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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기도] 창조물 보호를 위한 묵주기도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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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0-06 ㅣ No.1038

창조물 보호를 위한 묵주기도 길잡이 - 시작하며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7년은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님(당시 학생 수사)과 동료 수사들에 의해서 성모기사회가 시작된 해입니다. 당시 유럽은 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있었으며,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시작되고 가톨릭교회는 반교회 단체인 ‘프리메이슨’의 활동으로 위기를 겪는 등 극도로 혼란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을 교회와 인류가 함께 극복해나갈 수 있도록 콜베 신부님은 무엇보다도 우선 원죄 없으신 성모님의 전구와 도우심을 청하고자 결심하셨고, 그러한 결심을 혼자가 아닌 동료 수사들, 더 나아가 성모님께 온전히 자신을 봉헌하려는 지향을 가진 모든 신자와 함께 실천하고자 하셨습니다.

 

이렇게 성모기사회는 죄인과 이교도, 갈라진 형제들의 회개 및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인종, 성별 관계없이)의 성화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성모기사회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이러한 목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분명 실천하기 쉽지 않은 말씀이고, 또 그 원수의 잘못을 무조건 덮어주라는 뜻도 아닐 겁니다. 이 말씀을 실천하는 시작은 바로 그 원수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는 것, 달리 표현한다면 성모기사회의 목적에서도 밝히듯이 죄인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일 겁니다.

 

우리 자신의 회개 및 성화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노력해야 하지만, 동시에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드는 사람일지라도 적어도 그의 회개를 위해서는 기도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선을 넓힌다면 지금 우리 사회에 어려움을 야기하고 약자들을 억압하며 정의를 짓밟는 이들, 더 넓힌다면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폭력을 조장하고 저지르는 이들의 회개 역시 우리가 원죄 없으신 성모님께 기도드려야 하는 지향점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우리는 2년 전 발표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통해서 우리가 기도 중에 기억해야 할 지향을 하나 더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로 창조질서를 파괴하고 생태적 책임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의 회개입니다.

 

이미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1990년 1월 1일 “세계 평화의 날 담화”에서 말씀하셨듯이, 창조질서를 지키고 자연세계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적 부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통해서 이를 우리에게 한 번 더 가르치고 계십니다. 회칙은 전 세계의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환경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영감을 주었으며, 세계 곳곳에서 회칙을 공부하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고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회칙말미에 교황님께서는 우리에게 두 개의 아름다운 기도, 곧 ‘우리의 지구를 위한 기도’와 ‘그리스도인들이 피조물과 함께 드리는 기도’를 소개하십니다. 각각의 기도에서 다음의 구절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지구를 희생시키면서 이득만을 추구하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여 주소서.” “권력과 재물을 소유한 이들을 깨우쳐 주시어 무관심의 죄를 짓지 않게 하시고 공동선에 호의적이며 약한 이들을 도와주고 저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돌보게 하소서.”

 

이 구절들은 바로 자연, 우리가 살아가고 있고 우리의 미래 세대들도 살아가야 할 이 지구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는 이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향에 성모기사회원들의 기도가 함께 하기를 성모기사회 창립 100주년을 맞아 염원해봅니다.

 

환경을 위한 우리의 기도와 묵상을 위해서 다음 달부터 약 넉 달에 걸쳐서 “창조물 보호를 위한 묵주기도 길잡이(Guided Rosary on Caring for Creation)”를 번역해 소개할 것입니다.

 

이는 “프란치스칸 액션 네트워크 (Franciscan Action Network)”라는 미국의 프란치스칸 연합 단체에서 회칙 <찬미받으소서>의 반포를 맞아 그리스도인들이 창조질서 보전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묵상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만들어졌습니다.

 

이제 소개하게 될 이 묵주기도 묵상 글을 통해서 성모님과 함께 하는 묵주기도 안에서 자연과 피조물들,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약자들을 기억하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생태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다짐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이들이 지역적 · 지구적 환경 문제를 긴급한 사안으로 받아들이고 해결을 위해 노력하도록 우리가 기도 중에 함께 기억하기를 희망합니다.

 

* 이다한 스테파노 -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신부. 호주가톨릭대학교에서 생태신학으로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성모기사, 2017년 1월호, 이다한 스테파노]

 

 

창조물 보호를 위한 묵주기도 길잡이 - 환희의 신비 묵상

 

 

1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심을 묵상합시다 :

 

천사가 나타나서 하느님의 아들을 낳으리라는 기쁜 소식을 전할 때 마리아는 장엄하게 “예”라고 순명하셨으며, 이러한 모습이 순명의 모범이 됩니다. 하느님의 계획에 대한 마리아의 응답은 아마도 프란치스칸 정신의 중요한 부분인 순명의 완벽한 본보기일 것입니다.

 

a.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책임을 맡기셨으며, 그것들은 전적으로 우리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계획에 단호하게 “예”라는 대답을 드립니까?

 

b. 구체적으로 환경과 관련해서, 우리 주변에 있는 창조물들을 소중히 돌보도록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책임을 주셨습니다.(창세 1,26.28; 레위 25,23 등) 우리는 이러한 책임을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피하고 있습니까?

 

 

2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을 묵상합시다 :

 

마리아는 사촌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보고 매우 기뻐서 큰소리로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하고 외칩니다. 마리아께서는 겸손의 응답을 하십니다. 그리고 이 겸손 안에서 찬송가를 부르면서, 하느님께서는 권세 있는 자들을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심을 선포하십니다. 우리는 가톨릭 신자로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a.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억압받고 황폐해진 땅도 가장 버림받고 혹사당하는 불쌍한 존재가 되었습니다(<찬미받으소서> 2항)”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세상을 그렇게 보고 있습니까? 연약하고 우리의 보호에 맡겨진 것을 함부로 대함으로써 우리 주변의 세계가 혹사를 겪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b. (해안침식을 비롯하여) 우리가 최근에 본 파괴적인 자연 재난들은,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활동 때문에 야기된 기후변화의 결과입니다. 한 농민이 했던 “하느님께서는 항상 용서하시고, 우리 인간들은 때때로 용서하고, 자연은 절대 용서하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것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 상처는 당신에게 되돌아올 것입니다”라는 말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언젠가 우리에게도 말씀하셨다는 것을 다시 생각합시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연약한 이들을 비천한 처지에서 구해주신다는 것을 깨달읍시다. 우리는 하느님의 정의가 도래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세상 안에서 사회적·경제적 불평등, 그리고 이와 직결된 환경파괴를 막기 위해 노력하고자 합니까?

 

 

3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낳으심을 묵상합시다 :

 

탄생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이 만드신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지신 게 아니라, 기쁨으로 세상 안에 들어오셨으며 그 안에 머무셨다고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생계를 위해 세상에 씨를 뿌리고 그 결실을 거두어 들였던 이들 가운데에서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a. 하느님께서는 단순히 세상과 모든 창조물을 생겨나게만 하시고서는 그들을 외면하신 게 아니셨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아름다운 점은 하느님께서 여러 문제를 안고 있는 세상 안에서, 그리고 이 특별한 행성인 지구에서 사람 · 환경 · 동물과 함께 사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똑같이 이 세상 안에서 사는 것을 기뻐하고 있으며, 그 기쁨이 우리 삶의 모습에서 드러나고 있습니까? 겸손하신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비천한 이들과 지구를 가장 사랑하는 이들 가운데에서 사는 것을 행복해합니까?

 

b. 우리는 가장 작은 것들, 혹은 언뜻 보기에 중요한 것 같지 않은 피조물들 안에서도 그리스도의 현존을 볼 수 있습니까? 우리도 프란치스코 성인이 모든 것들 안에서 하느님을 찾으면서 지녔던 억누를 수 없는 기쁨으로 똑같이 가득 차 있습니까?

 

 

4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바치심을 묵상합시다 :

 

마리아와 요셉은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법에 따라 아기 예수를 보여주고 하느님께 봉헌하러 성전에 갑니다.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귀한 선물인 아기 예수를 맡으면서, 그들은 기꺼이 그리고 겸손하게 그분을 돌보았고, 예수님을 하느님께 돌려드렸습니다.

 

a. 앞에서 묵상한 대로, 하느님의 창조를 돌볼 책임이 우리에게 맡겨졌으며, 우리도 우리 자신을 주님께 바치도록 불림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일에 헌신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기꺼이, 행복하게, 그리고 전적으로, 우리에게 맡겨진 이 세상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습니까?

 

b. 마리아와 요셉은 자신들이 사는 종교적인 환경을 잘 알고 그것에 순응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큰 전체의 부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리아와 요셉처럼 우리가 이 세상 속의 한 부분임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모든 창조물에 대해선 어떻습니까?

 

c. 묵상을 위한 좋은 찬가는 “모든 만물이 주님께 경배하네(All Creation Worships You)” 일 것입니다. 이 찬가는 어떻게 우리 인간들이 하느님의 선과 영광을 노래하는 큰 합창단의 작은 부분이 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5단 마리아께서 잃으셨던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으심을 묵상합시다 :

 

예루살렘을 떠났을 때 예수님이 그들과 같이 있지 않다는 것을 안 성가정은 그분을 찾으러 돌아가야 했습니다. 부모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곳, 바로 성전 안에 예수님께서 계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곳에서 당신의 말을 듣고 있는 이들을 놀라운 경이로움으로 채우셨습니다.

 

a. 우리는 자주 우리 주변의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찾습니다. 창조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찾는 장소 중의 하나입니까?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1장 16-17절)

 

우리는 모든 것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 마리아가 그랬듯이 기쁨으로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출처 : Franciscan Action Network, “Guided Rosary on Caring for Creation,” 2015. (웹사이트: http://franciscanaction.org) [성모기사, 2017년 2월호, 이다한 스테파노]

 

 

창조물 보호를 위한 묵주기도 길잡이 - 고통의 신비 묵상

 

 

1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땀 흘리심을 묵상합시다 :

죽음의 두려운 시간이 다가왔다는 것을 아시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러 제자들을 떠나 겟세마니로 가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극진히 사랑하셨던 벗들을 떠나 자연 속에서 고독과 위안을 찾으셨고, 그곳에서 천사로부터 위로와 힘을 받을 수 있으셨습니다.

a. 우리도 주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하느님과 그분의 위로를 자연 속에서 찾습니까? 삶의 소소한 것들, 즉 꽃, 나무, 식물들 속에 잠시 멈춰 서서, 하느님 현존의 위로를 찾을 수 있습니까?

b. 창세기 2장 15절을 묵상합시다 :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데려다 에덴 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 인간은 낙원과 같은 자연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물리적으로든 혹은 영적으로든)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는 낙원으로 돌아가고자 합니까?


2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매 맞으심을 묵상합시다 :

예수님께서는 붙잡히시고 돌기둥에 묶이셨습니다. 그곳에서 그분은 잔인하게 채찍질과 매질을 당하셨습니다. 주님의 고통스러운 죽음이 시작되었지만, 이 끔찍한 사건을 멈출 수 있었던 이들과 그분 곁에 함께 있을 수 있었던 이들은 그렇게 하기를 거부했습니다.

a. 우리는 창조 질서를 보호하기 위해 하느님과 함께 일치하기를 거부하지는 않았습니까?

b. 다시 한 번 비천한 이들과 박해 받는 이들, 그리고 절망하는 이들의 편에 서야 할 우리 책임을 생각해봅시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께서 매를 맞으셨던 그 현장에 있었다면, 어느 편에서겠습니까? 공공연히 예수님을 박해하고 그분께 매질했던 이들입니까, 그분을 버리고 달아난 이들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존엄을 지켜드리기 위해 노력했겠습니까?

오늘날 불우한 사람들과 더불어서 하느님의 창조물들이, 권력을 가진 이들의 이익만을 지키고자 하는 세상에 의해 고통받는 것에 대해 어떻게 응답하겠습니까? 미국 가톨릭 주교회의의 2010년 2월 성명서는 말합니다 : “고국과 해외에서 가난 속에 사는 사람들은 기후 변화 문제에 영향을 가장 적게 미치지만, 그에 적응하고 대처할 수단 없이 그 결과로 가장 심한 고통을 받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처럼 그들은 어떠한 잘못도 없지만 겉보기에는 아무 이유 없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3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시관 쓰심을 묵상합시다 :

예수님을 모욕하기 위해, 가시관이 엮이어져서 그분 머리에 씌워졌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과 인간 동료들에 내재한 선을 우리가 자기도취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저버릴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a. 우리는 주변의 세계를 우리 목적을 위해 이용돼야 할 것으로 보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창조물을 학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b. 비록 가시들이 예수님께 고통과 수치심을 안겼지만, 그분은 마침내 영광의 관을 쓰셨고, 그분의 영광은 우리의 신앙과 증언을 통해 계속 이어집니다. 모든 창조물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지적하셨듯이, “우리의 집인 지구가 점점 더 엄청난 쓰레기 더미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찬미받으소서> 21항) 우리의 지구가 다시 하느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겠습니까?


4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 :

고통의 신비 4단만큼 심오한 혹은 풍부한 묵상거리를 많이 주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나약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이 비틀거리시고, 힘겹게 앞으로 나아가시고, 쓰러지심을 봅니다. 우리는 현세의 통치자들이 예수님을 계속해서 수난의 정점에까지 잔인하게 내몰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렇지만 쓰러져도 힘을 내서 다시 일어서시는 예수님, 또한 시몬과 베로니카의 모습 속에서 희망을 위한 작은 행동을 보게 됩니다. 그러한 행동이 우리가 다른 이들을 도와주는 것과 더불어서 우리의 영적 여정 안에서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a. 이 신비는 소박한 선행을 통해서 우리가 오늘날에도 참으로 그리스도의 고통을 덜어드릴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작고 겉보기에 하찮은가에 상관없이 우리가 선행을 실천할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도와드린 시몬 혹은 피 묻은 그리스도의 얼굴을 닦아드린 베로니카처럼 됩니다. 땅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거나, 나무를 심고 정원을 가꾸거나, 미소나 친절한 말로 집 없는 이들의 인간성을 존중하거나, 전등 스위치를 끄는 것과 같은 행동들 모두가 예수님의 영광을 이 세상 안에 더 충만하게, 더 완전히 보여줍니다.


5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 :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매우 가슴 아픈 이 사건은, 우리가 십자가상을 바라볼 때마다, 미사를 거행할 때마다, 또는 이 고통의 신비를 묵상할 때마다 기념됩니다. 그것은 끔찍하지만 구원 역사 안에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a.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할 때 여러분의 마음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입니까? 그분을 둘러싼 주변에 무엇이 보입니까?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제자들이 그분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고 다른 이들은 환호하는 중에 드리워진 어두운 폭풍우 구름일 것입니다. 적어도 잠깐이나마, 예수님의 빛은 꺼졌습니다.

b. 그리스도 왕국의 도래를 방해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못 박을 때, 우리 역시 그러한 폭풍우 구름을 몰고 옵니다. 우리는 무한히 좋은 하느님의 모든 창조물을 사랑하고 돌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c. 땅이 울리고 흔들렸던 것을 기억합시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목격하고 있던 사람들을 두렵게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수난 중에 괴로워하시듯이 지구도 그러하며, 지구가 수난 중에 괴로워하듯이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출처 : Franciscan Action Network, “Guided Rosary on Caring for Creation,” 2015. (웹사이트: http://franciscanaction.org) [성모기사, 2017년 3월호, 이다한 스테파노]

 

 

조물 보호를 위한 묵주기도 길잡이 - 영광의 신비 묵상

 

 

1단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묵상합시다 :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이는 모든 기적 중에 가장 영광스러운 기적입니다!

a. 예수님 적대자들의 우려에 마지못해, 빌라도는 아무도 예수님의 시신을 훔친 후에 그분이 부활하셨다고 주장할 수 없도록 무덤 바깥에 경비병들을 두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지진이 일어나고,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졌습니다. 경비병들은 두려워하며 달아났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는, 세상이 구원 역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큰 힘을 증언함을 보게 됩니다.

b. 요한복음을 보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처음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정원지기로 착각했습니다. 우리는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서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까? 특히 우리가 땅으로부터 아주 많은 혜택을 보고 있는데, 그것을 일구고 있는 이들의 고귀한 소명에 감사할 수 있습니까?


2단 예수님께서 승천하심을 묵상합시다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 구름에 싸여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렇지만 떠나시기 전에 그분께서는, 성령께서 제자들을 끝날까지 이끄실 것이고, 당신이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a.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가실 때, 제자들이 어떠했을지 - 그들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얼마나 당황했을지, 얼마나 놀랐을지 ? 생각해봅시다. 모두가 놀라 하늘만 쳐다보던 그때, 두 천사가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행전 1,11) 비록 예수님께서 (적어도 몸으로는) 제자들을 떠나셨지만, 그들에게는 여전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b.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왕국이 도래하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책임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만드신 창조질서의 청지기가 되도록 부름 받은 것과 관련해서 우리 주변의 세상을 돌볼 책임을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통해 변화가 일어나기를 희망하면서 그저 하늘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3단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심을 묵상합시다 :

예수님 제자들의 모임에 성령께서 내리심을 기념하는 이 날은 교회의 “탄생일”입니다. 하늘에서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불꽃 모양의 혀들이 제자들 각자에게 내려앉았습니다. (사도행전 2,1-4)

a. 전 세계의 다른 지역들에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이 성령으로 가득 차자 그들은 이전과 달리 언어의 장벽 없이 서로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초기 사도들의 시대 이래로 우리는 보편 교회(그리스어 “가톨릭(catholic/katholikos)”의 뜻)의 일원이었으며, 지금도 그 일원입니다. 성령강림을 묵상하는 것은 또한 우리 모두가 보편적인 사명에로 불림 받았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그 사명은 바로 복음을 전파하고, 창조 보호를 포함해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b. 전에는 지배 체제의 억압 아래에서 숨죽여 지냈지만, 성령의 은사를 받은 후에 제자들은 복음을 선포하고, 자유롭게 전도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던 성 베드로는 하루에 삼천 명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사도행전 2,41) 사람들은 치유 받았고, 두려움들은 극복되었습니다. 골고타에서 타오르기 시작해서 오늘날까지 전 세계에 전해진 사랑의 불이 이제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행동하도록 부름 받았으며, 우리를 망설이게 만드는 모든 것들은 우리가 이미 받은 성령의 힘으로 극복될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c. 성령께서는 세찬 바람 소리와 불의 모습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이 둘은 평범하지만 강한 자연의 구성 요소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피조물의 찬가에서 하느님의 영광의 아름다운 현현을 찬양했듯이, 우리도 하느님의 힘이 “형제인 불과 바람” 안에 현존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4단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하늘에 불러올리심을 묵상합시다 :

이 교의는 성경에 나타나진 않지만 교회 전승 안에서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복되신 우리의 어머니께서 이곳 지상에서의 삶의 마지막 순간에 육신이 하늘로 들어 올림을 받으셨습니다.

a. <찬미받으소서>는 환경과 관련해서 성모 마리아에 관한 묵상들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돌보신 성모 마리아께서 이제 이 상처 입은 세상을 모성애로 함께 아파하며 돌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꿰 찔린 마음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애통해하신 것처럼 핍박받는 가난한 이들과 인간의 힘으로 황폐해진 이 세상의 피조물 때문에 지금도 슬퍼하고 계십니다. 완전히 변모하신 성모님께서는 이제 예수님과 함께 사시고, 모든 피조물은 그분의 아름다움을 노래합니다.”(<찬미받으소서> 241항) 비록 성모님께서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육신으로 계시진 않지만, 아드님이신 예수님처럼, 당신이 떠나가신 이 세상을 계속 돌보시며, 세상에서 자행되고 있는 파괴 때문에 눈물 흘리고 계십니다.

b. 몇몇 전승들은 성모님 육신이 사라진 자리에 꽃향기와 새들의 노랫소리가 남았다고 전합니다. 성모님 육신이 떠나신 자리에서 자연은, 순결과 은총의 모범이신 그분의 훌륭한 덕을 증
언하고 있었습니다.


5단 예수님께서 마리아께 천상 모후의 관을 씌우심을 묵상합시다 :

하늘로 올려지신 마리아는 복되신 삼위일체에 의해 천상 모후의 관을 쓰셨습니다. 평화의 왕자이시며 왕 중의 왕이신 분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는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를 계속 도와주고 계십니다.

a. “예”라고 응답하심으로써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통해 모든 인류의 어머니가 되는 것에 동의하셨습니다. 이 신비 안에서 그분은 모든 이들의 여왕이라는 합당한 칭호를 받으셨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를 기르며 다스리는”, “누나요 어머니인 땅”을 우리가 칭송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도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영적으로 우리를 기르고 돌보아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소중히 그리고 감사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우리는 마리아와 이 대지의 자녀이며, 그 둘을 기억하고 사랑하고 공경하기를 희망합니다.

출처 : Franciscan Action Network, “Guided Rosary on Caring for Creation,” 2015. (웹사이트: http://franciscanaction.org) [성모기사, 2017년 4월호, 이다한 스테파노]

 

 

창조물 보호를 위한 묵주기도 길잡이 - 빛의 신비 묵상

 

 

1단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심을 묵상합시다 :

물은 성경과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서 언제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쇄신, 새 생명, 그리고 죄 정화의 표지입니다. 예수님처럼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도 그분의 모범을 따르고 있으며, 우리의 삶이 그분께서 사신 모습을 닮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a. 피조물의 찬가에서 성 프란치스코가 물이 갖는 소박한 경이로움, 그것의 순수함과 깨끗함을 노래했던 것을 떠올려봅시다 : “쓰임 많고 겸손하고 값지고도 조촐한 누나, 물에게서 내 주여 찬미를 받으옵소서” 우리는 물이 얼마나 우리에게 소중하고 중요한지를 인식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만 여기고 있습니까?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생각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습니까?

b. 우리 인간은, 지구와 마찬가지로, 주로 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인간이 되셨을 때, 그분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주로 물로 이루어진 육체를 취하셨습니다.


2단 예수님께서 카나에서 첫 기적을 행하심을 묵상합시다 :

마리아의 청에 따라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심으로 당신의 첫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도움과 전구를 통해서 우리도 또한 그리스도에 의해 영적으로 변화되고 세계를 보는 눈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a. 물이라는 쉽게 무시되는 자연의 경이로움에 대한 묵상을 이어가면서 우리는, 인간이 이 귀중한 자원을 자주 남용했던 불행한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많은 지역의 사람들이 깨끗하고 마실 수 있는 물을 이용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 같은 사실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탄식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회칙의 한 부분 전체를 “물의 문제”, 그리고 어떻게 현재의 기후 위기가 불균형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거듭 피해를 주고 있는지에 대해서 할애하셨습니다. 더러운 식수, 병균이 들끓는 강과 개울, 그리고 기름으로 오염된 대양과 바다 때문에 한 주에 수백 마일을 걷는 사람들의 모습들은 아마 불행하게도 우리 모두가 보았던 것들입니다. 마리아의 전구와 그리스도 예수님의 힘을 통해서 우리의 귀중한 물이 오염되고 남용된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 영광스럽고 생명을 주는 것이 되도록 어떻게 도울 수 있겠습니까?


3단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심을 묵상합시다 :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과 제자들에게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의 영광에 대해 이야기하실 때, 자주 여러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우리가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여야 함을 강조하셨기에 단순한 언어와 짧은 이야기들을 가지고 말씀하셨음을 기억합시다. 또한 그분께서는 복음을 가르치시기 위해 자주 자연, 농사, 밭일, 그리고 동물들의 이미지를 사용하셨음을 기억합시다.

a. 예수님께서 사용하셨으며 구체적으로 자연과 관련하여 독특한 전개를 가지고 있는 몇몇 비유들(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저절로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 겨자씨 비유 등)을 생각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더 잘 이해하기를 바라셨고, 그래서 자주 자연을 가지고 그것에 대해 우리에게 이야기하셨습니다. 곧 자연은 하느님과 그분 나라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b.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의 “거울”, 혹은 많은 훌륭한 사상가가 불렀듯이, “창조의 책”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자주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하느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과 창조물들 안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함께 이해하고 있습니까?


4단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심을 묵상합시다 :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러 높은 산으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변모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충만한 영광이 제자들에게 드러났습니다. 구름 속에서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울렸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a. 베드로가 당시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생각합시다. 그는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를 보며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신들이 예수님과 두 예언자를 위해 천막을 지어야 하는지를 급히 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여쭙고 있는지 깨닫기 전에, 무엇을 목격하고 있는지 충분히 생각해보기 전에 말했습니다. 종종 우리는, 우리 스스로나 주변 세계에 닥칠 결과들, 혹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소박한 방식들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은 채 충동적으로 행동합니다. 우리는 때론 그리스도께서 항상 모든 곳에 현존하시며 그분의 현존이 본질적으로 좋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며 바쁘게 살아갑니다.

b. 우리는 하느님, 이웃, 그리고 창조와 가까운 관계를 맺는 것에 무지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관계를 맺는 데에 해가 되도록 성급하게 행동하지는 않습니까? 잠시 여유를 가지고 우리가 그러한 관계들을 맺는 것에 생각보다 얼마나 더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가를 돌아볼 수 있습니까?


5단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심을 묵상합시다 :

성체성사는 우리 가톨릭 신앙의 핵심이며 정점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항상 모든 곳에 현존하심을 알지만 그분께서는 성체 안에 가장 분명하게 현존하고 계십니다.

a. 사제가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하느님께 봉헌할 때 바치는 기도를 생각해봅시다 :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주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로 저희가 땅과 포도를 가꾸어 얻은 이 빵과 술을 주님께 바치오니 생명의 양식, 구원의 음료가 되게 하소서.”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창조하신 지구와 우리에게 주신 영적 양식을 통해서 우리의 몸과 영혼을 양육하십니다.

b. 누룩 없는 빵과 소박한 포도주는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기 전에는 참으로 매우 사소한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을 얻기까지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식탁에 오를 점심이나 저녁을 얻기 위해 드는 수고들을 우리가 인식하고 감사해야 하듯이, 빵과 포도주가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말씀하신 “세상의 제대”에 올려지기까지 노고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유념해야 합니다.

c. 우리가 일주일에 영성체를 여러 번 할 수 있음에도, 성체성사는 입문성사로 여겨집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실 때마다 세례와 견진 때의 약속을 새롭게 하고, 매일의 삶에서 우리의 신앙을 참으로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영적 양식을 받습니다. 우리가 영성체를 하거나 이 신비를 묵상하는 때마다 예수님과 더욱 친밀해지기를 기도합시다.

출처 : Franciscan Action Network, “Guided Rosary on Caring for Creation,” 2015. (웹사이트: http://franciscanaction.org) [성모기사, 2017년 5월호, 이다한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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