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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 신앙에 대한 탄압에서 신앙의 자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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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2 ㅣ No.89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신앙에 대한 탄압에서 신앙의 자유로

 

 

우리나라 역사에서 신앙의 자유는 사상과 학문연구의 자유와 함께 우리 사회와 문화가 근대적으로 전환됨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교회사에 있어서도 신앙의 자유는 교회 발전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원래 신앙의 자유는 결코 거저 주어진 법이 없었고, 이를 얻으려는 꾸준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또한 신앙의 지유는 한꺼번에 갑자기 주어지지는 않았으며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확대되어 갔다. 이 점은 우리 교회사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기 시작한 사건으로 1886년에 조선 정부와 프랑스가 맺은 한불수호통상조약을 들고 있다.

 

프랑스 측에서는 이 조약문에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의 요청에 따라 신앙자유에 관한 항목을 삽입하고자 했다. 그러나 조선 측의 반대로 이를 직접 표현하는 대신 프랑스인이 조선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는 조문을 삽입하였다. 교회 측에서는 이를 ‘선교의 자유’를 인정한 것으로 확대 해석했다.

 

물론 당시 조선 정부에서는 이와 같은 해석에 반대했지만, 블랑 주교를 비롯한 조선교회와 프랑스 측은 이 구절이 선교의 자유에 대한 인정임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한편, 신앙의 자유 가운데 중요한 요소가 선교의 자유이므로 오늘의 연구자들 가운데 일부는 한불조약이 체결된 1886년을 바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 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불조약에 포함되어 있는 “가르칠 수 있다.”는 조항의 해석을 당시 교회나 프랑스의 견해처럼 선교의 자유로 해석한다 하더라도 이를 신앙의 자유에 대한 인정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 천주교 탄압을 규정한 법규와 관행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프랑스 선교사가 조선에서 선교할 수는 있되, 조선인은 천주교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모순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래서 한불조약이 맺어진 다음에도 일부 지역에서는 순교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따라서 한불조약을 신앙 자유의 계기로 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이 신앙의 자유가 일시에 갑자기 주어질 수는 없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몇 단계의 과정을 거처 신앙의 자유를 확대해 나갔다. 그 첫째 단계는 순교를 통하여 신앙의 자유를 얻고자 한 운동이다. 박해시대 순교자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신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무저항운동에 투신했던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 시대의 신도들은 신앙의 자유가 사람의 당연한 권리이며 나라의 법보다 우선함을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양심법에 근거한 이들의 주장은 용납될 수 없었고 많은 이들이 순교하게 된다. 그들의 죽음은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려던 결의의 표현이었으며, 인간의 양심을 규제하는 그릇된 법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러한 노력들은 뒷날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는 데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개항과 신앙의 자유

 

개항이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 주지는 못하였다. 개항 이후 조선이 외국과 맺은 여러 조약에서도 신앙의 자유에 관한 명백한 규정은 없었다. 극히 일부의 조약에 규정된 종교에 관한 조목은 어디까지나 조선에 나와있는 외국인만을 대상으로 했지, 조선인에게도 신앙의 자유를 용인해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개항으로 인해 신앙의 자유에 대한 전망이 좀 더 분명해졌다. 시대변화를 감지한 지배층도 천주교 문제에 대하여 더 이상 박해로만 일관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들은 개항 이후 천주교 신앙이 조선에 널리 전파되어 있고, 서양인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들의 신앙실천을 짐짓 모른 체 하면서 그 활동을 묵인하는 입장을 취했다.

 

두 번째 단계로 개항 이후에 전개되었던 ‘신앙의 자유’의 묵시적 인정 시기를 들 수 있다. 신앙의 자유가 묵시적으로 용인된 때는 1882년이었다. 이 때에 교회는 인현서당을 설립했다. 이 학교에는 신자가 아닌 일반인 학생들도 재학하고 있었다. 그 이후 교회는 서울과 경상도에 고아원을 세워 운영하기 시작했고, 경기도 여주군 부엉골에 신학교를 세워 조선인 성직자 양성에 착수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신앙의 자유에 대한 정부의 묵인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그리하여 한국 천주교회는 교회가 세워진 뒤 100년 만에 신앙의 자유를 묵인받을 수 있었다.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는 마지막 단계로 1895년을 들 수 있다. 이 해에 정부에서는 1866년 박해 때 순교한 일부 신도들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다. 사면의 대상이 되었던 신도들은 소수에 불과했지만, 이 사면령은 신앙의 자유를 공인하는 사전 조처로 해석되었다. 또한 이 해에 조선교구 제8대 교구장인 뮈텔 주교는 조선의 국왕 고종을 만났다.

 

이때 고종은 1866년의 병인박해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하며 뮈텔 주교에게 친선을 제의했다. 전제적 군주국가에서 국왕의 말은 곧 법이었다. 국왕인 고종이 천주교의 주교를 인정하고 종전의 박해에 유감을 표했다는 사실은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공인했음을 뜻했다. 뮈텔 주교 자신도 그날 일기에서 조선에서 박해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고 기록한 바 있다.

 

이러한 정세의 변화가 법적으로 확인된 것은 1899년에 조인된 ‘교민조약’에서였다. 이 교민조약은 조선 정부의 관리와 뮈텔 주교 사이에 체결되었다. 이 조약을 통하여 조선인에게도 신앙의 자유가 성문법으로 보장되었고, 신자들도 일반인과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있음이 인정되었다.

 

이 교민조약은 1904년에 체결된 ‘선교조약’을 통해서 더욱 보완되었다. 이 선교조약에 따라 선교사들은 개항장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토지를 매입하고 건물을 세울 권리를 보장받았다.

 

 

남은 말

 

조선교회는 자체의 지속적 노력과 개항이라는 시대상황의 변화에 힘입어 신앙의 자유를 획득했다. 곧 신앙의 자유는 한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기 이전부터 묵인되어 오다가 1895년 고종 임금에게 승인받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에는 여러 종교가 있다. 그 가운데 천주교처럼 많은 피를 흘렸고 몸부림치며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은 종교는 없었다.

 

천주교회의 노력으로 얻어진 신앙의 자유는 타종교에도 적용되었다. 1895년부터는 불교에 대한 규제가 풀렸다. 이 해를 계기로 개신교도 본격적으로 선교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천주교 신도들이 전개했던 신앙자유운동은 한국의 시민적 자유를 강화하는 데에 기여했다. 당시 신도들이 전개한 이 운동에서는 문화적 근대화 운동의 성격도 확인된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활발한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4년 2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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