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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제35차 세계 평화의 날 교황 담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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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goodnews] 쪽지 캡슐

2001-12-19 ㅣ No.42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2002년 제35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정의가 없으면 평화도 없고 용서가 없으면 정의도 없다"

 

 

1. 올해 세계 평화의 날은 지난 9월 11일의 비극적 참사의 그늘에서 거행되고 있습니다. 그 날 끔찍한 범죄가 저질러졌습니다. 그 짧은 순간에 여러 인종 배경을 지닌 수천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어갔습니다. 그 날 이후 전세계 사람들은 인간 개인의 철저한 나약함과 미래에 대한 새로운 공포를 느끼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심리 상태 앞에서, 죄악의 신비 곧 악이 인간사의 최후 승리자가 될 수 없다는 확신으로 교회의 희망을 증언합니다. 성서에서 이야기하는 구원의 역사는 세계의 모든 역사에 밝은 빛을 비추며, 모든 인간사에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섭리가 언제나 함께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가장 완고한 마음까지도 움직이시며 완전히 불모지처럼 보이는 곳에서도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실 수 있습니다.

 

2002년을 시작하는 교회를 떠받쳐 주는 힘은 바로 이 희망입니다. 그것은 죄악의 힘이 다시 득세한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이 결국에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간의 가장 고귀한 열망이 승리하는 세상으로, 참 평화가 넘치는 세상으로 변화될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평화는 정의와 사랑의 작품

 

2. 저는 방금 말씀 드린 살륙을 비롯한 최근의 사건들을 지켜보면서, 제 마음 깊은 곳에서 자주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됩니다. 특히 젊은 시절 제 삶에 영향을 미쳤던 역사적 사건들을 기억할 때에 그렇습니다.

 

저는 나치와 공산 전체주의 아래 제 친구들과 친지들을 포함하여 여러 민족들과 개인들이 겪은 엄청난 고통을 잊어버린 적이 없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제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는 물음, 곧 이토록 가공할 폭력에 휘둘린 도덕 질서와 사회 질서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하는 물음을 저는 자주 숙고하여 왔습니다. 제가 심사숙고한 끝에 이르게 된 확신은, 성서의 가르침으로도 확인되듯이, 정의와 용서를 겸비한 대책이 아니면, 무너진 질서를 완전히 회복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 평화의 두 기둥은 정의와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3. 그러나 현재의 상황에서, 정의와 용서가 평화의 원천이며 조건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기가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말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기가 어려운 것은 정의와 용서는 양립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원한과 보복에 대립되는 것이지 정의에 대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참 평화는 "정의의 작품입니다"(이사 32,17 참조).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말한 대로 평화는 "인간 사회의 창설자이신 하느님께서 심어 놓으신 그 질서의 열매, 또 언제나 더 완전한 정의를 갈망하는 인간들이 행동으로 실천하여야 할 사회 질서의 열매입니다"(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78항). 가톨릭 교회는 1500여 년 동안 히포의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평화에 대한 가르침을 되풀이하여 왔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 세상에 세울 수 있고 세워야 하는 평화는 올바른 질서의 평화, 곧 평화로운 질서라고 상기시킵니다([신국론], 19.13).

 

그러므로 참 평화는 정의의 열매입니다. 정의는 권리와 책임에 대한 온전한 존중을, 또 이윤과 부담의 공정한 분배를 보장하는 윤리 덕이며, 법률적 보증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정의는 언제나 깨어지기 쉽고 불완전하며 개인과 집단의 이기주의와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용서가 따라야 하며, 용서를 통해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용서는 뒤틀린 인간 관계를 근본부터 고쳐주고 다시 세워줍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든 더 나아가 국제적인 차원에서든 크고 작은 모든 상황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용서는 결코 정의와 대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용서가 잘못된 일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성까지 눈감아준다는 말은 아닙니다. 용서는 오히려 충만한 정의입니다. 용서는 적대 행위의 잠정적인 중단을 훨씬 더 넘어서는 저 평화로운 질서로 이끌어주며 인간의 마음 속에 곪아 있는 상처를 밑바닥까지 치유하여 줍니다. 정의와 용서는 둘 다 그러한 치유에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이 담화에서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두 가지 차원의 평화입니다. 올해 세계 평화의 날은 온 인류가, 특히 국가 지도자들이 세계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는 중대한 문제들, 특히 조직적인 테러 행위라는 새로운 차원의 폭력 앞에서 정의의 요구와 용서에 대한 촉구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테러 행위의 실상

 

4. 오늘날 국제 테러 행위의 공격 대상은 바로 정의와 용서에서 비롯되는 평화입니다. 특히 냉전 종식 이후 최근의 테러 행위는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으로 공모하는 교묘한 조직망으로 발전해 왔고, 국경을 넘어 온 세계에 퍼져 있습니다. 치밀하게 조직된 테러 집단들은 막대한 재원에 의지하여 광범위한 전략을 펼쳐, 자신들이 추구하는 목적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킬 수 있습니다.

 

테러 조직들이 무방비 상태의 양민들을 겨냥할 무기로 자기네 대원들을 이용할 때에, 죽음을 바라는 마음이 그들 안에 팽배해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테러 행위는 증오심에서 나오며, 고립과 불신과 폐쇄를 낳습니다. 폭력이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다음 세대들에게까지 계속되면서 이전 세대들을 분열시켰던 증오심을 모든 사람이 물려받습니다. 테러 행위는 인간 생명의 경시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테러 행위는 극악한 범죄입니다. 이는 또한 정치적 군사적 수단으로 테러 행위에 의존하기 때문에, 참으로 그 자체가 인류에 대한 범죄입니다.

 

5. 그러므로 누구나 테러 행위에서 자신을 지킬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권리는 어디까지나 목적과 수단의 선택에서 도덕적 법률적 한계를 존중하면서 행사하여야 합니다. 범죄자는 분명히 밝혀 내어야 합니다. 범죄의 책임은 언제나 개인적인 것이므로 테러 분자들이 소속되어 있는 국가나 민족, 종교로 그 책임을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반테러 투쟁을 위한 국제 협력에는 테러 분자들이 그러한 계획을 품게 만드는 억압과 소외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용기 있고 단호한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 노력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사실 오랜 기간 동안 권리가 짓밟히고 불의가 묵인되는 상황에서는 테러 분자들을 모집하기가 더욱 쉽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불의가 결코 테러 행위를 정당화하는 구실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강조하여야 합니다. 또한 테러 행위의 목적대로 질서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을 때 그 희생자는 누구보다도 국제 연대의 붕괴에 대처할 위치에 있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임을 유의하여야 합니다. 곧 이미 생존의 비좁은 변두리에서 근근히 살아가며 전세계적인 경제적 정치적 혼돈의 영향을 가장 심하게 받는 저개발국의 국민들인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테러 분자들의 주장은 명백한 거짓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지 마라!

 

6. 테러 행위로 살인을 하는 사람들은 사실 인간성과 인생과 미래에 절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모든 것이 증오와 파괴의 대상입니다. 테러 분자들은 그들이 믿는 진리나 그들이 겪는 고통이 무고한 생명까지도 희생시키며 벌이는 자신들의 저항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절대적이라고 주장합니다. 테러 행위는 흔히 자신의 진리관을 다른 모든 사람에게 강요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생기는 광신적인 근본주의의 소산입니다. 제한적이고 불완전하게나마 진리를 전파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반영하는(창세 1,26-27 참조) 인간 양심을 존중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제시할 수 있을 뿐이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람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진리로 여기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폭력으로 강요하려는 행위는 인간의 존엄성에 위배되며,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 당신 모습을 새겨주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흔히 근본주의로 일컬어지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철저히 대립되는 태도입니다. 테러 행위는 인간만을 부당하게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도 부당하게 이용합니다. 결국 테러 행위는 하느님을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이용하는 우상으로 만들고 맙니다.

 

7. 그러므로 어떤 종교 지도자도 테러 행위를 묵과해서는 안 되며, 선동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신을 테러 분자로 선언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종교에 대한 모독입니다. 테러 분자들의 폭력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돌보시며 사랑하시는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 반대되는 것이며,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도 대립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소서."(마태 6,12) 하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범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자비를 베푸는 것은 곧 우리 삶의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으니(1요한 4,7-12 참조) 우리도 자비를 베풀 수 있으며 또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역사 안에 들어오시고, 성금요일의 수난사를 통하여 부활의 승리를 준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자비와 용서의 하느님이십니다(시편 102[103],3-4.10-13 참조).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음식을 나누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가를 배워라.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를 받아 구세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제자들은 언제나 자비와 용서를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용서의 요구

 

8. 그러나 용서의 참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왜 용서하여야 합니까? 용서를 성찰할 때 이러한 물음을 회피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1997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용서를 베풀고 평화를 얻으십시오.")에서 말씀 드렸던 것을 상기하면서, 저는 용서가 사회적 실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용서가 자리잡아야 한다는 것을 재확인하고자 합니다. 윤리와 용서의 문화가 지배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사회적 태도와 법률로 나타나는 용서의 '정치'를 희망할 수 있으며, 이러한 용서의 '정치'를 통하여 정의는 더욱더 인간적인 모습을 띠게 될 것입니다.

 

용서는 무엇보다도 악을 악으로 갚고자 하는 자연적 본능을 억누르는 개인의 선택이며 마음의 결단입니다. 그러한 결단의 기준은 죄인인 우리를 당신께 이끄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34) 하고 기도하신 그리스도의 용서야말로 완벽한 본보기입니다.

 

그러므로 용서의 원천과 기준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렇다고 인간 이성의 빛으로 용서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경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잘못한 사람은 자신의 인간적인 나약함을 경험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너그러이 대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바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해 주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모든 인간은 자신의 실수와 잘못 안에 영원히 갇혀 있지 않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습니다. 모든 인간은 눈을 들어 미래를 바라보며 믿고 노력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싶어합니다.

 

9. 그러므로 온전히 인간적인 행위인 용서는 무엇보다도 개인의 결단입니다. 그러나 개인은 본질적으로 관계의 구조 안에 있는 사회적 존재이고, 좋게든 나쁘게든 그러한 관계를 통해서 자신을 표현합니다. 따라서 사회에도 용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가정, 집단, 단체, 국가 그리고 국제 공동체가 끊어진 유대를 새롭게 하고, 서로를 비난하는 각박한 현실을 타개하며, 호소할 데 없는 이들을 차별하려는 유혹을 물리치려면 용서가 필요합니다. 용서할 수 있는 역량은 정의와 연대를 특성으로 하는 미래 사회상의 기초입니다.

 

반대로, 용서를 하지 못하고 갈등이 지속될 때, 이는 인간 발전에 막대한 손실을 입힙니다. 많은 자원이 발전과 평화, 정의가 아니라 무기를 위하여 쓰이고 있습니다. 화해의 실패로 인류는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고, 용서의 실패로 발전은 그만큼 지연됩니다. 평화는 발전의 본질 요소이며, 참 평화는 오로지 용서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용서는 왕도

 

10. 용서는 즉시 이해할 수도, 쉽게 받아들일 수도 없는 제안입니다. 여러 면에서 그것은 역설적인 메시지입니다. 사실상 용서는 실질적인 장기간의 이익을 위하여 표면적인 단기간의 손실을 감수합니다. 폭력은 정반대입니다. 표면적인 단기간의 이익을 선택함으로써 실질적이고 영구적인 손실을 입습니다. 용서는 나약해 보이지만, 용서를 해주거나 받을 때 커다란 정신적 힘과 도덕적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떤 면에서 용서는 우리를 위축시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인간성을 더욱 충만하고 풍요롭게 하며, 창조주의 광채로 더욱 빛나게 합니다.

 

복음에 봉사할 직무를 받은 저로서는 용서의 필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러한 직무에서 용기를 얻습니다. 저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그리고 세계 모든 민족들의 관계에서 인간 정신이 널리 되살아나도록, 이번 주제에 대하여 진지하고 깊이 있는 성찰을 하게 하려는 바람에서 오늘 다시 한 번 용서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11. 용서에 대하여 성찰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불화의 원인인 뿌리깊은 증오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듯한 개인적 집단적 비극을 양산하는 몇몇 갈등 상황들에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 저는 특별히 하느님과 인간이 만난 복된 땅, 평화의 임금님이신 예수님께서 생활하시고 돌아가셨다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거룩한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혼란한 국제 정세는 긴장의 고조와 완화를 반복하면서 현재까지 50년 이상을 끌어 온 아랍 민족들과 이스라엘 민족의 분쟁을 해결하도록 더욱 강력히 촉구하게 합니다. 끊임없이 테러 행위와 전쟁에 의존함으로써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양편 모두의 희망을 앗아가고 있는 이러한 현실은 결국 협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정의와 화해를 이루려는 의지만 있다면 또 그러한 의지가 있을 때, 양편의 권리와 요구가 적절히 고려될 수 있고 공정하게 균형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저는 거룩한 땅에 사는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상호 존중과 건설적인 화합의 새 시대를 위하여 일해 주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종교간 이해와 협력

 

12. 이러한 모든 노력에서, 종교 지도자들은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여러 교파들과 세계의 대종교들은 테러 행위의 사회적 문화적 원인을 제거하는 데 협력하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인간의 존엄성과 위대함을 가르치고, 인류 가족은 하나라는 더욱 분명한 의식을 널리 심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 일치를 위한 대화와 협력, 그리고 종교간 대화와 협력의 구체적인 영역으로서, 이를 통하여 종교는 세계 평화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저는 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종교 지도자들이 테러 행위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테러 행위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종교적 도덕적 정당성도 부인하는 데에 앞장서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13. 고의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크나큰 죄악이라는 사실을 언제 어디서나 예외 없이 한 목소리로 증언할 때, 세계 종교 지도자들은 정의와 자유 안에서 평화로운 질서를 추구할 수 있는 국제 사회 건설에 반드시 필요한, 도덕적으로 건전한 여론을 형성하는 데 이바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노력을 할 때 여러 종교들은 상호 이해와 존중과 신뢰에 이르게 하는 용서의 길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교들이 평화와 반테러리즘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은 바로 용서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용서를 바라는 사람들은, 더높은 진리가 있고 그 진리를 받아들일 때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평화를 위한 기도

 

14.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평화를 위한 기도는 결코 평화 활동에 부수적인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질서와 정의, 자유를 위한 평화 건설의 본질 요소입니다. 평화를 위한 기도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의 권능이 인간 마음에 넘쳐 흐르도록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주시는 당신 은총의 힘으로 장벽과 폐쇄만이 보이는 곳에 평화의 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류의 끝없는 분열과 갈등의 역사에서도 인류 가족의 연대를 강화해 주시고 확대해 주실 것입니다. 평화를 위한 기도는 국가와 민족들 사이에 정의와 올바른 질서 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기도입니다. 그것은 자유, 특히 모든 개인의 인권과 시민권의 바탕인 종교 자유를 위한 기도입니다. 평화를 위한 기도는 하느님의 용서를 바라며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는 용기를 주시도록 간청하는 기도입니다.

 

이러한 모든 이유에서, 저는 2002년 1월 24일에, 성 프란치스코의 고향인 아시시에 모이는 세계 종교 지도자들에게 평화를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부탁드렸던 것입니다. 평화를 위하여 기도할 때 우리는 참된 종교적 신념이야말로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상호 존중과 화합이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샘임을 보여 줄 것입니다. 실제로, 그것은 폭력과 분쟁을 막는 주요 해독제입니다. 지금과 같은 엄청난 시련의 시기에 인류 가족은 희망의 확실한 근거를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아름다운 기도처럼, 아시시에서 우리가 모두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해 주시기를 전능하신 하느님께 간청하며 이를 선포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 희망입니다.

 

15. 정의가 없으면 평화도 없고, 용서가 없으면 정의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이 담화에서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인류 가족의 선익과 인류의 미래를 염려하는 선의의 모든 사람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정의가 없으면 평화도 없고, 용서가 없으면 정의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인류 공동체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막중하고 어려운 결정을 할 때에 언제나 인류의 진정한 선익에 비추어 또 언제나 공동선의 관점에서 결정을 내려주기를 간청합니다.

 

정의가 없으면 평화도 없고, 용서가 없으면 정의도 없습니다. 저는 어떤 이유에서든 증오심과 복수심 또는 파괴욕을 키우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이 경고를 되풀이할 것입니다.

 

이번 평화의 날에 모든 신자가 테러 행위의 희생자들과 슬픔과 충격에 빠져있는 그 유가족들을 위하여, 그리고 테러와 전쟁으로 끊임없이 고통받고 상처받고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진심으로 더욱 간절한 기도를 올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무자비한 행동으로 하느님과 인류에게 큰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까지 미쳐 그들이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자기가 저지르고 있는 죄악을 깨달아 모든 폭력적 지향을 포기하고 용서를 바라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혼란의 시기에 온 인류 가족이 정의와 자비의 결합으로 태어나는 영구적인 참 평화를 얻게 되기를 빕니다.

 

바티칸에서,

2001년 12월 8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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