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강론자료

2013-0224...사순2주일...다해

스크랩 인쇄

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3-02-23 ㅣ No.1342

사순 제 2 주일 (다해)

창세기 15,5-12.17-18         필리피 3,17-4,1       루카 9,28-36

2013. 2. 24. 등촌3

주제 : 하느님의 선택(?)과 인간의 응답(!)

사람이 세상에서 잘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 말이 옳은 말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이라는 말과 잘 산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 의미를 먼저 규정해야 하는 일이겠습니다만, 일반적인 개념을 적용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2008년부터 시작된 세계의 경제위기에서는, 아직 벗어날 줄 모르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고, 물가는 날이 갈수록 오른다고 하고, 들어오는 돈은 늘어나지 않는데, 써야 할 곳은 자꾸만 늘어나고.....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우리가 지금의 모양을 유지하면서 살고 있는 것도 신기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앞서 말씀드린 그런 고통과 힘겨움의 순간을 이겨내지 못하고,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에서 자살자가 가장 많은 국가라는 서글픈 소리도 있습니다만, 문제를 뻔히 보면서도 해결방안을 찾지 못하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그 일에서 탈출하겠습니까? 이런 모습은 세계경제 규모 11위나 14위 국가가 보일 수 있는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 이런 현상을 우리를 먹고 살게 해준다는 모습으로 포장하는 돈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요?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그 방법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겠습니까?

  오늘은 사순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현실의 고통을 넘을 수 있는 방법을 말하는 희망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 모두 다 그 희망의 얘기를 들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오늘 미사에 나온 사람들만 들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택을 받아 역사적인 현장인 타보르(Tabor) 산에 올라갔던 사도도 12명 가운데서 3명이라는 데에 아쉬움이 있고, 그들도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가까이에 두고 졸았다는 사실이 더 아쉬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3명의 제자들만 데리고 타보르 산에 가셨을까 하고 질문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모습에서 예수님의 의도를 생각해봐야 할 일입니다.

  권리를 먼저 생각할 때에,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소리를 합니다. 저도 그런 소리를 말하는 때가 있기는 합니다만, 그 말이 항상 옳은 얘기는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에게 찾아오는 삶의 대가는 그가 자신의 몸을 움직여 참여하는 일, 그가 실제로 애쓰는 만큼에 따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거나, 올바른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사람이라면 같은 대우를 받을 수도 없고, 같은 대우를 받아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에서 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일을 하면 그 영광을 내 몸으로 체험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에는 예수님의 선택과 영광스러운 모습에 대한 이야기만 나왔지, 어떻게 하면 그렇게 선택될 수 있는지에 대한 말씀은 없습니다. 이에 관한 것을 질문한다면, 그 대답은 어디에서 찾거나 들을 수 있겠습니까?

  칼데아 우르에 살던, 아브람을 하느님은 특별한 이유도 없이 선택하셨고, 그에게 하늘의 별처럼 많은 수의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한 자신을 부른 하느님을 아브람은 믿었다고 창세기는 기록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기준에 맞추어 송아지와 염소와 숫양, 비둘기 2마리를 제물로 바칩니다. 별다른 이론도 없습니다. 아브람은 하느님의 말씀에 딴청을 피우지도 않고, 반항을 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바친 제물이므로, 인간적으로는 졸음이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성을 깃들입니다.

  특별한 선택을 받았던 3명의 제자에게서 예수님은 이러한 아브람의 모습과 비슷한 것을 보셨는지 우리가 알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네들도 흔히 사람을 대할 때, 다가오는 첫 인상에서 좋거나 나쁘거나 계속 관계를 맺을 사람인지 결정을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의도적으로 드러내려고 하지 않아도, 선한 사람에게서는 선한 향기가 나는 법이고, 자기 이익만 챙기려는 사람은 전혀 아닌 것처럼 잘 포장해도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 앞에 다가서려는 나의 자세는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이것은 남이 아니라 내 자신, 나 스스로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정확하게 아는 일입니다.

  우리가 세상일들 가운데서 우리의 생각대로 선택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사는 사람이어야 하겠습니까? 이에 필요한 조건은 그저 세례를 받았고, 과거 한때는 아주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했다(!)’말하는 자신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판단하는 내 모습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하는 개인중심이고 이기적인 마음자세가 함께 할 테지만, 하느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실 때, 그 자세뿐이라면 뭔가 아주 많이 부족한 자세일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선택하게 해주시거나, 우리가 그에 합당한 자세로 살고 싶다면, ‘그리스도께서 보듬어 안으셨던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서는 곤란한 일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산다면, 십자가에 맞서 덤비는 자세로 산다면 그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자기 삶의 멸망일 뿐입니다.

  바오로사도는 필리피에 살던 사람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특별히 강조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어떻게 산 사람이겠습니까? 그에 삶에 관한 것도 배우고 익혀서, 교황님께서 강조하신 신앙의 해에 일치하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

***** 본당 인터넷 홈피, 자료실, <사목자료실> 자리에 *****

1) 바오로사도에 대해 더 잘 알기를 원하는 사람은 링크해놓은 주소를 이용-영화를.



65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