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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40: 10세기 (3)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가톨릭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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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9-03 ㅣ No.1018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40) 10세기 ③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가톨릭 교회


양날의 검된 황제권, 교회 시름도 깊어져

 

 

-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

 

 

가톨릭 교회 수호자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관련해선 대표적으로 두 인물이 있습니다. 한 명은 800년 교황 레오 3세(Leo PP. III, 재임 795~816)가 황제로 임명한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Charlemagne, 황제 재위 800~814)이고, 또 다른 한 명은 962년 교황 요한 12세(Ioannes PP. XII, 재임 955~964)가 황제로 임명한 작센 왕조의 오토 1세(Otto I, 황제 재위 962~974)입니다. 교황은 세속 권력자에게 황제 관을 수여하며 교회의 수호자 역할을 하길 바랐지만, 교회의 기대와는 사뭇 다른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교황권 위에 군림하려 했던 황제권

 

8세기 동로마 비잔틴 제국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서방 교회는 프랑크 왕국을 눈여겨보았습니다. 프랑크 왕 샤를마뉴는 랑고바르드 왕국을 정복하고 영토 일부를 교황령에 편입시켰습니다. 샤를마뉴는 779년 습격을 받은 교황 레오 3세를 자신의 야영지로 피신시켰다가 교황과 함께 로마로 입성했습니다. 결국 800년 교황 레오 3세는 대관식을 치러 샤를마뉴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임명했습니다. 샤를마뉴는 올바른 교리가 정착되고, 선교 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지며, 수도 생활을 개선하도록 지원하면서 교회의 기대에 부응했습니다.

 

샤를마뉴가 813년 공동 황제로 선포했던 경건왕 루도비쿠스(Ludovicus Pius, 황제 재위 814~840)는 814년 선왕이 사망하자, 로마 황제를 계승했습니다. 샤를마뉴가 실천했던 교회 쇄신 운동을 이어간 루도비쿠스는 성당과 수도원 및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에 토지를 제공하고 면세 혜택을 줬으며, 심지어 성직자와 성직자의 지인을 요직에 등용했습니다. 루도비쿠스는 한때 황제권을 교황권 위에 두고 교회를 간섭하려 했으나, 정치ㆍ사회 문제에 대한 교황권을 수용했습니다.

 

817년 경건왕 루도비쿠스가 공동 황제로 선포했던 로타르 1세(Lothar I, 황제 재위 840~855)는 840년 루도비쿠스가 사망하자, 단독 황제로 제국 전체를 통치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843년 베르뎅(Verdun) 조약에 의해 로타르 1세는 중 프랑크 왕국만 통치할 수 있었고, 동ㆍ서 프랑크 왕국에선 명목상 황제일 뿐이었습니다. 로타르 1세는 이미 이탈리아 왕 시절에 선왕과 함께 황제권 강화 정책을 펼쳐 서방 교회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로타르 1세와 공동 황제였던 루도비코 2세(Lu dovico II, 황제 재위 855~875)는 855년 선왕이 은퇴하자, 교황 레오 4세(Leo PP. IV, 재임 847~855)에 의해 단독 황제가 되었습니다. 교황 베네딕투스 3세(Benedictus PP. III, 재임 855~858)가 대립 교황과 갈등을 겪던 시절 오히려 교황권의 영향력이 감소되자 루도비코 2세는 교황 니콜라우스 1세(Nicolaus PP. I, 재임 858~867)와 교황 하드리아누스 2세(Hadrianus PP. II, 재임 867~872) 때 다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루도비코 2세는 재위 시절 내내 사라센인의 침공과 자신의 로마 황제직에 대한 동로마 비잔틴 제국 황제의 거부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에 교황 하드리아누스 2세는 872년 루도비코 2세에게 다시 황제 대관식을 치러줬습니다.

 

루도비코 2세가 875년 사촌 카를로만(Carlo man, 820/828~880)을 차기 황제로 지명하고 사망하자, 서 프랑크 왕 샤를 2세(Charles II, 황제 재위 875~877)는 즉시 로마로 들어가 로마 황제직을 차지했습니다. 교황 요한 8세(Ioannes PP. VIII, 재임 872~882)는 샤를 2세에게 대관식을 치러줬습니다. 877년 샤를 2세가 사망하자, 카를로만은 다시 로마 황제가 되려고 시도했으나 교황 요한 8세가 대관식을 거부, 목적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동 프랑크 왕과 이탈리아 왕이었던 샤를 3세(Charles III, 황제 재위 881~888)는 881년 교황 요한 8세에 의해 카롤링거 왕조의 마지막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었습니다. 교황 요한 8세는 교황령을 자주 침범하는 귀족들을 막아 주고 신심이 깊으며 사심이 없었던 샤를 3세를 평소 눈여겨보고 서슴없이 황제 관을 수여했습니다. 오랜만에 교황과 좋은 관계를 복원했던 샤를 3세는 분열됐던 프랑크 왕국을 자연스럽게 재통일하고 단독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888년 샤를 3세가 사망하면서 카롤링거 왕조는 붕괴됐습니다. 그동안 대부분 황제는 교회 수호보다는 교회에 대한 황제권 우위를 주장했습니다.

 

작센 왕조의 오토 1세.

 

 

권력의 상징으로 악용된 황제권

 

이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직위는 이탈리아 및 독일의 군주나 귀족이 차지했습니다. 스폴레토의 귀족이었던 귀도 3세(Guido III di Spoleto, 황제 재위 889~894)는 889년 교황 스테파누스 5세(Stephanus PP. V, 재위 885~891)에 의해 이탈리아의 왕으로 즉위하고 891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대관식을 치렀습니다. 귀도 3세는 892년 교황 포르모수스(Formosus PP, 재위 891~896)에게 압력을 행사해 아들 람베르토 2세(Lamberto II di Spoleto, 황제 재위 894~896)를 공동 황제로 임명할 것을 요청했으나 교황 포르모수스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894년 귀도 3세가 사망하자 람베르토 2세는 로마 황제를 계승했지만, 896년 교황 포르모수스는 그를 폐위시켰습니다. 이후 람베르토 2세는 교황 스테파누스 6세(Stephanus PP. VI, 896~897)와 함께 교황 포르모수스를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그의 조처를 무효화시켰으나, 교황 요한 9세(Ioannes PP. IX, 재임 898~900)가 그를 복권시키자 898년 제국 의회를 소집해서 자신이 로마 황제임을 끝까지 주장했습니다.

 

동 프랑크 왕 아르눌프(Arnulf, 황제 재위 986 ~899)는 교황 포르모수스의 요청으로 교황령을 침범한 스폴레토 귀족 가문과 전쟁을 치렀습니다. 교황 포르모수스는 896년 람베르토 2세를 대신해 아르눌프를 로마 황제로 임명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중풍에 걸린 아르눌프는 독일로 돌아가 899년 사망했습니다.

 

프로방스 왕이었던 루트비히 3세(Ludwig Ⅲ, 황제 재위 901~905)는 900년 이탈리아를 침략한 마자르족을 물리쳐 달라는 귀족들의 요청으로 원정을 나섰습니다. 901년 로마에 도착한 루트비히 3세는 교황 베네딕투스 4세(Benedictus PP. IV, 재임 900~903)에 의해 로마 황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여곡절을 겪고 905년 이탈리아 왕 베렌가리오 1세(Berengario I, 황제 재위 915~924)에 의해 장님이 돼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 로마 황제임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오래전부터 로마 황제 직위를 원했던 베렌가리오 1세가 915년 교황 요한 10세(Ioannes PP. X, 재임 914~928)의 요청으로 이탈리아 남부를 침략한 사라센인을 물리치자, 교황은 그를 로마 황제로 임명했습니다. 하지만 귀족들과의 분쟁에서 무리하게 마자르족을 용병으로 기용한 것이 화근이 돼 924년 살해당했습니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직위는 사실상 38년간 공석이었습니다. 그동안 로마 황제 직위는 세속 권력자가 자신의 권력을 세상에 드러내는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독일 왕과 이탈리아 왕이었던 오토 1세는 이탈리아 왕 베렌가리오 2세(Berengario II, 재위 950~961)에게 핍박을 받던 교황 요한 12세의 요청으로 이탈리아에서 베렌가리오 2세를 격파했습니다. 이에 교황 요한 12세는 오토 1세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임명했습니다. 이때 오토 1세는 교황과 조약을 맺는데, 교황청의 세속에 대한 권한을 인정하면서도 황제권이 교황 선출에 대한 인준 권한을 갖도록 조처했습니다. 물론 오토 1세가 교회가 선교 활동을 수월하게 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임명이라는 교황의 계획은 세속 권력자가 교회 내정에 깊이 관여하는 상황을 만들면서 영성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9월 3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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