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6일 (수)
(녹)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원시장 베드로, 원시보 야고보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6-14 ㅣ No.1282

[124위 시복 특집] 원시장 베드로(1732~1793년) · 원시보 야고보(1730~1799년)


“오늘은 주님의 날이니 거룩한 기쁨으로 이날을 지내야 하고, 또 천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산을 나눔으로써 그분의 은혜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성격이 사납고 야성적인 원시장 베드로는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56~57세 무렵, 하느님을 알고 신앙을 실천하면서 성격이 변하여 어떠한 일에서나 온화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한편 60세가 다 되어서 사촌 동생 원시장과 함께 천주교 교리를 듣고 입교한 원시보 야고보는 교회의 가르침대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재산을 희사하고 금요일마다 금식을 하였으며, 여기저기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원시보는 친구들의 권고에 따라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으나 원시장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원시장은 여러 달 옥살이 하면서도 틈틈이 포졸과 형리들에게 전교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교우가 그를 만나러 옥으로 찾아왔고, 이때 원시장은 비로소 그 교우에게서 세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원시장은 갖가지 혹형을 받은 뒤 1793년 1월 28일, 61년간의 삶을 하느님께 바쳐 순교의 면류관을 얻었습니다.

뒤에 이 소식을 들은 원시보는 함께 순교의 영광을 얻지 못한 것을 뉘우치고 ‘천주교를 공공연하게 실천하면 사또가 그 소문을 듣고 나를 잡아오라고 할 것’이라 여겨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습니다. 1795년 무렵, 주문모 신부를 만났을 때는 첩을 두고 있다는 이유로 성사를 받지 못하자, 집으로 돌아가서 바로 첩을 내보내기도 하였습니다. 2년 뒤 시작된 정사박해 때 체포된 원시보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온갖 문초와 혹형에 맞서 “천주를 섬기고 제 영혼을 구하고자 천주교를 봉행한다.”며 당당히 신앙을 증언했습니다. 1799년에 원시보는 감사의 명에 따라 병영이 있던 청주로 이송되었습니다. 그가 덕산을 떠나는 날 아내와 자식과 친구들이 울면서 따라오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을 섬기고 영혼을 구하려면 인간의 본성을 따라 가서는 안 되네. 모든 고통을 참아 낸다면 기쁨 가운데서 주님과 착하신 동정 마리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네. 그대들이 여기에 있으면 내 마음이 흔들리니 돌아가게. 이성을 잃고 대사(大事)를 그르칠 수는 없네.”

덕산에서 이미 두 다리가 부러진 채로 청주에 이송된 원시보는 결국 거듭되는 혹형을 이겨내지 못하고 1799년 4월 17일, 69세를 일기로 순교하였습니다. 원시보가 순교한 뒤 그의 육체는 이상한 광채에 둘러싸인 것 같았으며, 이 광경을 목격한 50가족 가량이 천주교에 입
교하였다고 합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엮음 | 그림 박지훈, 124위 약전 ⓒ CBCK /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2014년 5월 25일 부활 제6주일(청소년주일) 서울주보 6면]



파일첨부

1,666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