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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박경화와 박사의, 이조이와 오종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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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7-16 ㅣ No.824

한국 교회 124위 순교자전 - 박경화와 박사의, 이조이와 오종례

 

 

1827년 정해박해에 순교한 박경화 바오로와 그의 아들 박사의 안드레아, 그리고 기해박해(1839년) 때에 순교한 이조이 막달레나와 오종례 야고보의 삶과 순교를 살펴보겠습니다.

 

박경화 바오로(1757-1827년)는 충청도 홍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33세 무렵 입교하였습니다. 입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박해가 일어나 체포되었을 때는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때의 배교가 기회가 되어 자신의 죄를 통회하면서 기도와 묵상에 열중하고자 종종 외진 장소에 가곤 하였습니다. 자녀들에게 기도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가르쳤고, 순교의 은총을 청원하였습니다.

 

1827년 박해가 일어났을 때 가마기(단양군 적성면 하리의 가마동으로 추정)에 살았던 그는 “이곳에서 보낸 9년은 하느님의 크신 은총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경북 문경시 동로면 명전리(멍에목)로 이주한 지 3개월 되었을 때, 아들과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상주군수에게 “제 육신은 관장의 손에 맡기오만, 제 영혼은 하느님의 손에 맡깁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고문을 당하고 뺨을 맞고 욕설을 당하고 수염을 뽑히면서도 “이 형벌은 은총이니, 이 은총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하였습니다. 대구로 이송된 그는 유명한 승려 한 사람과 토론을 하도록 명을 받자, “나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것을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내가 하느님과 마리아의 도우심에 의지하면 걱정할 것이 무엇이겠는가.”라며 토론을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설명에 막힘이 없는 것을 본 포졸들은 “천주교는 참된 종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수감된 지 6개월, 극도로 쇠약해진 그는 아들 박사의 안드레아와 다른 신자들에게 “이 감옥을 행복의 땅으로 여기고 밖에 있는 부모나 자식들에게 마음을 나누지 말고 내 뒤를 따르시오.”라고 하면서 70세의 나이로 1827년 11월 15일(음력 9월 27일) 순교하였습니다. 후에 다블뤼 주교는 “놀라울 정도의 선함, 변함없는 온유함, 지극히 관대하게 베풀었던 덕행, 교우들을 가르치고 권면하였던 열성, 그리고 항상 눈길을 끄는 모범을 보여주었던 다른 모든 덕성들은 그를 진정한 가장처럼 여기게 합니다.” 하고 증언하였습니다.

 

부친과 함께 갇혔던 박사의 안드레아(1792-1839년)는 법에 따라 같은 법정에서 부친과 동시에 심문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부친을 보면서 그는 잠깐이라도 부친 곁을 떠난다는 생각조차도 견딜 수가 없어서 관장에게 사정을 말하였습니다. 이 효심이 받아들여져 부친과 함께 심문을 받았습니다.

 

형벌을 받고 나서 몸을 사용할 수가 없는 지경이면서도 늘 아버지가 쓰고 있던 칼을 받쳐드려 좀 더 가볍게 해드리곤 하였습니다. 그는 하느님께도 충실하여 온갖 심문의 시련과 수차례의 고문 속에서도 끝까지 용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 삶은 콩 한 줌만 먹던 그는 신자들의 부탁으로 하루 한 차례 밥을 먹었고, 남는 것이 있으면 배고픔으로 고통받던 다른 수감자들에게 주었습니다. 이렇게 12년간 감옥 생활을 한 뒤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사형장으로 떠날 때는 포졸들조차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신자들에게 “오늘 우리는 여러 해 동안 일한 것의 결실을 거두어야 합니다. 상심하지 말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고 찬양합시다.” 하고 격려하면서 참수로 순교하였습니다.

 

충남 금산 출신인 이조이 막달레나(1808-1840년)는 15세에 결혼했으나 2년 만에 과부가 되었고, 시아주버니인 김성서 프란치스코의 도움으로 살았습니다. 시부모에게 효성을 다했던 그녀는 15년 동안 기도와 신심독서에 열심이었으며,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평안과 영혼의 안정 속에서 살았습니다.

 

1839년 박해가 일어나자 홍재영 프로타시오의 집으로 갔다가 그해 6월 14일에 그의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감옥에서 자신이 당한 고통은 거의 돌보지 않고 수감된 교우들에게 “솔직하게 행동하여 한 사람도 빠짐없이 우리 모두 함께 하늘나라로 갑시다.” 하였습니다. 1840년 1월 4일(음력 1839년 11월 30일) 다른 세 사람(홍재영, 오종례 야고보, 최조이 바르바라)과 함께 참수로 순교하였습니다.

 

이 막달레나와 함께 순교한 오종례 야고보(1821-1840년)는 충청도 은진 고을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고 일찍 부모를 여의었지만 어려서부터 교리를 실천하였습니다. 1839년 전라도 고산에 살았는데 진산에 있는 큰형을 보러 가다가 형을 비롯한 여러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섬기고 난 뒤, 제가 어떻게 형벌이 두려워서 그를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배교를 거부하였습니다. 전라감사는 “오종례는 입으로는 십계명을 외우면서 조상의 가르침은 버리기 어렵다고 말했으며, 다섯 차례나 형벌하면서 자세히 캐묻자 지극한 즐거움이 마음에 있다고 하였으니, 이처럼 요사한 괴물은 청명한 세상에 용납하기 어렵다.” 하였습니다. 5개월간 감옥에 있으면서 굶주림으로 고통을 받았던 그는 19세의 나이로 순교하였습니다.

 

하느님과 성모님께 의지하면서 모범적 덕성을 보여주었던 순교자 박경화, 헌신적 사랑을 실천한 그의 아들 순교자 박사의, 감옥 안에서도 교우들을 독려하고 솔직하게 행동한 순교자 이조이, 지극한 즐거움 속에 살았던 순교자 오종례의 삶과 신앙을 이어받았으면 합니다.

 

[경향잡지, 2010년 7월호,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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