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6일 (수)
(녹)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강론자료

2013-1215.....대림3주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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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3-12-17 ㅣ No.1422

대림 3 주일 (가해)

이사야 35,1-6.10 야고보 5,7-10 마태오 11,2-11

2013. 12. 15. 등촌3

주제 : 하느님이 오시는 때에....

신앙인으로 사는 사람들이 가질 삶의 목표는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을 우리가 갖는 목표라고 말한다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러 가야하는 것일까요? 두 가지에 별로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법한 것이 첫 느낌일 수도 있지만, 이 두 가지 표현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방법이나 저런 방법이나 하느님을 만난다는 목표에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처럼 표현이 다르다면 방법에도 차이가 있을 것인데, 이때 우리가 선택하고 가져야 하는 옳은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오늘은 전례력 가해의 새해에, 예수님의 강생을 기다리며 맞이하는 대림3주일입니다. 대림3주일을 지내는 오늘부터 성탄절로 정해진 날짜까지는 열흘 정도 남았습니다. 우리가 이 열흘 정도 남은 기간에 어떤 생각과 자세를 가지면, 올해 성탄절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축제일로 기억에 남겠습니까? 한번 경험하는 특별한 기억이 우리인생에 남은 삶을 기간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직 다가오지 않은 성탄절에 대한 자세들이 모여서 우리의 삶을 이룬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분명히 중요한 일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광야에서 움직였던, 세례자요한을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고, 여자에게서 태어난 인물들 가운데서 가장 큰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소리를 들을 때, 그 말을 어떤 사람이 했는지, 어떤 자격을 갖춘 사람이 그렇게 말했는지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오늘 들은 말씀의 초점은 제일 끝에 있다고 생각해야합니다. 그 말씀은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세상에서 큰 사람이라는 광야의 예언자보다 큰 사람이라는 선언입니다.

 

우리가 사용한, 크다거나 작다고 비교하는 이 표현은 상대적입니다. 지금은 가장 크다고 하는 사람이 내일 이 순간에도 큰 사람으로 남을 수 있는지 그것은 모를 일이지만, 우리가 걱정할 것은 내일 일어날 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순간에 관한 일이어야 할 것입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잘 먹고 잘 사는 것, 편하고 좋은 것을 누리고 사는 것을 바랄 것입니다. 특별히 이렇게 사는 일에 반대로 사는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오늘 복음에 등장한 세례자요한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그에게 그렇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없었는지, 아니면 그가 선택하지 않은 삶이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에게 허락되지 않은 이런 모습을 보면서, 세상에서 예언자의 삶을 살겠다고 나설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할 수도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 수 있느냐고 제가 스스로 하는 질문에, 달리해석한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그 좋은 본보기를 따라 살 다른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게 여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그런 사람들의 무리에 속해 있느냐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지내는 이 대림절기간이 가진 중요한 의미를 우리는 놓치고 사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대림절 시기를 다 지내고 나면, 우리는 예수님의 성탄을 맞이할 것입니다. 정해진 시간에 따라서 그렇게 지내겠지만, 그 기쁨의 시간에 내가 함께 할 준비를 하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대답이 쉽지는 않습니다. 대답이 쉽지 않다는 얘기는, 이사야예언자가 선포하는 것처럼, 메마른 땅과 사막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가능성이 세상에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세상에서 저마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산다고 말할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가고 있는 길과 내가 하는 생각하는 것만이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하는 생각과 삶의 자세와는 타협할 줄 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이어서 그렇지, 자신감을 드러내고 사는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세상에는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만 사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가장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면, 나보다 더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은 과연 없을까요? 또 내가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면, 세상에는 나보다 똑똑하지 못하고 나보다 현명하지 못한 사람도 있어야 내가 빛을 낼 수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뛰어난 자세를 드러내고 산다는 나의 삶에도 하느님께서 움직이실 만한 자리는 만들고 있는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움직이실 만한 자리를 지금부터 완벽하게 구비해놓은 사람이 우리 성당에는 얼마나 있을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걸 아는 것이 중요한 일도 아닙니다. 바로 내가 그 사람이라는 보장이 없다면, 바로 내가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숫자가 많든지 적든지 그것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각자는 그런 사람의 무리에 들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겠습니까?

 

세상에서 목숨을 유지하고 사는 것은 누구나 다하는 일입니다. 태어나기만 하면 누구나 다 삽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평균수명인 75년이나 80년 혹은 90년을 세상에서 살았다고 하더라도 누구나 다 똑같은 결실을 맺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참으로 묘한 일입니다.

 

해마다 맞이하는 성탄절이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고, 해마다 지내는 이 대림절이 우리 삶을 드러내는 기회가 되게 하려면, 어떤 자세가 필요하겠습니까? 우리가 가진 믿음을 생각으로만 갖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야고보사도는 세상 삶에서 우리가 드러내야 할 자세를 인내(忍耐)라는 말로 강조하십니다. 농부가 소출을 기다리는 자세처럼,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일에도 성급함이나 조급함이 아니라 참고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드러낼 올바른 인내의 자세는 과연 어떤 것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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