임의 믿음살이에서 드러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가 그침 없이 기도하였다는 사실이다. 한성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쉼이 없이 기도를 바쳤다. 그는 신문 과정에서 대략 40여종의 기도문을 제시해 준 바 있다. 그는 1862년에 목판으로 인쇄되어 널리 보급되었던 “천주성교공과”(天主聖敎公課, 1862년 간)에 수록된 기도문들을 주로 바쳤다.

 

이 밖에도 한성임은 “십자가도문”(十字架禱文)과 같이 별도의 기도서에 나오는 경문들도 봉송하였다. 한성임은 이처럼 수많은 기도문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신문관에게 “하루 종일이 걸리더라도 그 기도문의 이름을 다 말할 수는 없다.”고까지 했다.

 

동정녀 한성임은 신문관에게 천주교 교리를 나름대로 설명하고자 했다. 그는 천주교에서는 동정을 지키는 남녀를 가장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함을 밝혔다. 이는 동정을 지키는 사람들의 영혼이 청정하고 전일(全一)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동정녀의 반열에 들 수 있지만, 죽은 뒤에 천당으로 올라갈지 지옥에 떨어질지는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천당에 올라가는 일, 곧 구원에 대해서 이처럼 상당히 엄격한 기준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자신은 신입교우들과 다른 존재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죽게 되면 참다운 천주교도들이 모두 없어지게 되는 셈이니, 이것이 진실로 걱정스럽다.”고 한탄했다.

 

한성임은 사람의 영혼이 동물이나 식물의 혼과 다름을 말하고 있다. 한성임은 사람이 영혼과 육신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설명한다. 그는 남자는 잉태된 후 4개월이 지나면 영혼이 생기고, 여자는 수태 후 8개월이 지나야 영혼이 생긴다고 보았다. 반면에 육신은 사상(四象) 곧 사행(四行)의 작용으로 생겨난다고 했다.

 

선교사의 저서에 언급되었던 사행설(四行說 ; 네 가지 원소, 곧 흙 · 물 · 불 · 공기 ;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소론)은 당시 유학자 일반이 주장하던 오행론(五行論)과는 다른 내용이었다. 그러나 한성임은 교회 서적에 나오는 사행설에 입각하여 육신의 형성을 논하였다.

 

한성임이 가진 사람의 영혼에 대한 생각은 당시 교회에서 가르치던 전형적 영혼론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곧, 그는 착한 이의 영혼은 영원히 복락을 누리지만, 악인의 영혼은 어느 기간이 지나면 흩어져 없어진다고도 생각했다. 아마도 그는 우리 전통사상의 혼백론(魂魄論)에서 사람이 죽으면 그 백(魄)이 흩어진다는 설을 빌려와서 악인의 영혼을 그렇게 규정해 본 듯하다.

 

한성임은 인간이 죽은 뒤 받게 될 상선벌악의 원칙을 믿었다. 그러기에 그에게 천당과 지옥의 존재는 논리적 귀결이었다.

 

한성임은 천당과 지옥이 확연한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당시 교리서에서 천당 지옥을 설명했던 바와 같은 엄격한 이분법적 대립에는 별로 동의하지 않은 듯했다. 그가 묘사한 천당은 착한 영혼이 유유자적하며 영원토록 지내는 곳이었다. 그가 생각했던 지옥은 악인들의 영혼이 수억 년을 헤매다가 소멸되어 버리는 음습한 지상이었다.

 

 

남은 말

 

한성임은 1830년대 이후 조선에서 활동하던 거의 모든 사제들을 알고 그들을 위해 봉사했다. 비록 그는 충분한 교리지식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열심한 기도생활을 지속하고 있었다. 그의 열심한 봉사와 기도생활은 그를 신앙 고백자로 만들어주었다.

 

그는 1839년과 1846년의 박해를 피하며 교회를 지켜나가고자 했다. 그리고 1866년의 박해 때에는 양근 향리에 숨어서 박해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박해가 점차 그 범위를 넓혀가자 그는 1867년 5월경에 서울로 올라와 남의 집에서 협호(夾戶)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채 1년이 못되어 그의 행동은 탄로 났고, 그는 1868년 4월에 체포되어 포도청에 구금되고 말았다. 그가 무수히 목격해 왔던 순교의 순간이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문헌자료에서 한성임에 대한 사형판결문이나 그에게 사형을 집행했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감안할 때, 한성임이 그 박해의 와중에서 살아남기는 거의 불가능했을 터였다. 그도 1868년 4월 하순을 전후한 어느 날 다른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포도청 옥에서 교살되어 순교했음에 틀림없다.

 

이렇게 한성임 마리아는 순교자로 다시 태어났고, 우리는 그를 순교자로 불러도 충분하리라고 생각된다. 나는 이번 ‘순교자의 달’에 그를 통해서 숨은 순교자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음에 기꺼워한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의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9년 9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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