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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47: 12세기 (1)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의 영성과 그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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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0-31 ㅣ No.1052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47) 12세기 ①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의 영성과 그 영향


성인의 영성을 관통하는 키워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 성 베르나르두스는 동정녀 성모 마리아에 관한 특별한 신심을 갖게 되었다. 그림은 성인 앞에 나타난 성모 마리아.

 

 

시토회는 초기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Bernardus Claraevallensis, 1090~1153)가 시토회에 합류하면서 수도회를 튼튼하게 성장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특히 베르나르두스의 신학 사상과 영성이 수도회에 큰 영향을 끼치면서 시토회는 이후 훌륭한 수도자들을 배출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학자들은 베르나르두스를 ‘제2의 시토회 설립자’이며 ‘최후 교부’라고 서슴없이 이야기합니다.

 

 

베르나르두스의 ‘사랑-신비체험’

 

부르고뉴(Bourgogne) 귀족 가문 출신인 베르나르두스는 샤티용(Chatillon)의 생 보를(Saint-Vorles) 성당 학교에서 문법, 논리학, 수사학 등에 탁월한 재능을 나타냈습니다.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을 꿈꾸기도 했으나 1107년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수도자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1112년 베르나르두스는 가족, 친척, 지인들을 설득해 엄격한 수도 생활을 실천하는 시토회에 입회했습니다. 시토회 아빠스 스테파누스 하르딩(Stephanus Harding, 1059쯤~1134)은 1115년 베르나르두스와 12명의 수도자에게 클레르보 계곡에 수도원을 설립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후 클레르보 수도원은 발전해 모원(母院)의 위상을 갖추게 됐고 1125년 베르나르두스는 클레르보 수도원 아빠스가 됐습니다. 베르나르두스는 덕망 있는 수도자로서뿐 아니라, 이단과 맞서는 신학자, 신앙을 장려하는 설교가, 분쟁을 중재하는 외교가로서 활동했으며 신비체험가 및 관상가로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베르나르두스의 신학이자 영성의 핵심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베르나르두스는 저서 「하느님을 사랑함(De diligendo Dei)」에서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어가는 과정을 소개했습니다. 첫 번째로, 나약한 인간은 이기적이지만 자신을 위해서 자신을 사랑합니다. 두 번째로, 여전히 인간은 이기적이지만 자신을 위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세 번째로,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하느님을 더 알게 된 인간은 드디어 하느님을 위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네 번째로, 진정한 사랑의 단계에 다다른 인간은 하느님을 위해서 자신을 사랑하는 행복한 순간을 맞게 됩니다.

 

- 성 베르나르두스 초상.

 

 

또한 베르나르두스는 「아가」 12장을 86편으로 구성한 저서 「아가 강론(Sermones super Cantica Canticorum)」에서 입맞춤이라는 상징으로 사랑 개념을 통해 인간 영혼이 하느님과 일치하는 신비체험을 강조했습니다. 첫 번째로, 인간은 예수님 발에 입맞춤을 하는데, 이것은 영성 생활을 시작하는 회개의 단계입니다. 두 번째로, 인간은 예수님의 손에 입맞춤을 하는데, 이것은 영적 여정을 걸으며 영성 생활이 발전하는 단계입니다. 세 번째로, 인간은 예수님의 입에 입맞춤을 하는데, 이것은 영성 생활이 완전한 상태에 다다른 사람에게 허락되는 매우 드문 단계로써 「아가」의 출발점입니다. 따라서 베르나르두스도 ‘사랑-신비체험’을 언급하면서, 지나치게 지성적인 신학 활동으로 기우는 것보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관상 생활을 실천하는 것이 영성 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특히 베르나르두스는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모 신심 형성에 영향 끼침

 

베르나르두스의 제자라고도 하는 이니의 게릭(Guerric d’Igny, 1070/80~1157)은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운영하는 투르네(Tournai) 주교좌성당 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123년 시토회 클레르보 수도원에 입회해 베르나르두스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1138년 시토회 이니(Igny) 수도원 원장으로 선출돼 죽을 때까지 원장 직분을 수행했습니다. 게릭은 54편의 강론을 남겼는데, 그중에 「아가」에 대한 강론도 한 편 있었습니다. 게릭은 관상 생활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하는 신비체험을 언급했으며, 그리스도론의 관점에서 성모 마리아에 관해서도 가르쳤습니다.

 

베르나르두스의 협력자였던 로잔의 주교 아마데우스(Amadeusof of Hauterive, 재임 1144~1159)는 1139년부터 시토회 오트콩브(Hautecombe) 수도원 원장 직분을 수행했습니다. 아마데우스는 복되신 동정녀 공경에 관한 8편의 강론을 남겼습니다.

 

제2의 베르나르두스로 불린 리보의 성 엘레드.

 

 

잉글랜드에 제2의 베르나르두스 출현

 

잉글랜드 노섬브리아(Northumbria) 왕국, 헥섬(Hexham) 귀족 가문 출신이며 ‘북쪽의 베르나르두스’로 불렸던 리보의 엘레드(Aelred of Rievaulx, 1110~1167)는 1134년 요크셔(Yorkshire)에 시토회 리보(Rievaulx) 수도원에 입회했습니다. 1142년부터 리보 수도원 수련장을 지낸 엘레드는 1143년 새로 설립된 링컨셔(Lincolnshire)에 레베스비(Revesby) 수도원 원장으로 선출됐습니다. 이후 엘레드는 1147년 리보 수도원 원장으로 선출돼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살았습니다.

 

엘레드의 필력이 뛰어난 것을 발견한 베르나르두스는 엘레드에게 수도자들을 도울 수 있는 작품을 저술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엘레드는 저서 「애덕의 거울(Speculum Caritatis)」에서 수련기에 있는 수도자들을 위한 고행 지침을 제시했습니다. 이후 엘레드는 이 작품과 짝을 이루는 저서 「영적 우정론(De Spirituali Amicitia)」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흘러나오는 참된 우정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엘레드는 저서 「은둔자 규칙서(De Institutione Inclusarum)」에서 육신을 잘 다스려 악습을 끊는 방법을 소개했으며, 이를 돕는 묵상 방법을 언급했습니다.

 

 

베르나르두스의 「아가 강론」을 이어서 완성시킴

 

호일랜드의 길버트(Gilbert of Hoyland, ?~1172)는 링컨셔의 시토회 스위니스헤드(Swineshead) 수도원 원장이었습니다. 베르나르두스 사망 이후에 길버트는 베르나르두스가 완성하지 못한 「아가」 강론을 계속 이어갈 것을 요청받았습니다. 따라서 길버트는 「아가」 3,15,10에 대한 47편의 강론을 저술했습니다.

 

포드의 존(John of Ford, 1140쯤~1214)은 1191년부터 잉글랜드 남서부 도싯(Dorset)에서 시토회 포드(Forde) 수도원 원장을 역임했습니다. 존은 베르나르두스가 시작하고 길버트가 이어갔던 「아가」 강론을 완결 지었습니다. 특히 존은 「아가」 58장을 다룬 120편의 강론을 남겼습니다. 다만 존이 잉글랜드 왕 존(John, 재위 1199~1261)에게 보수를 받았다는 이유로 교황으로부터 성사 집행 금지를 당해서였는지, 존은 사망 이후에 사람들에게 거의 잊혔습니다.

 

프랑스에 이어 잉글랜드에서 시토회 초기 영성은 먼저 「아가」를 묵상하며 관상을 통해 인간 영혼과 하느님과 일치하는 신비체험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에 대해 특별한 공경을 드리는 신심이었습니다. 이외에도 베르나르두스는 12세기에 그리스도교 영성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다방면에서 여러 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발휘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0월 29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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