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6일 (수)
(녹)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강론자료

2013-1208.....대림2주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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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3-12-16 ㅣ No.1421

대림 2 주일 (가해)

이사야 11,1-10     로마 15,4-9     마태 3,1-12

2013. 12. 8. 등촌3

주제 : 하느님이 오시는 때에.....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고 맞이하는 대림2주일입니다. 대림시기가 의미가 있는 것은 전례규정에 따른 4주간을 지내고 나서 성탄절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탄절(聖誕節)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이었던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시고, 우리를 하느님께 초대하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몸소 사람들에게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나신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기쁜 때이기에, 대림절을 지내는 마음은 보통 때와 갖는 마음과 자세가 달라야 할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맞이하는 수동적인 의미의 성탄절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하느님의 방문에 올바른 준비를 하면서 이 시간을 보내자는 것이 교회에서 정한 대림시기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바꿔 말해서, 우리가 어떤 준비를 하든지 성탄절은 우리에게 온다는 것이지만, 이왕이면 올바른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 교회공동체에서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 들은 마태오복음말씀에서, 세례자요한은 유대광야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 앞에 나타나시기 전,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분을 맞아들일 올바른 준비가 무엇인지를 선포합니다. 지금 당장 우리 앞에서 세례자요한이 외치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가 세례자요한의 선포를 대하는 자세는 세상에서 누리는 경제적인 풍요의 차이만큼이나 다를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오실 주님의 길을 준비해야 한다는 세례자요한의 선포를 여러분은 어떻게 알아들으십니까? 이 자리에는 세례자요한의 선포를 내 삶에 적용할 심각한 소리로 알아들을 사람도 있고, 그저 귀찮고 시끄러운 소리의 하나로 치부하면서 귀를 막고 싶은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자세가 옳고 어떤 자세가 부족하다고 말해주는 것은 이미 다른 사람의 생각이 들어간 것이니, 의미는 없을 일입니다. 자기 몸으로 실천할 올바른 자세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 누가 무어라고 한다고 해도, 그는 자신이 가진 좋고도 훌륭한 자세를 버리지 않을 것이고, 부족한 자세를 갖고서도 자기의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 상황을 바꾸어야 한다는 제가 하는 몇 마디 말에 갑자기 완전하고도 충만한 자세로 돌아설 것도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귀에 그런 소리가 들려오는 이 순간 나는 하느님의 뜻이 담긴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삶의 모양과 결과가 달라질 거라는 소리를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세례자요한의 선포는, 우리에게 오실 하느님을 맞아들일 마음의 준비에 관한 것입니다. 세례자요한의 선포를 많은 사람들이 두려운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드러내는 자세를 보면서, 세례자요한은 그들이 드러내는 자세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합니다. 세례자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화를 낸 것은 아니었지만, 세례자 요한이 화를 낸 대상에 우리는 속하는지 개인적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그가 화를 낸 대상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들을 상대로 하느님의 뜻을 알려주면서 실천할 방법을 교육했던 자들이었고,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보다는 로마제국의 지배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정치적인 지도자로 활동했던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올바르게 변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백성인 공동체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는데, 세례자요한은 이들이 자기에게 오는 모습에서 삶의 진정성(眞情性)을 보지 못했기에 그들을 향해서 좋은 소리보다는 험산 소리를 먼저 합니다.

 

하느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때에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강림은 2000년 전쯤, 로마제국의 한 부분이었던 히브리민족이 공동체를 이루어 살던 땅에 오셨고, 언젠가 다시 오시겠다고 예고하셨습니다. 두 번째의 재림은 어디에서 이루어질지 아는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 불확실한 예고가 자신을 재림예수로 사칭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만, 이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세례자요한은 주님이 오실 길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고, 사람들은 그 선포를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는 일로 드러냈습니다. 물론 바리사이와 사두가이파 사람들처럼 돌아서기가 힘들 만큼 멀리 나간 사람도 있었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남들에 대한 비난은 접어두고, 우리는 어떻게 모습을 드러내야 하겠습니까?

 

이사야예언자가 전하는 하느님이 오시는 때는 아주 심각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때였습니다. 물론 그것도 넋을 놓고 사는 사람에게나 그렇다는 것입니다. 메시아께서 오시는 때는 세상의 모든 만물이 서로 화해를 하는 때라는 상상이 섞인 소리를 이사야예언자는 선포합니다. 이러한 선포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언제 가능하겠습니까? 사람끼리도 화해를 이루는 것은 아주 먼 세상이 되어버린 우리나라의 경우, 동물과의 화해는 언제나 가능하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사람끼리의 세상부터 좋은 모습으로 변화시킨 다음에 가능한 일일 텐데, 그것을 먼저 이룰 생각은 없이 사람을 넘어선 다른 동물들과 만드는 진정한 평화는 멀고도 먼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을 지식으로 아는 것과는 달리,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올바른 길을 가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그 영광 안에서 우리도 같은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사는 방법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내가 영광을 누리고 싶다면, 그 같은 영광을 내 곁에 머무는 다른 사람에게 먼저 줄 수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내가 상대방에게서 같은 것을 먼저 받고 나서, 나중에 주겠다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그 세상에서 살 자격을 영원히 갖추지 못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 우리가 남들에게서 바라는 것만큼, 우리가 먼저 다른 이들을 위해 변화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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