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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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의정부교구 순례길: 4시간 넘게 걸어 만난 남종삼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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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11-23 ㅣ No.859

[즐거운 여기 건강한 신앙] 의정부교구 순례길


4시간 넘게 걸어 만난 남종삼 성인… 절로 고개 숙여져

 

 

- 화려한 단풍 사이로 보이는 의정부 주교좌성당 뒷모습이 아름답다.

 

 

의정부교구는 신앙 선조들의 삶과 신앙이 고스란히 배어 있음에도 일반 신자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길을 소개하는 소책자 「의정부교구 순례길 안내」를 최근 펴냈다.

 

순례길은 의정부주교좌성당을 출발해 남종삼 성인 묘역을 거쳐 순교자 황사영 묘에 이르는 '순교자의 길'과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1854~1933년) 주교가 경기도 북부지역 공소 사목을 위해 걸었던 '사목 방문의 길'로 나뉜다. 짧게는 1시간 반에서, 길게는 5시간이 넘게 걸리는 5개 길 가운데 의정부주교좌성당에서 남종삼 성인 묘역으로 가는 길을 걷는다.

 

순례길의 출발지인 의정부주교좌성당(경기도 의정부시 의정부2동)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청명한 가을 햇살을 받으며 저마다 자태를 뽐내는 나무들이 눈에 띈다. 바람 한점 나무를 스칠 때마다 우수수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나뭇잎들이 햇살에 반사되는 물결처럼 눈부시다.

 

아름다운 풍경에 한눈을 팔기도 잠시, 1953년 단단한 석재로 지은 낮은 키의 주교좌성당에 눈길이 닿는다. 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99호로 지정된 성당의 이러한 겉모습은 폭격 등 전쟁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것이 책자의 설명이다. 전쟁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 의정부 전역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어머니 성당'을 뒤로 하고 남종삼 성인 묘역을 향해 순례의 첫발을 내디뎠다.

 

승정원 승지까지 지낸 남종삼(요한, 1817~1866년) 성인은 병인박해 때 체포돼 모진 고초를 겪으면서도 조정 관리로서, 신앙인으로서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신앙을 지키다 순교했다. 성인이 순교한 뒤 부친 남상교, 큰아들 남명희, 처 이소사 등 3대에 걸쳐 가족 4명이 성인의 뒤를 따라 순교의 길을 걸었다.

 

이런 성인의 묘소를 찾아가는 순례길은 걸어서는 3시간이 넘게 걸리지만 자동차로 가면 15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고위 관리로서, 배교하면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을 성인도 결국 쉽고 빠른 길이 아닌 하느님을 향한 고난의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순례길은 성인의 삶을 닮은 듯하다.

 

- 순례길 약도.

 

 

성당을 떠나온 지 45분 가량 지나자 안골공원 입구가 나온다. 도심을 벗어나 접어든 산은 눈과 귀, 더 나아가 온몸의 감각을 즐겁게 만든다. 화려한 단풍과 등산객들의 색색 옷들이 눈을 즐겁게 하고, 낙엽을 밟는 느낌과 온몸을 스치는 바람, 그윽한 솔잎향까지….

 

그리 험하지 않은 산세와 산 곳곳에 등산객 안전을 위해 설치한 나무계단, 안전망까지 북한산 국립공원답게 찾는 이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고맙기만 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신갈나무'라는 명찰을 단 나무들이 보인다. 잎이 넓은 나무로, 짚신바닥이 해어지면 이 나무 잎을 깔았다고 해서 이름이 신갈나무라고 한다. 신앙 선조들도 이 나뭇잎을 자주 애용했으리라.

 

이것저것 둘러보며 오르다 보니 어느새 사패산 정상에 다다랐다. 웬만한 집터보다 큰 평평한 바위로 이뤄진 정상에 서니 온 세상이 발 아래로 보인다. 성냥갑만한 집들에 개미처럼 보이는 차량 물결…. 세상살이 부질없다는 소리는 산 정상에 오른 사람 입에서 나온 말이지 싶다.

 

정상에서 간식거리로 가볍게 배를 채운 뒤 원각사를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평소 하지 않던 등산을 해서인지, 여기저기가 쑤셔온다. 몸이 지쳐갈 무렵 등산로를 약간 벗어난 곳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산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이룬 샘이 눈이 시릴 정도로 맑고 투명하다. 여름이면 발이라도 담글 텐데, 일찍 찾아온 추위가 야속하다.

 

- 성 남종삼 묘역.

 

 

산 중턱에 있는 원각사를 지나자 큰 도로가 나온다. 남종삼 성인 묘소는 여기서 30분쯤 더 가면 된다. 차들이 굉음을 내며 달리는 찻길을 100미터 가량 지나 '야외조경'이라는 간판을 보고 샛길로 접어들자 다시 한적한 시골길이다.

 

길눈이 어두워 헤매며 걷다 보니 주교좌성당을 나선 지 벌써 4시간째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더니 지치고 춥고 배까지 고프다. 투덜대기도 잠시, 저 멀리 성인이 잠든 천주교 길음동교회 묘원이 보인다.

 

묘역 제일 위쪽이 남종삼 성인과 그 가족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제법 경사가 가파른 길이라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진다. 세상을 떠난 수많은 교우가 잠든 이곳에서 살아 움직이는 건 나 하나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한순간이구나"라는 생각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이렇게 오랜 시간을 걸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순례길 종착지인 성인 묘소 앞에 서니, 묘원 입구 가게에서 하얀 국화꽃이라도 한 송이 사올 걸 하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든다. '배교한다'는 그 한마디를 하지 않아 하나뿐인 목숨을 버린 남종삼 성인과 그 가족. 세상에 어느 가족 3대가 이렇게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을까. 성인은 순교 20년 후인 1885년 조정의 조처로 죄를 벗었고, 약 100년 후인 1984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인을 위해 잠시 기도를 드렸다. 우리가 성인을 위해 기도하는 것처럼 성인도 하늘나라에서 가족과 함께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마음이 흐뭇해진다. 그러고 보니 11월 위령성월이다.

 

[평화신문, 2010년 11월 21일, 백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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