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문헌ㅣ메시지

2002년 서울대교구장 성탄 담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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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2-22 ㅣ No.138

2002년 예수 성탄 대축일 담화문


“말씀이 참된 빛이셨으니 그 빛이 세상에 오시어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요한 1,9)

 

 

1.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맞이하여 교형 자매 여러분과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충만히 내리시기를 기원합니다. 해마다 오늘이면 온 교회와 세상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라는 성가를 부르며 구세주의 오심을 경축합니다.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가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이며,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 올 것”(이사 9,1)이라고 외쳤듯이 예수님은 이 세상에 구원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이 구원의 빛이 우리 겨레와 온 누리에 내리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은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중에 있는 이들 안에 드러난 구원과 해방의 신비였습니다. 베들레헴의 작은 말구유에서 터져 나온 생명의 빛은 눈먼 인간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하느님의 지혜였고 세상을 밝히는 빛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요한 1,10).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처음 맞이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이루실 구원과 해방을 기다리며 믿음과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던 마리아와 요셉이었습니다. 또한 베들레헴 근처에서 동터오는 새벽을 기다리며 밤새 양떼를 지키던 가난한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은 모든 사람, 특별히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내리신 하느님의 무한하신 선물입니다.

 

2. 지구촌 곳곳에서는 해마다 평화의 왕께서 세상에 오심을 기리며 기쁨의 축제를 열고 있습니다. 그러나 왜 세상에는 여전히 가난한 자 억눌린 자 고통받는 자들의 신음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까? 왜 세상에는 종교적·인종적 갈등과 전쟁의 위협 속에서 불안과 공포의 나날이 계속되고 있습니까? 캘커타 빈민들의 거리에서 온 생을 바치신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가난과 고통을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을 만들어 낸 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사실 우리 앞에 놓여진 가난과 고통은 개인적인 탓만이 아니라 힘있는 자들과 가진 자들의 끝없는 탐욕과 이기심의 결과입니다. 오늘날 힘있는 나라는 약한 나라를, 가진 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작년에 미국에서 일어난 끔찍한 9·11 테러사건 이후에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과 폭력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테러와 테러국가를 응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득세하는 가운데 중동에 대한 전쟁의 위협은 증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에도 긴장과 불안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인류가 소망하는 평화에 이르는 길은 멀고도 여전히 험난해 보입니다.

 

이제 우리 사회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성찰해 봅시다. 우리 사회에서 지역 간 · 계층 간의 불균형과 차별은 점점 더 심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가난으로 몰아넣는 불합리한 정치적 · 사회적 구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온갖 사치와 향락을 추구하며 살아가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흥청망청 먹고 마신 다음 내어버린 음식 쓰레기 처리를 두고 고심하고 있을 때, 우리의 동포인 북한 주민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자유와 생계를 찾아 주변나라를 떠도는 많은 북한 이탈 주민들, 낯선 이국 땅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외국인 노동자들, 하루하루를 걱정하는 일용 노동자들, 버려진 아이들과 노인들, 가난한 농민들이 우리의 관심과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탄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이러한 현실을 바라보고, 우리의 시선을 가난한 사람들 안에 계신 주님께로 돌려야 하는 때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시기”(루가 1,51-52) 위해 오신 분입니다. 주님은 먼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묶인 이들에게 해방을 알리며, 눈먼 이들을 보게 하고 억눌린 이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하여”(루가 4,18) 오셨습니다. 죄와 절망에 빠진 세상, 불신과 반목, 대립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어느 때보다 아쉽고 그리운 이 때 주님은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은 희망의 사건입니다. 하느님은 어둠과 절망에 쌓인 세상을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요한 3,16). 이런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은 샤를 드 푸코의 말처럼 우리로 하여금 “불가능을 없애 주며 불안·위험·두려움 등을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사실 한 해를 돌아보면 우리 민족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합니다. 지난 여름을 달구었던 월드컵 축구 경기는 온 세상이 화해와 사랑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선물했습니다. 남북이 하나가 되어 참여했던 아시안 게임, 반세기 이상 끊겼던 남북 간의 철도 복구 작업 등 조금씩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3.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제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우리는 새 대통령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새로운 정치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새 대통령은 우선 흩어진 국민의 마음을 모으고 남북의 화해와 평화 통일의 길을 열어 주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며, 우리 사회에 만연된 부정부패를 일소하는 데 앞장서 모범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또한 새 대통령은 정의롭고 깨끗하며 똑바른 사회를 이룩하는 데 모든 힘을 다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이번 대선에 나섰던 후보자들과 정당들, 그리고 모든 국민도 경제적으로 뿐 아니라 정신적·도덕적으로도 부강하고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한마음 한뜻으로 힘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새 천년기에 걸맞는 새 나라는 한두 명의 힘으로가 아니라 온 국민이 합심할 때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서울대교구는 지난 10여 년 간 추진해온 소공동체를 통하여 활기찬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또한 세 분 주교님이 올해 탄생하셨고, 지역 중심의 작은 교구를 지향하며 교구의 구조적 개편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올해 준비 단계를 마친 교구 시노드는 내년에 본회의를 거치면서 교회의 쇄신과 발전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게 됩니다. 이 세상과 시대에 부응하는 깨어 있는 교회로 거듭나기 위하여 개최한 이번 시노드에 성령께서 빛을 비추시고 길을 인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 모든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이다”(루가 2,10). 이 말은 천사들이 새벽을 기다리며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전한 것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 겨레와 교회에 가슴 벅찬 이 기쁨의 소식을 전하며 아기 예수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우리 사회와 남북한 민족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아울러 구세주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와 103위 성인들과 천상의 성인들께서 구원의 여정에 있는 우리를 위해 천상에서 전구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2002년 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에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정진석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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