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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이재행과 이성례, 정태봉과 정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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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10-02 ㅣ No.842

한국 교회 124위 순교자전 - 이재행과 이성례, 정태봉과 정산필

 

 

온순하고도 단호하며 곧고 자비로운 성격의 이재행 안드레아(1776-1839년)는 홍주 출신으로 20세가 넘어 가족과 함께 교리를 배웠습니다. 그는 더 평온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재산과 고향을 떠나 산속에 은거해 살았습니다. 그리고 여러 차례 이주하느라 가난하게 되어 천한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도 하였습니다.

 

시련과 빈곤 속에서도 그가 보여준 인종(忍從), 동료애, 모욕을 감당하는 인내심, 언사에서의 신중함, 가족을 가르치고 부양하는 정성 등 많은 덕행은 모두의 칭찬과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순흥의 곰직이마을(현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에 살았던 그는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를 준비하였습니다. 잡으러 온 포졸들을 기쁘게 맞이하였고, 기꺼이 안동 관아에 끌려갔습니다.

 

잔혹하게 매를 맞으면서도 그는 관장에게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저의 하느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 대해 더 이상 제게 묻지 말아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대구 감영에서도 엄청난 형벌과 회유를 받았습니다. 감옥에서 하루 한 차례만 음식을 먹었고, 그 나머지를 가장 굶주리는 이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부인과 자녀들의 사망 소식을 듣고 고통과 슬픔을 못 이겨 눈물을 흘리는 그에게 박사의 안드레아가 “욥 성인을 생각해 보십시오.”라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 말에 자극을 받았고, 모든 것을 준비하신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 감사를 드렸습니다.

 

감옥에 갇힌 지 12년만인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박사의, 김사건 안드레아와 함께 63세의 나이에 참수로 순교하였습니다. 포졸들이 그들의 시신을 거두고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렀다고 합니다. 이는 일찍이 없었던 일인데, 순교자들은 그들을 가까이하는 모든 이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모친 이성례 마리아(1801-1840년)는 남편 최경환 프란치스코를 따라 먼 곳으로 이사 갈 때나 먼 길을 걸을 때 어린 자식들이 칭얼거리면 예수님과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이집트로 피난 가시던 이야기와 갈바리아 산에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인내심과 참을성을 키워주었습니다.

 

1839년 포도청 감옥에서 곤장과 칼에도 용맹하였지만 자식에 대한 애정으로 약해졌습니다. 젖먹이 스테파노가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렸던 것입니다.

 

배교한 뒤 얼마 있다가 체포되어 형조로 이송되었는데, 용감한 신자들의 권면으로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용감히 배교를 취소하였고, 모든 유혹 특히 모정에서 오는 나약한 생각을 끝까지 물리쳤습니다. 기아와 비참으로 말미암아 막내아들을 가슴에 묻으면서도 두 아들을 하느님께 바친 것에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순교 직전 둘째 아들을 불러 “절대로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잊지 마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하고 당부하였습니다. 그리고 1840년 1월 31일(음력 1839년 12월 27일) 당고개(서울 용산구 원효로2가)에서 동료 6명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충청도 덕산 출신 정태봉 바오로(1796-1839년)는 내포회장 정산필 베드로의 사촌(또는 육촌)입니다. 선하고 호의적인 성격을 지닌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오촌 아저씨 집에서 자라면서 고아로서 적지 않은 아픔을 겪었습니다. 자립할 나이가 되자 처자식들과 함께 전라도 용담고을로 이주하였는데 이미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용담에 거주한 지 3년이 지난 1827년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순교에 대한 갈망을 갖고 있던 그는 때때로 정사각형 나무토막을 턱밑에 갖다 대고 웃으면서 “내가 이와 같이 칼을 받는다면 아마도 내 영혼을 구원할 수 있을 텐데.”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어찌나 영적 독서에 몰입했던지 책을 들면 끝까지 읽고 나서야 책을 덮을 정도로 교리를 배우려는 열망이 강하였습니다.

 

용담의 포졸들에게 체포된 그는 문초와 함께 한 차례 다리에 매질을 당한 뒤 전주로 이송되었습니다. 감옥에서 긴 세월을 보내면서 어린 자식을 잃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 이태권 베드로, 이일언 욥, 신태보 베드로 등과 함께 43세의 나이에 전주 장터(숲정이)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덕산의 양인 집안 출신인 정산필 베드로(?-1799년)는 과격한 성격을 갖고 있었지만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직후부터 유순하고 친절해졌습니다. 주 신부에게 내포지방 회장으로 임명된 그는 기도와 경건한 독서에 열심하였고, 끊임없이 가르치고 권면하는 데 전념하였습니다.

 

1798년(또는 1799년)에 체포되어 덕산 관아(현 덕산초등학교 자리)에서 많은 신문과 고문을 받았는데, 곤혹함이나 고통스러운 기색을 조금도 나타내지 않았고, 항상 수감된 동료 신자들을 격려하였습니다. 1799년에 참수(또는 장사형)로 순교하였습니다.

 

순교자성월입니다. 기해박해 순교자인 이재행 안드레아와 이성례 마리아의 눈물겨운 신앙실천과 순교, 충남 덕산 출신 정태봉 바오로와 정산필 베드로의 순교에 대한 갈망을 우리도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경향잡지, 2010년 9월호,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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