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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영화를 읽어 주는 남자: 토리노의 말 - 살아야만 해, 그리고 희망해야 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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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읽어 주는 남자] 살아야만 해, 그리고 희망해야 해
6일 간의 소멸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영화가 창조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구조가 큰 의미를 가진다고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저 인간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변화를 바라보는 두 인물의 태도입니다. 영화의 두 주인공은 삶에 대한 인간의 두 가지 태도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마부에게 중요한 것은 물입니다. 집시들이 다가올 때도 자신은 나서지 않은 채 딸에게 내쫓으라고 말하지만 그들이 우물을 침범하자 도끼를 들고 나가 그들을 쫓아냅니다. 또한 우물이 말랐을 때 마부는 즉시 짐을 싸서 떠납니다. 그러나 빛이 사라졌을 때는 의아해 할 뿐, 그 다음날이면 다시 밝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잠자리에 듭니다. 마부에게 물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딸에게 물은 정화와 청결의 수단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세수를 하는 데에 필요할 뿐 아니라 언젠가 입을 날을 기다리며 매일 하얀 드레스를 세탁하는 데에도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딸에게는 빛(불)이 중요합니다. 딸에게 빛은 음식을 데우고 글을 읽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영화 속 몇몇 요소들은 강조되거나 반복해서 제시되어 관객에게 주목할 것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딸의 드레스는 희망을 나타냅니다. 영원히 입을 일이 없을 것 같은 이 옷을 딸은 매일 손질합니다. 우물이 마르고 집을 떠나려 할 때도 딸은 드레스와 반짝이는 가죽구두를 가장 소중하게 챙깁니다. 또한 쉬지 않고 불어대는 바람, 말라버린 우물, 그리고 사라지는 빛까지, 이 영화에서 변화하는 요소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외부 환경에 대한 것들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환경 안에서 생존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영화의 첫 번째 대사는 딸이 마치 관처럼 보이는 침대에 죽은 듯 누워있는 마부에게 “식사하세요.”라고 건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대사 역시 불이 사라져 유일한 양식인 생감자를 씹으며 마부가 딸에게 “먹어야만 해”라는 말입니다. 딸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말에게 “그러면 아무데도 갈 수 없어. 날 생각해서 마셔”라고 말합니다. 딸에게 있어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언가에 대한 희망입니다. 마부에게 살아간다는 것은 생존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거나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살아가며 희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할 뿐입니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반복해서 제시되는 말의 멍에는 이것들이 우리에게 지워진 운명임을 알려주고 있는 듯합니다.
영화의 제목인 『토리노의 말』에서 이미 예상하신 것처럼 이 영화는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와 연관되는 설정을 갖고 있습니다. 영화는 니체의 일화를 말하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합니다. 1889년 토리노에서 늙은 말이 마부에게 채찍을 맞으면서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그 마부를 말리다가 미쳐버린 니체에 대해 말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니체의 사상을 대변하거나 그러한 세계관에서 만들어진 영화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영화가 전해 주는 니체의 마지막 말은 “어머니, 저는 바보였어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날 술을 구하러 온 짜라투스투라를 연상시키는 사내에게 마부는 “헛소리 집어치우게.”라고 말합니다. 영화에서 우물이 말라버리자 떠나간 그들이 왜 돌아오는지에 대해서 영화는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말이 움직이지 않으려 했을 수도 있고 집시들이 물을 구하러 그곳까지 왔던 것을 미루어 보면 언덕 저 편에도 이미 물이 말라버렸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런저런 추측을 해 보는 것 보다는 인간의 의지로도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감독의 장치로 읽는 것이 현명한 해석으로 보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의지가 굉장히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는 세계 역시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영화는 신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영화도 아니고, 종교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로 보기에도 애매합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소개해 드리는 이유는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유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神)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하느님의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신이 죽은’ 세계에서는 현실만이 존재할 뿐 피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구원의 희망이 있기에 이 세상에서 삶을 살아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요즘과 같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마저 저버리는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는 게 참으로 혼란스럽습니다. 이런 세계에서 우리는 이 영화의 두 가지 외침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요. 살아야만 해. 그리고 희망해야 해.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6년 여름호(Vol. 34), 이창민 세례자 요한(영화감독)] 0 2,589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