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박해시대의 배반자들 - 유다스 열전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8 ㅣ No.110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박해시대의 배반자들

 

‘유다스’ 열전 (1)

 

 

‘유다 이스가리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통해 펼쳐지는 구속사의 전개과정에서 눈에 띄는 주요인물이다. 그는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였지만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한 장본인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죽은 지 2천여 년이 지나도록 뭇사람의 지탄을 받아온 비극의 인물이다. 그는 구세주 그리스도에 대비되는 반구원적 인물이 되었고, 그리스도가 영웅이라면 그는 반(反)영웅이었다. 그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배반자’ 또는 ‘배신자’라는 꾸밈말이 붙어 다녔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난 1800여 년 뒤 조선 땅에서도 고유명사였던 그의 이름은 ‘배신자’라는 보통명사와 동의어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조선교회의 ‘원조 유다스’

 

박해시대 우리 교회사에도 어김없이 배신자 또는 배반자들이 등장한다. 당시의 신도들은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을 ‘유다스’라 불렀다. ‘유다스’는 ‘유다’를 라틴식으로 부른 이름이었다. 이 유다스들은 일반적으로 관청에 잡혔다가 신앙을 부정하고 풀려나온 배교자와는 다른 어감을 풍기던 사람들이었다. 신자들은 배교에 관해서는 비교적 관용적 자세를 가졌으나 유다스에 대해서는 배신과 배덕을 나무랐던 입장이다. 1830년대 조선에 들어온 프랑스인 선교사들도 ‘배교’ 또는 ‘배교자’를 ‘배반’ 또는 ‘배반자’와 의도적으로 구별하였고 이들을 ‘거짓 형제’로 부르기도 했다.

 

박해시대에 신도들이 유다스로 불렀던 인물은 여럿 있다. 1798년 충청도 내포지방의 박해 때에는 조화진이라는 자가 대표적 유다스로 등장한다. 아마도 그는 우리 교회사에 첫 번째로 등장하는 ‘원조 유다스’로 부를만한 인물일 것이다. 사실 조화진은 조정의 명령을 받고 천주교 신앙공동체에 잠입한 첩자(프락치)였다. 정부에서 천주교에 프락치를 투입하기로 결정했던 때는 1795년 이후이다. 그해 포도청에서 주문모 신부를 잡으려다 놓친 사건을 겪은 다음, 정조 임금은 주문모 신부를 추적하고자 장용위를 비롯하여 별군과 선전관 등 왕실의 정보조직들을 동원하여 비밀리에 기미를 살폈다.

 

그는 주문모 신부가 충청도 지방으로 도피했으리라는 심증을 얻고, 충청도의 행정 책임자인 감사 김이영과 군사 책임자였던 병사 정충달에게 명하여 천주교 신자들을 조사하고 살펴서 법으로 다스리게 했다. 이때 정조 임금은 이들에게 특별지시를 내려 충청도로 보내면서 한 인물을 소개했다. 그가 조화진인데 “벽위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조화진은 필공이라 하거나 행상이라 칭하면서 사학 무리의 집에 출입하며 사학을 배우는 척했다. 손으로 십자를 그으며 입으로 천주교 서적을 외우니, 한번 봄에 마음을 터놓고 서로 대우하므로, 가는 곳마다 유숙하면서 그 진상이 누가 깊고 얕음과 도당이 누가 많고 적음을 모두 알아 자취를 따라 밀고했다. 또한 병영에 직통하지 않고 음성 현감 노숙을 통해서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병영에서 천주교 신도를 체포할 때에는 간혹 조화진도 함께 잡혀갔다. 병영에서는 겉으로는 다스리는 체하고는 몰래 놓아주므로 사학의 무리들이 처음에는 조화진이 하는 짓을 몰랐다. 그는 내포의 천주교 신자 모두를 해미진영에 부쳐 다스리니, 1798년과 1799년 두 해 동안에 형벌로 죽은 자가 백여 명이 넘었다. 천주학의 무리들은 마침내 조화진이 고발한 것을 알고 이를 갈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1801년 박해 때의 유다스

 

이러한 기록들을 참고할 때 조화진은 첩자로 투입된 다음 세례를 받고 신자인 척 가장하면서 형제들을 팔아먹었던 인물로 생각된다. 달레의 교회사에서는 배교자 조화진이 배관겸 등 내포지방의 많은 신도들을 밀고하여 죽게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황사영은 조화진의 밀고 때문에 “청주지방의 열심한 사람들이 다 잡혀 죽었다.”고 증언했다. 한편, 교회의 기록에는 그가 박해가 끝난 뒤에도 “그 흉악한 생활과 강도질을 계속하다가 드디어 법망에 걸리게 되자 자살하고 말았다.”고 되어있다. 반면에 박해자의 기록인 “벽위편”에서는 조화진이 1801년의 박해 때에 신도들의 무고로 옥에 갇혔으나 자신의 무죄를 증명할 길 없어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고 했다.

 

조화진의 자살은 5년도 못 되어 무용지물 취급을 당하게 된 자신의 신세를 비관한 결과였을지 모르겠다. 조화진의 이용가치가 다 떨어지자, 정부는 1801년의 박해 때에 새로운 유다스를 발굴해 냈다. 이런 일에는 새것이 언제나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듯하다. 새 유다스는 김여삼이었다. 그는 박해가 일어난 직후 총회장이었던 최창현의 집을 급습하여 그를 체포하게 한 사람이었다.

 

김여삼은 원래 충청도 사람이었다. 그의 세 형제는 박해를 모면하려고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사하여 살았다. 김여삼도 그들을 따라 서울로 왔으나 오래지 않아 못된 친구들과 사귀어 타락했고, 형제들의 경고를 저버리고 몹시 무절제한 생활에 빠졌다. 빈궁하여지자 그는 이안정이라고 히는 충청도 출신의 교우에게서 몇 번 돈을 뜯어냈다.

 

그리고 분명 김여삼은 돈을 더 주지 않으면 신자들과 주문모 신부를 고발하겠다고 이안정을 위협한 듯하다. 이안정은 이에 놀라 여러 번 그에게 꽤 많은 돈을 주었지만 그의 그침 없는 요구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안정은 그의 거듭된 요구를 거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김여삼은 이안정이 자주 성사를 받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김여삼은 이안정의 태도변화를 주문모 신부의 지시라고 생각했다. 김여삼은 포도대장에게 교회를 고발했고, 신자들을 잡아넣는 데에 앞장섰다. 이리하여 또 한 명의 배신자가 유다스 열전에 더해졌다.

 

 

남은 말

 

단테는 “신곡”에서 유다스를 지옥의 가장 깊은 골짜기에 처넣었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라는 책을 통해 골짜기에 처박힌 유다스를 끌어내어 그의 삶과 고뇌를 묘사했다. 유다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도 주연인 그리스도를 받쳐주는 뛰어난 조연자였다. 이제 우리는 무시와 망각의 골짜기에서 조화진이나 김여삼 등 ‘유다스’를 끌어내어 그들의 나약함과 고뇌와 배덕을 함께 살펴야한다.

 

그들의 존재는 박해시대 신앙공동체에서 일단 한번 신자로 인정되면 더 이상의 검증을 거치지 않고 형제로 받아들였던 순수했던 당시의 신자생활을 알게 해준다. 또한 만일 유다스가 없었다면 그리스도를 형상화한 여러 예술행위는 지금보다 월등히 무미건조했을 것이다. 우리 교회사에 동기를 둔 모든 예술활동에도 그 ‘유다스’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요청되고 있다. 또 이 일은 사람들의 역사이기도 한 교회사를 균형 있게 기록하는 시각을 강화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5년 3월호, 조광 이냐시오]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박해시대의 배반자들

 

‘유다스’ 열전 (2)

 

 

유다스는 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했을까? 그가 배반의 대가로 받았다는 돈은 고작 죽은 나그네나 묻어주는 손바닥만한 땅뙈기를 살 수 있던 금액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영악하기 그지없던 그가 단순히 돈 때문에 예수를 팔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유다스는 자신이 구세주 그리스도로 믿고 따랐던 예수의 어리석음에 실망했다. 그 실망 때문에 유다스는 그리스도를 배신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구세주를 배신했다는 절망감은 그에게 스스로 목을 매게 하였다. 그리스도에 대한 배신이나 자신의 목을 맨 일은 모두 그의 잘못된 판단 때문이었다.

 

박해시대 우리나라에서도 어떤 신자들은 아마 그 유다스와 같이 희망과 실망과 절망을 뒤범벅하여 가지고 있었나 보다. 그러기에 박해 때마다 신자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의 희망이었던 새로운 믿음에 대한 실망 때문에 스스로 유다스의 길을 걸었는지 모를 일이다.

 

 

1815년 박해 때의 전지수

 

1815년 3월 경상도에서 박해가 일어났다. 그곳 신자 가운데 전지수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돌아다니며 돈과 옷가지와 양식을 구걸하여 연명했다. 교우들은 자신들의 곤궁한 처지에 비하여 많은 동냥을 주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가진 것이 모두 바닥나 애긍이 줄어드니, 전지수는 구걸로 받는 것에서 별로 만족을 느끼지 못하여 교우들을 밀고할 생각을 품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복수도 되었고, 또 한편 저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약탈하여 그 오죽잖은 재물을 거침없이 제 것으로 만들 수 있도록 하자는 심보에서였다.

 

당시 관행으로는 범죄자를 밀고할 경우 그 죄인의 재산은 밀고자의 몫이었다. 전지수는 바로 이 점을 노렸던 듯하다. 이에 ‘흉악한 배신자’ 전지수는 교우들을 등쳐 먹을 요량으로 그해 부활절에 안동 관아의 군졸들을 데리고 청송 노래산에 숨어 살던 신자들을 체포했다.

 

그런데 1815년 11월 무렵, 배신자 전지수도 어떤 큰 잘못을 저질러 대구 감영에 투옥되었다. 감사는 그를 굶겨 죽이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옥에 갇혀있던 신자들이 날마다 얼마 안 되는 배급을 그에게 나누어주어 목숨을 연명하게 하였다. 물론 신자들은 그가 자신들을 밀고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뒤 전지수가 석방되어 거의 알몸으로 내쫓겼을 때에도 신자들은 그에게 몸을 가릴 옷을 주었다. 신자들이 옥중에서 전지수에게 이와 같은 사랑을 실천하던 때는 자신들이 사형선고를 받은 직후였다.

 

경상도 신자들은 참다운 애덕을 가지고, 원수를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모든 외교인에게 보여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인 전지수가 굶주리자 먹을거리를 주었고, 헐벗은 그를 입혀주었다. 이 복음적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19세기 초엽 두메산골의 신자들까지도 복음의 가르침을 올바로 알고 실천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유다스 전지수가 자신의 신앙공동체를 포기하게 되었던 이유가 궁금해진다. 아마 전지수도 자신이 속했던 공동체에 대해 유다와 같은 실망감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고발당했던 신자들은 죽음을 앞둔 자신들의 앞길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였기에, 자신들을 고발한 사람까지도 따뜻이 배려할 수 있었을 게다. 아마도 전지수는 그 순교자들에게 큰 빚을 진 처참한 마음으로 평생을 살 수밖에 없었을 듯하다.

 

 

1839년 박해 때의 김순성

 

1839년에도 박해가 일어났다. 이 박해에서는 배반자 김여상이 동료들을 잡아넣으려고 맹활약했다. 김여상은 당시 관청자료에서 김순성(金順性)으로 나온다. 그 박해를 기록한 책인 “기해일기”를 보면 그의 세례명은 요한으로 나온다. 그는 한국교회사상 가장 악명 높은 배신자로 평가되어 왔다. 선교사들은 그를 ‘추악한 배반자’, ‘거짓 형제’로 규정했다.

 

그의 밀고로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 김제준을체포한 사람도 김여상이었다. 그는 간특한 잔꾀로 순박한 시골 신자 정화경 안드레아를 속여 앵베르 주교의 거처를 알아냈고 그를 체포했다. 그리고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도 결국 관헌들 앞에 서게 되었다. 그의 행동거지에 대해 달레 교회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배반자 김여상(순성)은 신자들의 집회에는 언제나 제일 먼저 와서 교리문답과 성서를 사람들 앞에서 읽으면서 천주께서 그들에게 보내시는 시련을 참을성 있게 참아 받으라고 모여있는 모든 이에게 권고했다. 그는 이렇게 하여 많은 사람의 신임을 샀고, 그래서 관헌에게 가장 정확하고 가장 상세한 밀고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순성은 박해가 끝난 다음 포상으로 하급관직밖에 받지 못했고, 아무런 물질적 이득도 얻을 수 없었다. 박해가 끝나자 그도 용도폐기되었다. 그 뒤 그는 여러 사건에 끊임없이 연루되어 투옥되거나 귀양살이를 해야 했다. 그는 1862년에 일어났던 이하전의 왕위찬탈 음모에 연루되어 처참하게 죽음을 당했다.

 

김순성은 대역부도죄인으로 처형당해 그의 시체는 여섯 토막으로 잘렸다. 그의 잘린 지체들은 전국 8도를 돌면서 반역자에 대한 경계가 되었다. 이 사건은 얼마 뒤 무고였음이 밝혀졌지만 그는 끝내 신원이 회복되지 못했다. 1839년 박해의 진상에 관한 선교사들의 기록을 보면, 김순성은 ‘교활한 정탐꾼이며 밀고자’에 지나지 않았다고 적혀있다. 또한 그의 비참한 말로가 인과응보적 차원에서 배신자가 맞이해야 할 당연한 결과인 듯 묘사해 놓았다.

 

 

남은 말

 

프랑스의 작가 조르즈 베르나노스는 어린 시절 배신자 유다스를 안타까워하면서, 그를 위해 용돈을 모아 위령미사를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다스보다도 더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김순성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김순성이 죽기 50여 년 전 경상감영의 감옥에서는 원수에 대한 사랑이 실천되고 있었다. 배신자 전지수를 감싸주었던 사랑을 조선교회는 이렇게 점차 잊어갔다. 그리고 사랑을 잊어가던 당시의 교회는 1866년과 1868년에 ‘무력(武力)’이라는 근대적 우상에 의지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박해가 일어났고, 그 박해는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라고 조선교회에 내린 하느님의 채찍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것을 너무나 오랫동안 잊고 지내왔다. 1815년의 전지수는 교회가 무한한 사랑을 실천하고자 할 때 진정으로 강해짐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1866년 위풍당당하게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났던 로즈 제독의 프랑스 함대는 결코 우리에게 구세주가 되지 못했다. [경향잡지, 2005년 4월호, 조광 이냐시오]



파일첨부

973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