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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클로비스의 개종을 통해서 본 그리스도교 신앙과 게르만 문화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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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0 ㅣ No.95

클로비스의 개종(서기 500년경)을 통해서 본 그리스도교 신앙과 게르만 문화의 만남

 

 

주제:그리스도교와 게르만 문화의 만남

발제:차용구(중앙대학교 교수, 역사학)

약정토론 1:신교선(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

약정토론 2:이영재(숭실대학교 강사)

사회:나기정(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

일시:2002년 4월 15일(월) 오후 2-6시

장소: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4층 강당

 

 

1. 개종의 중요성

 

그리스도교 신앙은 고대 그리스, 로마, 게르만 문화와 역사적 공생의 과정을 통해서 성장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토착 문화의 사회·종교적 가치들을 변형시키거나 동화시켰고 또는 이들 문화에 스스로 적응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사도 시대의 교회는 유다인들의 구약적 전통을 준수하면서 신의 형상을 인간의 모습으로 이미지화하는 것을 우상 숭배로 규정하고 이를 철저히 금지했다. 그러나 지중해 연안에 고전 문명을 일구었던 고대 그리스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숭배하는 신들을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하는 신인동형적(神人同形的)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현세적이고 가시적인 것을 중시하던 첫 번째 개종 대상자들에게 좀 더 효과적인 구원 사업을 전개하기 위해서 교회는 결국 양보를 해야만 했다. 이로써 로마인의 복장을 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이미지화되기 시작했다.

 

구원 사업의 두 번째 대상은 게르만족들이었다. 라인-다뉴브 강 이북의 북동부 유럽에 거주하던 이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이 전파될 당시, 교회는 더 이상 박해를 피해서 지하 공동 묘지에서 은신처를 찾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당시 로마 제국의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으로, 교회는 더 이상 제국의 후원을 얻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프랑크족의 왕 클로비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던 서기 500년 무렵에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어떠한 강력한 통치자도 교황의 가톨릭에 속해 있지 않았다. 대부분의 게르만족은 이단적인 아리우스주의를 신봉하거나 프랑크족처럼 토착 신앙을 고수하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 황제는 그리스도의 강생에 대한 신학적 논쟁에서 비롯된 종파 분열로 교황과 서서히 결별하고 있었다. 이 같은 어수선한 상황에서 클로비스의 개종은 '세계사의 중대한 사건 가운데 하나'로 인식될 정도로 교회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나 개종을 계기로 본격화된 그리스도교 신앙과 게르만 문화의 만남으로 교회는 다시 한번 '적응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2. 서기 500년경 유럽의 상황

 

로마 제국의 최변방에 인접하여 살고 있던 프랑크족은 로마인들은 물론, 다른 게르만족들과 비교해서도, 생활과 문화 수준이 매우 낙후된 집단이었다. 이들은 5세기 중반 이전까지 로마에 복속되거나, 국경 지대 로마 군단의 용병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게르만족의 용병화는 이미 오랜 전통으로서, 로마 황제는 상대적 안정기였던 3세기 말에도 제국의 광대한 국경 수비를 위해서 게르만 전쟁 포로들을 용병으로 국경 지역에 거주하도록 하였다. 결국 프랑크족도 358년부터 '보호 구역'인 톡산드리아(Toxandria) 지역(오늘날 네덜란드의 캄펜 근처)으로 집단 이주하게 되었다. 그들을 이 지역에 정착시켰던 것은 이 지역을 경작시키고, 다른 게르만 부족과 제국 사이에 완충 지대를 형성하려는 전략적 목적 이외에도 매우 호전적이었던 프랑크족을 용병으로서 제국 군대에 고용하려는 군사적 이유가 있었다.1) 프랑크족의 몇몇 전사들은2) 탁월한 군사적 공헌을 함으로써 4세기 후반에 이미 로마 군단의 최고 사령관으로도 활약했다. 이들은 로마 시민권을 획득함은 물론이고, 집정관직을 차지했으며, 바우토(Bauto)의 딸은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장남과 결혼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게르만 문화와 로마 문화의 만남은 이미 상당 기간 진행되어 왔었고, 프랑크족에게 로마인들의 문화와 그들의 종교인 그리스도교가 전혀 낯선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보수적 성격의 프랑크족은 다신교적 종교 관행을 쉽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이교도로 남았다. 예를 들면 클로비스가 속했던 메로빙거 왕조는 자신들의 시조인 메로베히(Merowech)가 반인반수의 모습을 한 바다의 신(bistea Neptuni Quinitauri similis)으로부터 유래되었다고 믿으면서 이를 숭배했다.

 

클로비스의 아버지 킬데리크 역시 로마 군대의 지역 사령관으로서 몰락해 가는 로마 제국의 군대에 복무했고, 동시에 투르네를 거점으로 하는 소왕국의 왕(1653년 발굴된 킬데리크의 무덤에는 '왕 킬데리크'(Childerii regis)라는 글자가 새겨진 인장 반지가 발견되었다.)으로서 독립적인 정치 세력을 형성할 정도로 내실을 다지기도 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476년) 뒤에도, 킬데리크는 자신이 통치하는 영토에 살고 있던 로마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비록 이교도였으나 그는 로마인들의 보호자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또한 로마인 통치자, 토착 권력 집단 그리고 로마인 주교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도 지속되었다.

 

그런데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은 프랑크 왕국과 인접한 서고트 왕국이었다. 킬데리크의 아들 클로비스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두 왕국 사이의 긴장 관계는 점차 고조되어 갔다. 젊은 왕위 계승자인 클로비스의 공격적인 영토 확장 정책은 르와르 강 이남의 프랑스와 스페인 반도를 지배하고 있던 서고트 왕국의 지배권에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같은 변화하는 상황 아래 클로비스는 프랑스 지역에 잔류해 있던 로마인들의 지원을 절실하게 필요로 했다.

 

 

3. 개종의 어려움

 

기존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프랑크족은 로마 제국에 들어왔을 당시 아리우스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니고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곧바로 어느 민족보다도 신속하게 우상 숭배의 이교 사상을 버리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수 있었다."3) 그러나 클로비스의 개종은 일반적으로 생각되던 것처럼 수월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선 무자비한 정적(政敵) 숙청과 같이 프랑크 왕국의 형성 과정에서 나타났던 클로비스의 야만성은 그리스도교적 윤리에 부합하지 않았다. 또한 선친의 친로마적 정책 대신에 프랑크 왕국의 팽창 정책 전개로 게르만족과 로마 유민들 사이에 긴장 관계가 고조되었으며, 게르만족의 토착 신앙 또한 새로운 종교로 개종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더욱이 다신교적 종교 관행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일부 귀족들의 거센 저항(populus qui sequitur non patitur relinquere deos suos)을 클로비스 자신도 두려워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직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지 못했고 동쪽의 알레만니 왕국, 남쪽의 서고트 왕국과 군사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상황에서, 정치, 군사적으로 귀족들의 지원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클로비스는 부족민들이 믿고 있던 전통 신앙을 포기하고 새로운 종교로 수월하게 개종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동시에 주위의 다른 게르만족들 대부분이 이단으로 정죄되었던 아리우스파로 이미 개종된 상태이기 때문에,4) 5세기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제국의 붕괴와 더불어 종교 분열을 걱정해야 했다. 따라서 갈리아의 가톨릭 교회는 프랑크족이 이단적 종파에 휩쓸리기 전에 선교 사업을 완성해야 하는 이중적 부담을 지고 있었다. 실제로 490년대 초반부터 메로빙거 왕실에도 아리우스 신앙이 침투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클로비스의 누이 란테힐데(Lantechilde)가 이미 '고트족의 종교'인 아리우스파로 개종한 상태였고, 또 다른 누이 아우도플레다(Audofleda)는 동고트 족의 왕 테오데리와의 결혼(493년)으로 아리우스 신앙을 신봉하게 되었다.5) 결국 교회는 프랑크족을 사이에 두고 아리우스파와 선교 경쟁을 벌여야 했기 때문에, 클로비스의 개종은 게르만적 토착 신앙의 극복과 이단적 아리우스 신앙과의 대결이라는 긴박하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 진행되었다. 갈리아 교회는 서서히 아리우스 신앙에 감염되어 가던 새로운 지배 집단인 프랑크족을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반드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야만 하는 시대적 사명을 잘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4. 프랑크족의 왕 클로비스 세례를 받다

 

1) 승자가 패자의 종교를 받아들이다

 

로마 제국이 해체되어 가는 상황에서 갈리아 지역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클로비스는 게르만 토착 신앙을 희생시키고, 피정복민인 로마인들의 종교였던 그리스도교로 입교했다. 아래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여기에는 다양한 배경들이 상호 작용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아마도 우월한 로마 문화에 대한 동경심 외에도, 클로비스의 실리주의적 상황 판단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패권을 장악한 프랑크족의 인구는 절대 소수로, 클로비스 지휘 아래 있는 전사들 수는 80,000명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6)

 

따라서 로마 유민들이 믿고 있는 그리스도교에 호의적인 정책을 전개하는 것이 프랑크 왕국의 지배권 확립을 수월하게 하고 이에 따른 신생 왕국의 통치 구조를 견고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을 클로비스는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또한 종교적 동질성을 통해서 옛 로마 제국 주민들과의 정치, 사회적 유대 강화를 계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클로비스의 개종을 단순히 정치적 논리로만 설명한다면, 이는 역사적 사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한 가지 더 언급해야 할 사실은, 게르만족의 초기 개종은 '평화적인 선교'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정치, 군사적 패자인 로마인들이 승자인 게르만족에게 자신들의 종교를 강압적으로 선교할 수 없는 당시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는 아마도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8세기 후반 독일 북쪽 지역에서 카롤링거 왕조의 팽창 정책과 병행되었던 무력적 개종과는 달리 클로비스의 개종은 전쟁과 무력이 낳은 강제적 결과가 아니었다.

 

2) 교회의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선교 정책의 승리

 

클로비스의 부친 킬데리크가 죽자(481년), 랭스의 주교 레미지오7)는 부친의 권력을 계승한 젊은 클로비스에게 선친이 로마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편지를 보낸다. "당신이(클로비히) 벨기카 세쿤다(Belgica secunda)를 통치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제 당신은 당신의 선조들이 항상 해 왔던 것처럼 일을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입니다.......당신은 순수하고 정직하게 호의를 베풀어야 할 것이며, 주교들을 존중하고 항상 그들의 충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당신이 그들과 뜻을 같이하는 즉시 당신의 영토는 번영할 것입니다."8) 이 서한은 갈리아 지역의 새로운 통치자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려는 주교의 외교적 노력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프랑크족을 더 이상 야만적인 용병 집단이 아닌 협상의 대상으로 파악하려고 했던 레미지오 주교의 정치적 감각을 보여 주고 있다.

 

로마 제국의 행정 조직이 사실상 마비된 상황에서 교회만이 로마 유민들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주교 레미지오는 로마와 프랑크족 사이의 전통적인 우호 관계를 존속시킴으로써 격동기의 피해를 최소화하려 했던 것이다. 동시에 주교는 게르만족에 대해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선교 정책을 전개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정확히 판단한 주교의 지속적이고 헌신적인 사목 활동은 클로비스의 개종에 견인차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따라서 클로비스의 개종을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클로비스 부인의 부단한 권유와 알레막니족과의 전투에서 나타난 '신의 신비적 섭리'9)의 결과로 해석하려는 기존의 연구 경향은 이제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클로비스의 회개와 개종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이는 주교의 치밀하고도 끈질긴 선교 계획이 추진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갈리아 지역의 새로운 게르만 지도자를 로마 교회의 후원자로 만들고자 했던 레미지오의 주도 면밀한 선교 활동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프랑크 왕국의 사절단이 결혼 적령기에 있던 클로비스의 결혼 상대자로 아리우스파가 주민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던 인근 부르고뉴 왕국에서 가톨릭 여인을 물색했다는 기록에서도 왕의 배후자 선택 문제에까지도 주교가 깊이 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10)

 

동시에 레미지오는 사제로서의 임무 수행에도 충실했다. 프랑크족을 그리스도교의 세계로 인도하려는 주교의 노력은 주교가 세례 이전에 클로비스의 교리교육을 담당했다는 사료의 기록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레미지오 주교는 왕에게 "참된 신앙에 귀의하고 자신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우상 숭배를 금하도록"11) 경고성의 설교를 했으며, 또한 "진정한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믿어라."12)라고 가르쳤다. 귀족들을 포함한 부족민들도 "그들을 그리스도교로 인도한 사람이 레미지오 주교임을 인정했다."13) 따라서 개종과 관련해서 기존의 연구에서 그 동안 등한시되었던 레미지오 주교의 주도적 역할에 새롭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례 후에도 레미지오 주교는 왕의 정치적 조언자로서 활동하면서 클로비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둘 사이의 인간적 유대감은 매우 돈독했다고 한다. 왕의 여동생이 갑작스럽게 죽자, 주교가 왕에게 보낸 위로 서한에서도 왕과 주교의 인간적 유대감이 잘 표현되고 있다. 511년 로마 교황에 대한 클로비스의 기증14)과 510년 경 작성된 프랑크족의 종족법인 살리카 법전(Lex Salica)이 갈리아에 잔류한 로마인들을 법적으로 보호하고 이들의 자유를 보장했다는 사실에서도 주교의 정치 종교적 역량을 잘 엿볼 수 있을 것이다.

 

3) 여성과 종교

 

게르만 종족들의 개종 과정에서 여성들이 정치, 종교적으로 두드러진 활동을 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15) 클로비스의 부인 클로틸드는 부르고뉴 출신으로 결혼(492년 또는 493년) 전에 이미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했기 때문에,16) 프랑크족의 개종과 관련된 사료에서도 왕비의 막후 역할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기존의 연구에서는 왕비의 막후 역할이 과장되게 부각되기도 하였다.17) 물론 남편을 개종시키려던 그녀의 부단한 노력과 두 아들인 잉고메르(Ingomer)와 클로도메르(Chlodomer)를 남편보다 먼저 세례 받게 한 왕비의 헌신적인 노력은 고려되어야 할 것이며, 동시에 "알레막니 전쟁 이후 개종을 결심한 클로비스의 말을 들은 왕비 클로틸드가 레미지오 주교의 왕림을 요청하고, 주교가 왕의 교리교육을 담당하도록 요청"한 공헌은 충분히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역할을 과장 해석하는 연구 경향은 이제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부인의 반강제적 강요로 클로비스가 개종을 결심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으나, 아들들의 세례와 관련해서, 두 명의 아들이 동시가 아닌, 시간적 차이를 두고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이는 남편의 동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었을 것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프랑크족의 개종 자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왕과 왕실 내부에서 신중하게 고려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지 정치적 절차, 특히 새로운 신앙의 수용에 대한 부족민들의 거부감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4) 집단 개종

 

세례식은 랭스에서 레미지오 주교의 주관으로 거행되었다. 여기서 왕과 왕의 여동생뿐만 아니라, 3,000명의 집단 개종18)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숫자는 아마도 사도행전 2장 41절로부터 유래했을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개종에 대해서 거부감을 보이던 귀족들과 부족민들도 부족 집회에서 "우상 숭배의 관습을 포기하고 영원하신 하느님을 숭배하기로 결정했다."19) 그러나 투르의 그레고리오가 강조했듯이, 개종의 과정은 가시밭 길이었다. 이 과정에서 레미지오 주교와 몇몇 성직자들은 왕과 함께 귀족들을 개별적으로 설득해야 하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따라서 8세기 후반 칼 대제가 이루었던 '강압적인 집단 세례'의 개념은 메로빙거 왕조의 개종 과정에 적용될 수 없을 것이다.

 

5) 클로비스의 정치적 동기

 

첫째로 클로비스는 개종을 통해서 옛 로마 제국 주민들과 유대를 굳힐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고, 이로써 프랑크 왕국의 지배권 확립에 도움을 주고자 했다. 따라서 클로비스의 개종을 "일류급의 정치가의 행위"로 파악한 아우구스티노 프란츤의 견해20)는 유효하다. 실제로 클로비스의 이러한 정치적 계산은 적중했다. 세례와 더불어 개종이 기정 사실화되면서, 왕비의 고향인 부르고뉴 지역의 가톨릭 성직자들이 친프랑크 왕국적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21) 따라서 이 지역에 영토 확장 계획을 가지고 있던 - 실제로 그는 세례 직후인 500년에 부르고뉴를 침공했다 - 클로비스는 개종을 통해서 내부의 공모자들을 규합할 수 있는 기회를 노렸던 것으로 추측된다.

 

메로빙거 왕국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던 서고트 왕국의 알라리크 2세(484-507년)는 495-496년 경 투르의 주교 볼루시앙과 베루스, 아를의 케사리우스 주교를 클로비스와 공모했다는 죄목으로 추방시키거나 감금했다.22) 이 사건에서도 밝혀지고 있듯이, 클로비스는 개종함으로써 자신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라이벌인 알라리크에 대항하는 공동 전선을 구축하는 데 서고트 왕국 내의 가톨릭 세력을 이용하려는 정치적 복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알레막니족과의 톨비악 전투(496년)를 계기로 클로비스가 개종을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는 이미 오래 전부터 계획되었던 정치적 목적의 개종이었다. 따라서 클로비스의 개종은 신앙심에서 우러나오는 순수한 종교적 동기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개종은 왕국 내부의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는 계획된 클로비스의 종교 정책의 일환으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신생 왕국의 왕으로서 그는 내부의 결속과 외적 팽창을 위해서 로마 귀족과 또 이들과 연결된 주교들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했을 것이다.

 

동시에 클로비스는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함으로써 자신의 군사적 팽창 정책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무기를 획득한 셈이다. 아리우스파를 신봉하고 있던 서고트와 부르고뉴 왕국과의 전투를 앞두고 그는 이 전쟁을 이단에 대한 '십자군 원정'이라는 정치적 선전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서고트 왕국의 지배에 있던 프랑스 남부의 대주교와 주교들에게까지도 자신의 세례를 알렸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클로비스가 서고트 지역의 로마인들과 교회에 지원을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507년 서고트 전쟁 당시 클로비스 스스로 이 전쟁을 '아리우스파에 대한 성전'(聖戰)23)으로 선전했다는 사실에서도 클로비스는 메로빙거 왕국의 영토 확장에 가톨릭 세력을 규합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종교의 정치화 현상'이 여기서도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클로비스의 개종은 엄격히 말하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선교 결과라는 해석은 절반의 정당성만을 가진다. 게르만족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그들의 자의적인 선택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 점은 토착화 문제와 관련해서 시사하는 바가 많다. 종교의 토착화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곧 위로부터의 토착화와 아래로부터의 토착화가 동시에 성공적으로 이행되어야 한다. 교리의 전파와 동시에 수용자의 적극적인 준비 자세가 전제되어야 진정한 토착화가 가능할 것이다. 이때 수용자는 현실적이고 구복 신앙적인 이해타산을 고려하고 있다는 점을 교회는 인식해야 할 것이다. 게르만족 역시 로마인들의 종교였던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이들과 정치, 문화, 경제적 영역에서 동질성을 얻고자 하였다.

 

 

5. 그리스도교 신앙과 게르만 문화의 만남 : '그리스도교 신앙의 게르만화', '게르만 문화의 그리스도교화'

 

클로비스의 개종이 철저한 유일신주의로의 개종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오히려 클로비스는 그리스도를 자기를 도와 승리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강력한 정치적 후원자로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24) 곧 클로비스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게르만적으로 해석했던 것으로 보인다.

 

교회 역시 당시의 격변하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급진적인 구원 사업을 전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개종한 게르만족들의 토착 문화와 신앙을 포기하도록 강요하기보다는 그들의 문화적 전통을 인정하는 유화 정책이 강조되었고, 선교 방법도 매우 포용적 성격을 띠었다. 그 결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토착화 과정에서 게르만족의 관습은 가급적 존중되었고, 그들의 문화적 감정을 자극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복음이 전파되었다. 종교와 문화 사이의 경계가 설정되어 갔으며, 게르만족의 신전을 파괴하거나 종교적 관행을 말살하기보다는 이를 그리스도교적 방향으로 유도하고 '계몽'시키려는 방안들이 고안되었다.25)

 

이 같은 이유로 그리스도교 신앙은 시간적 여유를 가지면서 서서히 전파되고, 그 결과 그리스도교 윤리가 사회 윤리로서 자리를 잡아갔으나, 게르만족의 토착 신앙은 오랜 동안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9세기 초반 칼 대제 시대(800-814년)에도 나무, 샘, 돌과 같은 자연계의 모든 것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정령 숭배 사상이 상당히 만연되었던 것으로 보아 토착 신앙에 대한 믿음은 중세 초기의 게르만 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상당히 많은 사람들, 특히 여자들이 주술 행위를 자행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던 사례들에서도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믿음은 보편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26)

 

11세기에도 보름스의 주교 부르카르트(Burchard)는 "사람들이 아직도 나무, 돌, 샘에서 기도하고 제사를 지낸다."라고 한탄했고, 같은 시기에 독일 남부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에 있는 성 엠메람(St. Emmeram) 수도원의 아르놀드(Arnold)가 "아직도 이교도들이 모여 점을 치고 예언 행위를 하는 곳에 있는 나무를 베면 벌을 받는다고 믿은 어리석은 농부들이 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민속 신앙은 중세 초기 내내 지속되었다.

 

그러나 모든 주술적 행위들이 용인된 것은 아니었다. 교회는 허용의 폭을 제한했고, 그 결과 금지된 주술 행위와 허용된 주술 행위 사이의 구분이 명확해졌다. 게르만족의 주술 행위에 대한 중세 교회의 이 같은 '선별적 수용 정책'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27) 이는 교회나 선교사들이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는 토착 신앙과 관련해서 그들의 '눈높이'를 낮추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별적 수용 정책은 한편으로는 개종자들에게 개종의 '부담감'을 덜어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일부 제사 의식을 스스로 포기해야 했으나, 많은 현세 구복적 전통 신앙을 유지할 수 있다는 믿음은 개종자들에게 어느 정도 위안을 주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리스도교 신앙과 토착 신앙 사이의 이 같은 상호 융화 현상은 새로운 개종자를 얻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28) 게르만족의 토착 신앙을 전체적으로 평가 절하하는 일은 그들의 문화와 종족적 감정을 모욕하고 멸시하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그러나 게르만족에 대한 선교 사업은 그 반대로 토착 신앙이 갖은 사회 문화적 가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데에 목표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 주술 행위들에 대한 교회의 엄격한 태도에도 이교적 관행은 쉽게 뿌리 뽑히지 않았다. 예를 들어, 533년 오를레앙 공의회에서 우상에 제물을 바쳐 온 가톨릭 교도에 반대하는 법령이 제정되었고, 이 법령은 8년 뒤 같은 도시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재확인되었다.29) 그러나 특히 농촌으로 갈수록 전통적인 관습은 오래 지속되었고, 일부 성직자들은 결국 이들과 타협점을 찾아야만 했다. 질병 치유 방법으로 사도 신경을 낭송하라는 아를의 주교 케자리우스의 권유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오랫동안 도시를 중심으로 한 종교이었기 때문에, 서유럽에서 가장 로마화된 지역조차 그리스도교가 농촌에 전파된 정도는 미미했다. 콜룸바누스와 같은 아일랜드 선교사들이 활동했던 7세기가 되어서야 농촌에도 그리스도교가 유입될 수 있었다.

 

이런 가운데 게르만 문화가 그리스도교화하는 징후들도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프랑크족의 매장 풍습의 변화는 여기서 시사하는 바가 많다. 개종 이전의 죽은 자들은 의복을 완전히 갖추고 무기, 식기와 보석으로 치장한 채 매장되었다. 그러나 6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그러한 매장 전통은 교회 내부나 주위에 매장하는 관습으로 대체되었다. 로마 교회가 이처럼 점진적인 선교 정책 노선을 채택하면서, 게르만적 토착 신앙과 그리스도교 신앙 사이의 융합 현상(Synkretismus)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덕망 있는 성직자들도 유성(流星)을 질병, 기근, 전쟁의 징후로 해석하였다. 특히 성인 공경이나 성유물 숭경 풍조의 강화 현상도 이러한 융합 현상의 결과물이었다.30) 물론 부정적인 영향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왕이 공의회를 소집하고 주교 임명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교회에 대한 왕권의 간섭이 강화되면서, 점차 '정치와 종교의 밀월 관계'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는 결국 1077년 카놋사의 파국으로 치닫는 계기가 되었다.31) 이러한 세속 권력자의 종교적 우위권은 사유 교회 제도(Eigenkirchenwesen)와 같은 교회에 대한 게르만족의 물권법적 해석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융화의 흔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게르만족의 옛 축제들은 새로운 이름으로 지속되었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성소(聖所)도 계속 존립했다.32) 또한 성인에게 봉헌된 거룩한 숲이 등장했고, 물의 요정이 살고 있다고 숭배되던 샘은 성모 마리아의 샘이나 성녀의 샘으로 이름이 바뀌어 계속 존속되었다. 신년이나 하지 등의 절기에 게르만족이 갖고 있던 풍습 역시 그대로 살아남았고, 이러한 관행 가운데 일부는 아직도 남아 있다.

 

 

6. 맺는말

 

결론적으로, 게르만족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초대 교회와는 또 다른 형태의 그리스도교 문화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형성된 서양 중세 문화의 출발점이 바로 클로비스의 세례였다. 바오로에 의해서 지중해에 전파된 그리스도교가 로마 문화와 결합하면서 새로운 신학을 만들어 내었다면, 이제 중세의 유럽 역시, 이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새로운 그리스도교 문화를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이는 게르만족의 개종이 이천 년의 교회사에서 갖는 중요한 의미일 것이다.

 

'토착화 문제'와 관련해서, 클로비스의 개종은 토착화의 모범적인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보수적인 게르만족을 교화하는 힘든 과정 속에서도 교회는 사도 바오로가 말씀한 믿음, 희망, 사랑의 실천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 신학이나 전례 생활 등을 게르만족의 전통과 문화적 특성에 맞도록 변화, 발전시키려는 교회의 노력은 곳곳에서 엿보인다. 그 결과 그리스도교 신앙과 게르만 문화라는 두 이질적인 문화가 만났을 때 일어날 수도 있었던 마찰과 충돌은 교회의 융화적이고 포용적인 자세로 미연에 방지될 수 있었다.

 

 

약정 토론 1 - 신교선(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와 게르만 문화의 만남을 클로비스의(Clovis/ Chlodwig) 세례 사건에 비추어 다루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 만남은 정치적, 종교적으로 비할 데 없이 큰 영향을 미친 역사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민족의 대이동으로 세력을 확장해 가던 게르만족은 결국 476년에 남하하여 서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를 폐위시킨다. 서로마 제국이 막을 내림으로써 서방 세계는 이제부터 게르만의 지배에 놓이게 된다(A. 프란츤, [세계 교회사], 분도출판사(개정 증보판), 2001년, 142면).

 

한편 서로마 제국이 무대에서 사라지던 476년 갈리아 지방 곳곳에는 게르만 출신의 지배자들이 왕 노릇을 하며 각기 세력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Jean-Marie Mayeur·Charles Pietri, "Der lateinische Westen und der byzantinische Osten", Lucie Pietri 편, Die Geschichte des Christentums:Religion Politik Kultur, 431-642년), Bd.3, Freiburg·Basel·Wien, 2001년, 343면). 이들 게르만 왕국들은 로마 제국의 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각기 차이를 보였다. 그들 가운데 제국 외곽에 머물던 많은 부족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 이단에 물들어 있었다.

 

프랑크족의 왕 클로비스(481-511년)가 부하 3,000여 명을 이끌고 랭스(Rheims)의 주교 레미지오에게 함께 세례를 받아 입교하는 사건은 온 왕국을 그리스도교화하는 데 도화선이 되었다. 이어 갈리아 남부의 지배 세력으로 아리우스의 이단에 물들어 있던 서고트족을 멸망시켜 그리스도교 문화가 활짝 피어오른다.

 

조금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로마 제국 안에서 교리의 통일을 위하여 곧 제국의 일치와 평화를 위하여 모든 분쟁을 없앨 목적으로 325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막 연설과 더불어 주교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니케아(Nicaea) 공의회가 소집된다.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였다. 아리우스는 예수님의 '하느님과의 동일 본질'(oJmoousio? consubstantia)을 부정하고 종속성만을 인정했다. 사실상 공의회를 주도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신조를 제국의 법으로 선포했으며 이에 불응한 아리우스와 두 명의 주교를 일리리쿰으로 귀양 보낸다.

 

그리스도론을 정립하려는 의도로 공의회는 거듭 열린다. 콘스탄티노플(381년) - 칼케돈(431년) - 에페소(450년). 니케아 공의회를 포함하여 이들 네 공의회 모두 동방에서 개최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비잔틴 제국의 막강했던 힘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동로마 제국은 이렇게 비잔틴 문화를 꽃피우며 1453년까지 이어간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개최했던 이들 공의회 구성원은 대부분 동방 주교들이었으며 서방 주교는 소수였다. 이같이 여러 측면에서 서로마는 동로마에 뒤져 있었던 때에 아리우스 논쟁으로 양 교회의 갈등은 더욱 심화된다.

 

서로마 제국에서는 아리우스파의 사상이 금지되어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죽음을 계기로(337년) 니케아 신조를 따르던 서방의 콘스탄스(337-350년)와 이를 반대하던 콘스탄시우스 2세(337-361년)의 등장으로 로마 제국은 사실상 둘로 갈라진 셈이었다. 더구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395년에 제국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어 동쪽은 아르카디우스에게, 서쪽은 호노리우스에게 맡긴다. 지리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여건이 아주 다른 이들 제국은 이제 사실상 분열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정치 사회적으로는 이같이 동·서 로마 제국의 갈등과 맞물려 그리스도교 역시 흔들리고 있었으며 예수 탄생 후 수백년이 지났지만 교의나 신학이 제 모습을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나 신학이 차분히 자리잡고 성장할 여건이 아니었다 보겠다. 민족들의 대이동과 이에 따른 잦은 싸움과 동서 문화의 차이 등이 그 주요 원인이었다 하겠다.

 

발제자는 "클로비스의 개종(서기 500년경)을 통해서 본 그리스도교 신앙과 게르만 문화의 만남"에서 그리스도교가 어떤 경로로 게르만 문화에 접목되는지에 대하여 상세히 또 체계적으로 다섯 단계로 나누어 묘사해 주었다. 클로비스 개종의 중요성에서부터 500년 경 갈리아를 중심으로 한 유럽의 상황, 개종에 뒤따르는 어려움, 클로비스의 세례에 이어 결론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과 게르만 문화가 주고받은 영향을 제시해 주었다.

 

논평자로서 다시 한번 발제자의 논문을 요약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짤막짤막하게 간추려진 단락마다 긴 역사의 흔적이 집약적으로 알아듣기 쉽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몇 가지 질문을 하는 것으로 논평을 대신하고자 한다.

 

1. 발제자는 랭스의 레미지오 주교의 지속적이고 헌신적인 선교와 사목 활동이 결국 클로비스를 개종으로 이끌었다고 하였다(4장 2절). 따라서 그리스도인이었던 "부인 클로틸드의 부단한 권유와 알레막니 족과의 전투에서 나타난 '신의 신비적 섭리'의 결과로 보는 연구 경향은 재고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클로비스의 정치적 동기를 논하는 4장 5절 끝 부분에서는 "클로비스의 개종은, 엄격히 말하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선교의 결과라는 해석은 절반의 정당성만을 가진다. 게르만족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그들의 자의적인 선택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앞에서는(4장 2절) 레미지오 주교의 선교 결과에 중점이 실려 있는데, 뒷부분에서는(4장 5절) 오히려 클로비스와 그 추종자들의 내적 결단, 신비적 사건임이 강조된다. 이에 대하여 발제자의 견해를 묻고 싶다.

 

참고로 논평자로서 소견을 밝히고 싶다. 당대의 역사가 그레고리우스(Gregor von Tours)에 따르면, 클로비스는 알라마니족과의 톨비악 전투에서(496년) 패색이 짙어올 때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전통적 다신교가 더 이상 자신에게 승리를 안겨다 줄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에 클로비스는 결단을 내려서 자신의 아내 클로틸드와 레미지오 주교가 그토록 권유하던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것을 하느님께 맹세한다. 인간적 계산으로는 도저히 승리를 예측할 수 없던 전투에서 드디어 승리를 거둠을 계기로 부하 장병 3,000여 명과 더불어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혹시 위 두 해석을 함께 보는 방법은 어떻겠는가? 레미지오 주교의 끈질기고도 계획적인 선교 활동이 위기를 맞은 클로비스에게 긍정적, 적극적으로 작용하여 회개와 개종을 낳았다고 볼 수는 없겠는가? 아니면 옛 로마 제국 주민들과의 유대 강화와 이에 따른 프랑크 왕국의 지배권 확립 등 정치적 목적에서 계획적으로 한 개종이라고 보아야 하겠는가?(4장 5절).

 

2. 가톨릭 역사학자 도우슨(Christopher Dawson)은 유럽을 인종이나 지리적 여건과는 상관없는 '문화적 집합체'로 특징지으면서, 서유럽 문화권을 특징짓는 세 가지 구성 요소를 제시한다. 그는 이들 세 요소가 500년 경 프랑크 제국 시대에 융합되었다고 보며 800년 경 카알 대제의 제국의 성립을 서유럽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해 보다 구체적으로는 정치적 생활은 로마 제국에, 정신적 유대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지적인 유산은 고전 문화에 뿌리박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도우슨은 오늘날 서유럽 문화의 바탕을 마련해 준 원동력이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이었다고 밝힌다(사목연구총서 1-[세계사], 한국사목연구소, 1990년, 17면).

 

아울러 A. 프란츤은 "그리스도교와 게르만 정신에 의한 변화 없이 고대는 결코 미래를 가지지 못하였을 것이다."라고 한 쉬타인바흐의(Steinbach) 말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교적 유럽을 탄생하게 한 것, 곧 오늘의 유럽인들에게 그리스도교와 고대 문화를 동시에 가져다 준 공헌은 바로 가톨릭 교회에 있다고 말한다.

 

이 점에 대해 발제자의 견해를 듣고 싶다. 혹시 그에 준하는 또 다른 요소가 있지는 않았는지, 다른 주장은 없는지, 아니면 도우슨과 프란츤의 견해를 거침없이 받아들여도 되는지 알고 싶다.

 

3. 발표문 중 4장 3절의 '여성과 종교'에서 클로비스 통치 당시 여성의 정치적 종교적 활동이 두드러진다고 하였다. 일례로 클로비스의 개종 결심을 감지한 아내 클로틸드가 레미지오 주교를 초청, 교리교육 담당까지 부탁하는 서한을 보내는 일을 들었다.

 

여기에서 첫째로 또 다른 여성들의 두드러진 활동이 있었는지 묻고 싶다. 아니라면 '여성과 종교' 보다는 '클로틸드의 선교' 또는 '왕비와 교회'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 않겠는가?

 

둘째로 발제자가 지적한 클로틸드 당시에 견주어 오늘날 여성이 그리스도교 발전과 토착화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데 걸림돌은 무엇이며 어떤 역할이 더욱 강조되어야 하겠는가?

 

4. 클로비스 개종에 비추어 본 그리스도 신앙과 게르만 민족의 만남은 상호 문화적 충돌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 보완적 방향으로 발전했다고 발제자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클로비스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를 자기 나름대로 자신에게 승리와 도움을 줄 것으로, 곧 게르만적으로 해석했으며, 교회 역시 게르만족의 전통 문화와 신앙을 포용하는 정책을 폈다.

 

당시 그리스도 교회는 로마 제국이 지배 민족들에게 그들의 토착 문화와 전통을 존중해 주는 정책을 폈던 것을 본받았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토착화 과정에서도 게르만족의 전통 문화는 그대로 존중되어 그리스도 신앙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계몽되었으며 사회 윤리 역시 그리스도교 신앙에 걸맞게 발전해 갔다.

 

우선 하고 싶은 질문은 로마 교회가 택한 점진적 선교 정책과 게르만 문화가 큰 충돌 없이 서로 융합될 수 있었던, 곧 융합주의(Syncretismus)가 잘 이루어진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인지 답변해 주길 바란다. 그런데 왜 그로부터 1300여 년이 지난 뒤에 우리 한국 땅을 디딘 가톨릭 교회는 왜 그토록 끔찍한 문화 충돌과 박해에 직면해야 했는가? 단지 동서에서 오는 차이로 보아 넘길 수 있겠는가? 아니면 그 엄청난 문화 충돌은 피할 수 없는 필연적 과정이었는가?

 

다음으로 게르만족이 아리우스주의에 쉽게 물든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떤 과정과 경로로 그들이 아리우스의 이단을 별 충돌 없이 수용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다. 그리고 게르만족의 개종이 단지 정치·사회적 차원에서 뿐 아니라 내적·영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면 그들을 사로잡았던 그리스도교의 매력은 무엇이었는가?

 

5. '그리스도교 신앙과 게르만 문화의 만남'에서 우리가 한국 그리스도교의 토착화에 교훈 삼아야 하는 바는 무엇인가?

 

 

약정 토론 2 - 이영재(숭실대학교 강사)

 

 

1. 클로비스의 개종 연도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많다. 브라이언 티어니(Brian Tierney)의 경우에는 496년으로 주장하고 있고, 그 밖에도 498년 또는 506년 등 학자들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는데 정확한 개종 연도를 알고 싶다.

 

2. 발표문 4장 5절에서 "그는 이 전쟁을 이단에 대한 십자군 원정이라는 정치적 선전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클로비스는 이 전쟁을 아리우스파에 대한 성전으로 선전했다."라고 하였다. 독일인 학자 칼 에르드만(Karl Erdmann)은 [십자군 사상의 기원](Die Entstehung des Kreuzzugsgedankens, Stuttgart, 1935년. 영역본 The Origin in the Idea of Crusade, Princeton, 1977년)에서 십자군 운동의 기원에 대해 연구하였다. 여기에서 에르드만(Erdmann)은 십자군 운동의 모체가 되는 세 가지 운동을 성전(the Holy War), 신의 평화 운동, 성지 순례로 언급한 바 있다. 또한 성전의 기원에 관해서는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신약의 루가 복음 14장 23절에 나오는 혼인 잔치에 관한 내용에서, "주인은 다시 종에게 이렇게 일렀다. '그러면 어서 나가서 길거리나 울타리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도록 하여라. 잘 들어라. 처음에 초대받았던 사람들 중에는 내 잔치에 참여할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억지로라도 데려다가'의 구절을 근거로 하여 죄에 대한 처벌과 가해 행위에 대한 방어 수단으로서 폭력의 사용을 허용하고 있는 예를 학자들은 발견했던 것이다. 특히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에게서 가톨릭 권위의 완강한 거부자들인 도나투스주의자들의 강제를 승인하였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클로비스 시대에 이러한 성전, 십자군 운동의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한다. 십자군 원정은 1095년 교황 우르반 2세의 끌레르몽 종교 회의를 통해서 시작되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1087년 이슬람 군대에 대항한 피사의 전투에서 이미 원형 십자군 운동(proto-crusade)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무엇을 십자군 운동으로 규정지을 것인가에 대해 여러 요소가 언급된다. 이러한 점 때문에 클로비스 시대에 그가 이단에 맞서서 전쟁을 하였겠지만 그 당시의 전쟁을 십자군 전쟁 또는 성전의 개념으로 규정짓는 것은 이러한 용어들이 지닌 함의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3. 발표문의 4장 4절에서 집단 개종에 관한 내용에 대해서도 질문을 하고 싶다. "우상 숭배의 관습을 포기하고 영원하신 하느님을 숭배하기로 결정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3장에서는 이와 반대되는 내용으로 "더욱이 다신교적 종교 관행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일부 귀족들의 거센 저항을 클로비스 자신도 두려워하였던 것으로 보인다."라고 하였다.

 

과연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개종을 할 수 있었는지 보충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그 많은 귀족들의 저항을 어떤 방법을 통해 극복할 수 있었는지 알고 싶다. 예를 들어 개종에 대한 물질적 보상이 있지는 않았는가, 아니면 무력을 통한 강제적인 면을 지녔는가 하는 것이다.

 

4. 메로빙거 왕조 시기에는 구약성서에서 등장하는 국왕의 이미지를 수용하여 도유식을 통한 국왕의 신성성이 상당히 강조되었고, 실질적인 권력이 궁재들에게 있었다.

 

이 점은 게르만족이 그리스도교를 통치 사상으로 수용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며, 이후 칼 대제(Karl der Grosse) 때에 그리스도교적인 사상과 더욱 융합됨을 알 수 있다. 곧 800년 성탄절에 칼 대제가 교황 레오 3세의 대관식을 통해서 황제의 제위에 오르게 된다. 이 사건은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에게는 황제의 신성성을 강조하는 것과 함께 일개 야만족의 군주가 고대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음을 의미하였던 반면, 교회에서는 군주의 대관이 성직자를 통해 이루어져서 교권이 군주권보다 우위에 있음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사실 오늘날 유럽 문화의 원동력은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의 유일한 식자층이었던 성직자들이 통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어 지배 계층의 문화를 창출하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통치 이념에 깊이 침투해 들어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메로빙거 왕조 시기의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추가된다면 이후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약정 토론에 대한 답변

 

 

좋은 지적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먼저 신교선 신부님의 질문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에 관한 신 신부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선교뿐 아니라 정치적인 사항도 고려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레미지오 주교의 끈질긴 선교와 설득이 클로비스의 회개와 개종을 나은 것이라고 정리해 볼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 질문과 연관한 문제는 상당히 복잡하고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그리스도교 신앙이 있었기에 고대 문화가 살아남은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고대 문화가 처음부터 살아남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700여 년 간 거의 아사 직전에 있다가 1200년 대학이 성립될 무렵에서야 고대 문화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물론 고대 문화를 아사 직전까지 몰고 간 것도 그리스도교이고 그것을 다시 살려낸 것도 그리스도교입니다. 고대 문화가 근대에까지 전달되는데 그리스도교가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입니다. 서양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그리스도교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서양 문화를 그리스도교 문화라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세번째로 여성 문제에 관한 질문을 해 주셨습니다. 아시는 대로 유다교의 여성관은 신약 시대에 와서 거의 혁명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신약에서 여성의 역할은 긍정적인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관련해서, 특히 지하묘(Catacomb) 시대에 개종하는 사람들의 통계치를 살펴보면 여성의 비율이 월등하게 높습니다. 이를 보아도 초대 교회에서의 여성의 역할이 어떤지 알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헬레나와 클로틸데의 경우를 보아도 여성들의 역할이 특히 왕비의 역할이 컸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켄터베리 교구가 수립되는 것이 또한 바로 이 클로비스의 개종 시기입니다.

 

이 당시 로마의 교황이 성 아우구스티노가 아닌 또 다른 아우구스티노를 선교하도록 보냈습니다. 이 아우구스티노가 선교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결정적 배경에도 켄트 왕국의 왕비의 역할이 있었습니다. 노송브리아의 개종도 또한 왕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성의 역할을 많이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네번째로 아리우스주의가 왜 게르만족 사이에 그토록 빠르게 퍼져 나갈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초대 교회가 교리를 성립하는 데 처음에는 상당히 혼란을 겪게 됩니다. 왜냐하면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미 정죄되었음에도 교리에 관해 의견이 흔들리는 가운데 381년 콘스탄틴 공의회까지 거의 60년간 교리를 완전히 확립하지를 못합니다. 그 사이에 고트족의 선교사라고 하는 울필라라고 하는 사람이 성서를 고트어로 곧 민족어로 번역하는 것입니다. 이 번역을 통해 성서의 내용뿐 아니라 교리가 빠른 속도로 전파되게 됩니다. 이를 통해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가 게르만족 사이에 퍼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상황에 관해 질문해 주셨습니다. 사실 한국의 토착화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이영재 선생님의 질문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정확한 개종 연도에 대해 질문을 하셨습니다. 과연 정확히 언제 클로비스가 개종을 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일단 많은 학자들은 498년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497년 9월이나 10월경에 클로비스가 알레마니족과 전투를 하면서 신의 계시를 받습니다. 그리고 레미지오가 왕과 협상을 하고 다른 귀족 집단들을 설득하며 교리교육을 시키는 등의 일을 수행하는 데 한 1년 정도 걸렸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498년 성탄절 때 랭스에서 개종하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일반적인 견해인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로 십자군 원정과 성전에 관해 질문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에 좀 더 연구를 하고 난 다음에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셋째로 사료의 신빙성에 관한 문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그레고리우스의 사료가 어느 정도 과장된 면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겠습니다. 왜냐하면 주교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기꺼이 개종을 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570년경에는 사실 상당 수준의 개종이 이루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게르만족의 자발성에 대한 주교의 희망 사항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신교적 종교관을 버리고 만장일치로 개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3,000명이라는 숫자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만장일치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은 전체 중에 일부만이 개종을 하게 됩니다.

 

이상으로 간단하게 답변을 드려 보았습니다.

 

 

종합 토론

 

 

나기정:과연 이런 그리스도교와 라틴 게르만 문화의 만남 속에서 어떤 토착화의 과정이 있었는가를 중심으로 토론을 진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배영호:클로비스는 성인입니까?

 

차용구:아닙니다. 그런데 레미지오는 성인입니다.

 

김웅태:클로비스 시대는 왕성한 선교의 시대입니다. 로마 제국에 대해 게르만 민족은 세 가지 태도를 취했다고 합니다. 곧 무관심하거나, 침략하거나 그리스도교를 허용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가운데 레미지오는 매우 적극적으로 선교에 나서게 됩니다. 이 밖에도 각 부족을 향해 여러 독일 지역의 보니파시오, 영국 지역의 아우구스티노 등을 그리고리오 교황이 파견하였습니다. 레미지오는 그 중에도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당시 시간적으로나 인원으로나 미리 교육을 시킬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일단 영세를 시키고 난 후에 교육을 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결국 레미지오의 영향이 클로비스의 영향보다 더 크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차용구:선교의 측면뿐 아니라 당시 갈리아 지역이 사실상 공권력이 붕괴되고 로마를 대리할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주교는 사목뿐 아니라 로마인의 공권력의 대변인 역할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선교뿐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인 입장에서도 보니파시오와 상황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레미지오에게는 선교는 단순한 종교 문제가 아니라 생존 문제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클로비스의 왕권이 공고화된 시기도 아니었기 때문에 부하들의 반발을 각오하면서도 개종을 한 데에는 클로비스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곧 종교의 정치화라는 관점에서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웅태:물론 저도 클로비스가 순수하게 종교적인 목적을 위해서만 개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왕들의 세례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경우가 또 다른 예입니다. 클로비스도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적 동기도 있었겠지만 정치적 동기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기정:추가로 한 말씀드립니다. 앞에서 말씀하신 대로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문화적인 침체가 왔는데 그것을 부흥시키는 데 프랑크족이 커다란 역할을 합니다. 다시 말씀드려 게르만족의 문화의 발달에 힘입어 로마 문화가 되살아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전례를 살펴보면 이러한 예를 잘 볼 수 있습니다. 게르만족의 전례가 로마의 전례를 되살렸다고 이야기합니다. 5-6세기에 로마의 전례서가 있었는데 이것을 프랑크족이 받아들여 자기 민족에 맞게 더 첨가하여 전례서 내용이 매우 풍부해졌습니다. 프랑크족은 이 전례서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로마에는 전례서가 사라져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로마에서는 오히려 전례서를 프랑크족으로부터 역수입해서 로마 사정에 맞게 내용이 가감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로마 전례서의 기원이 됩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그리스도교 문화에 게르만 민족인 프랑크족의 역할이 매우 컸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조광:차 교수님께 융합주의(Synkretismus)의 문제에 관해 질문 드립니다. 토착화를 논의할 때 가장 경계하는 것이 바로 이 혼합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이 혼합주의와 토착화 사이에는 구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차 교수님이 사례로 제시한 것은 혼합주의적인 측면도 있지만 토착화로 볼 수 있는 내용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 내용을 좀 더 확충해 주실 수는 없는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클로비스의 영세의 토착화론적인 차원에서의 의미가 더 강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 질문을 드립니다. 혼합주의와 토착화의 개념을 어떻게 구분하고 계신지 알고 싶습니다. 두 번째로는 이 논문이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작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계기 외에 그리스도교 자체의 장점에 대한 게르만 족의 동의도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게르만족이 그리스도교의 어느 면에 특히 호감을 가지고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곧 일단 사상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인간관의 변화에 그리스도교의 영향이 크지 않았나 생각하는데, 게르만 민족의 문화를 포기하고 그리스도교 문화를 받아들이게 된 원인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신교선:한 가지 첨부합니다. 저도 질문을 통해 게르만족의 개종이 단지 정치 사회적 차원만이 아니라 내적 영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들을 사로잡은 매력은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다고 했습니다.

 

나기정:저의 생각에는 그리스도교의 윤리 생활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혼합주의와 연관하여 라틴계 민족은 합리적이지 않았는데 게르만족과 접촉하면서 게르만족의 합리적 사고방식이 유입되어 나중에 교리와 신학 발전에 기여한 것이 아닌가도 생각해 봅니다.

 

차용구:윤리적인 측면이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 거의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그리스도교의 결혼관인 일부일처제가 여성의 입장에서 중혼과 축첩 제도가 있었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커다란 자극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윤리적인 면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게르만 민족이 그리스도교 문화를 로마 문화의 정수로 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로마인들이 세운 원형 경기장 등의 건축물을 보면서 게르만 민족은 그런 건물을 세우는 민족이 가진 종교라면 어떤 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곧 문화와 종교를 일치시키는 태도도 게르만족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유목민이었던 게르만 민족이 정착하면서 개종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로마의 유명한 라티푼디움으로 대변되는 농경 문화도 종교를 받아들이는 데 자극제가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여성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고 봅니다. 혼란 시기에서 내적 성찰과 안정을 찾을 공간이 필요했는데 그리스도교에서는 수녀원을 통해서 내적인 안정감을 제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에 관련된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밖의 다른 문화적인 면도 개종을 가속화시키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조광:한 가지만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이 논문을 나중에 보완하실 때 그리스도교 문화와 게르만 문화가 만나서 상호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그리고 어떤 새로운 창조적인 작업이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도 언급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성효 신부님께 질문 드립니다. 계시는 하나이며 삼중적인 기쁨이라는 표현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triple" 곧 삼중적이라는 표현이 명확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부연 설명을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두 번째로는 이 기쁨이라는 주제 이외에 구체적인 인간, 그리고 인간 본성 등을 주제로 그리스도교와 라틴 문화의 만남에 대해 다룰 여지는 없는 것인지요? 그리고 법적인 사고 방식과 그리스도교의 만남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실 수 있는지요?

 

이성효:성서(bible)와 성전(tradition)이 트리엔트 공회의 정신에 입각해 보면 진리의 원천입니다. 그런데 갈라진 교회의 형제들은 처음에는 성서만을 강조하고 성전을 거부했었습니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에는 갈라진 교회의 형제들도 성전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합니다. 이브 콩가르는 [성경과 교회의 삶]이라는 책에서 성전이 무엇인지 밝혀 주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문헌에서 보면 성서와 성전의 구분이 간단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의 클레멘스의 "고린도 서간, 40의 1"에서도 "신적 인식이 깊어진 후, 우리는 스승께서 정해진 시간에 따라 완성하도록 명령하셨던 모든 것을 순차적으로 이행해야 한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고린도 서간은 95년 정도에 완성된 것입니다. 이는 70-100년에 완성된 사도행전과 비슷한 시기의 문서입니다. 당시에는 성서와 성전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사도행전도 이 당시에는 주님의 말씀의 기록, 곧 어록집이었습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의 7권의 두루마리 어록집을 공동체에 따라 성서처럼 보관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후에 정경화를 통해 성서와 비성서의 분류 작업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로마의 클레멘스는 자신의 글에서 "명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에서 바로 넘어오는 전통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전통과 성서는 교회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브 콩가르 추기경이 성서와 성전 그리고 교회를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실재로 간주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triple" 곧 삼중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삼중적이라고 하는 것은 3개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토착화를 다루기 이전에 잘못된 신앙의 가르침에 대한 반성을 위한 자료를 제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서만이 아니라 성전도 잘 알 필요가 있습니다. 클레멘스 서간, 리용의 이레네의 서간에서도 초대 교회에서 바로 내려온 전통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전통을 로마 교회에서 찾고 있습니다.

 

조광:저는 삼위일체와 삼중에는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닌지요?

 

이성효:물론입니다. 삼위일체와 삼중은 전혀 다릅니다. 삼위일체는 완전한 세 위격이 있는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삼중은 모든 것이 하느님 말씀에서 나오기 때문이 있는 것입니다. 성전과 교회도 하느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질문은 무엇이었습니까?

 

조광:로마법과 교회법이 구조적으로 매우 비슷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를 통해서도 토착화의 가능성이 탐지되지 않을까 해서 질문을 드려본 것입니다.

 

이성효:그 부분에 대해서는 가능성으로만, 곧 연구 과제로 남겨 두기로 하겠습니다.

 

이영재:제가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로마법에 대한 연구는 동로마 황제 유스티아누스 대제 시기에 당시까지 여러 곳에 산재되어 내려오던 법률들을 취합하여 [로마법 대전]이라는 4권의 책으로 편찬한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후 세기에 서유럽은 이민족의 침략 등으로 로마법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지 못합니다. 11세기 말엽에 이르러서야 이탈리아 볼로냐의 이레네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로마법 개수 운동이 전개됩니다. 그리고 교회법에 대한 연구는 1140년 그라티안의 Decretum(교회법령집)이 편찬되면서 시작됩니다. 그리하여 12-13세기에는 교회법과 로마법에 대해 볼로냐 대학을 중심으로 많은 학자들이 활발히 연구합니다. 이 시기에는 교황청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 법정이 세속 법정보다 더욱 체계적으로 발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후의 교황들은 대부분 탁월한 교회법 전문가 출신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교황 이노센트 3세, 이노센트 4세, 보니파시오 8세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교황권을 강화했으며, 교권이 속권보다 우위에 있음을 주장함으로써 세속 군주와도 갈등을 겪게 됩니다.

 

이유남:차용구 교수님께 제안을 드립니다. 역사가의 입장에서 본 게르만 민족과 그리스도교의 만남에 관한 것을 잘 배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구약을 인간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신앙의 빛 안에서 그 역사를 조명하고 회상하면서 구원사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역사를 공부하신 분이 신앙인의 관점에서 세계사와 한국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것이 또 하나의 토착화 작업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클로비스의 세례 자체가 어떤 이유가 있었든지 간에 결국은 역사 안에 숨어 계신 하느님의 손길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국사도 그리스도의 성령의 빛으로 조명해 보면 문화와 역사가 세례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역사학자로서 그런 작업을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박일영:두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성효 신부님께 질문 드립니다. 아우구스티노가 상당히 열린 자세로 당시 로마의 문화를 받아들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포용에는 기쁨이 큰 작용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노는 젊은 시절에 상당히 방탕한 삶을 살았는데 이때의 방탕한 기쁨이 나중에 종교적 기쁨으로 승화되는 데 어떤 역할을 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frui"를 일부러 향락이라고 번역하셨는데 그렇게 번역할 수 있었던 것은 젊은 시절의 그런 방탕한 기쁨과도 연관이 있지 않은가 합니다. 이에 관해 말씀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차용구 교수님께 질문 드립니다. 클로비스 왕이 토착 종교를 버리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과정을 보면 우연히도 신라에 불교가 도입된 과정과도 매우 비슷해 보입니다. 시기적으로도 그렇고 과정마저도 비슷합니다. 귀족들의 토착 종교와 왕이 도입하려는 불교와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라에서는 개종보다는 더할 가(加)의 의미에서의 가종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클로비스에게도 이러한 가종적 의미의 것은 없었나 하는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성효:상상력은 학문 연구의 출발점이지만 답은 자료의 한도 내에서 찾아 객관성을 유지하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어릴 때 키케로(Cicero)의 호르텐시우스(Hortentius)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그러면서 그 당시에 같이 읽었던 구약성서는 도덕적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내용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구약성서를 조작이라고 폄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우구스티노는 끊임없이 'veritas' 곧 진리를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이 진리는 호르텐시우스에서 제시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진리는 구약성서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고 자기 자신의 젊은 논리로도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연관하여 가장 적합한 것이 선신과 악신의 논리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가 마니교에 빠지게 된 것도 바로 선과 악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선은 선신으로부터 오고 악은 악신으로부터 온다는 마니교의 주장에 커다란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호르텐시우스가 철학적 힘을 준 것이라면 마니교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이때 아우구스티노는 교회를 경멸하고 멀리합니다. 그런데 마니교의 학자인 파우스투스에게 커다란 실망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티노의 관점에서 볼 때 모르는 진리에 대해 파우스투스가 너무나 잘 아는 것처럼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마니교는 너무나 완벽한 체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니교를 떠납니다. 이때에 아우구스티노는 모든 것을 회의합니다. 그런데 결국 회의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확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하느님의 말씀 그리고 'ecclesia'가 가장 확실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참으로 늦게 찾아온 나의 기쁨"(gaudium meum)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진리를 찾는 아우구스티노가 여기에서의 기쁨은 과거의 방황할 때의 기쁨을 말한 것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너를 좋은 하느님께 던져라."라는 말을 합니다.

 

신교선:클로비스의 개종과 연관된 것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앙에 대한 자료가 있습니까? 그리고 496년에 클로비스가 알레막니족과의 톨비악 전투에서 절망적으로 몰릴 때 전통적 종교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전투에서 이기면 하느님을 믿겠다는 약속을 하였다고 합니다. 다윗의 경우와도 비교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톨비악 전투에서의 체험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에 대한 확신으로 변한 것이 아닌가요? 그리고 부활의 사상도 내적으로 작용한 부분이 있지 않은가요? 이러한 부분에 대해 더 연구해 주셨으면 합니다.

 

조광:한 가지 질문 있습니다. 도유가 준성사적인 의미를 가집니까?

 

나기정:3-4세기에 전례가 정립되기 시작하는데 도유도 이때에 발전합니다. 도유식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받는 데 정치적으로 이용되게 됩니다. 도유는 준성사가 아니고 촛불을 켜는 일과 마찬가지로 부연 예식일 뿐입니다.

 

오랫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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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패트릭 기어리, [메로빙거 세계], 이종경 옮김, 지식의 풍경, 2002년, 115-116면.

2)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장군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Merobaudes(372-383년), Richomer(382-394년), Bauto(383-387/88년), Arbogast(388-394년). 이에 대해서는 E. Ewig, Die Merovinger und das Frankenreich, Stuttgart, 1988년, 11면 참조.

3) 김성태, [세계 교회사 I], 바오로 딸, 1986년, 303면.

4) 위의 책, 300면 이하; H. Chadwick, Die Welt in der antiken Welt, Berlin·New York, 1972년, 292면.

5) Th. Schieder 편, Handbuch der europaschen Geschichte 제1권, Stuttgart, 1979년, 256면 참조.

6) Ewig, Die Merowinger, 60면.

7) 레미지오 주교에 대해서는 K. Schaferdiek, "Remigius von Rheims. Kirchenmann einer Umbruchszeit", Zeitschrift der Savigny-Stiftung fur Rechtsgeschichte(이하 ZRG) 84, 1973년, 256면 이하 참조.

8) Monumenta Germaniae Historica(이하 MG). Epistolae 3, 113면,

9) 6세기의 역사가 그레고리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톨비악 전투(496년)에서 알레막니족에게 밀리게 되자 클로비스는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전통적인 다신교가 더 이상 자신에게 승리를 안겨다 줄 수 없음을 깨닫고 전투에서 승리하게 되면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것을 맹세하였다.

10) J. M. Mayeur 편, Die Geschichte des Christentums:Religion. Politik. Kultur, 제3권, Freiburg·Basel·Wien, 2001년, 368면.

11) Gregor v. Tours, "Historia Francorum", monumenta Germania Historica Scriptores rerum Meroviugicarum. I-1, 76,9:idola neglegerit, quae neque sibi neque allis prodesse possuit.

12) 위의 책, I-1, 76, 8:ut Deum verum, factorem caeli et terrae, crediderit.

13) 위의 책, I-1, 77, 2:Deum quem Remigius praedicat inmortaelm sequi parati sumus.

14) Ewig, 앞의 책, 79면.

15) 아마도 대표적으로 클로비스의 친손녀였던 베르타(Bertha)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브리튼 섬의 켄트 왕국으로 시집온 그녀는 남편 에텔베르트 왕을 설득하여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로마에서 파견한 선교사 아우구스티노의 자유로운 선교 활동을 보장하도록 하였다. 베르타의 딸 에텔부르가(Ethelburga) 역시 앵글로-색슨의 개종에 많은 공헌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브리튼 섬의 북부에 있던 노송브리아의 왕 에드윈과 결혼한 그녀는 로마에서 파견되었던 선교사 파울리노를 도와 왕과 부족민들을 개종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김성태, 앞의 책, 320면 이하 참조:S. F. Wemple, "Women from the fifth to the tenth Century", A History of Women in the West. II. Silences of the Middle Ages, Christiane Klapisch-Zuber편, 173면 이하 참조.

16) 김성태, 앞의 책, 298 면.

17) W. Von den Steinen, "Chlodwigs Ubergang zum Christentum. Eine quellenkritische Studie", MIoG Erg. Bd. 12, 1969년, 417-501면, 여기서는 423면 이하 참조.

18) "Historia Francorum", MG, SSrer Mer. I-1, 8: amplius tria milia.

19) 위의 책, I-1, 77, 2 이하:Mortales deos abigimus, pie rex, et Deum quem Remigius praedicat inmortaelm sequi parati sumus.

20) A. 프란츤, [교회사], 최석우 옮김, 분도출판사, 1996년, 147면.

21) Th. Schieder 편, 앞의 책, 233면.

22) 위의 책, 241. 256면.

23) 클로비스는 507년에 "나는 아리우스파 이단자들이 갈리아 지방의 일부를 장악하고 있음을 용납할 수 없다. 자, 나아가 그들을 쳐부수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리니."라고 선언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B. Tierney·S. Painter, 이연규 옮김, [서양 중세사-유럽의 형성과 발전], 집문당, 1997년, 68면.

24) 그레고리오의 기록을 보면 알레막니족에게 밀리던 클로비스는 승리의 대가로 세례를 맹세하였다.

25)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년)는 자신의 서한에서 선교사들은 가능한 한 토착 신앙에서 연결점을 찾고, 또한 이를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유도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이렇게 외적인 기쁨을 사람들에게 허용한다면 그들은 또한 쉽게 내적인 기쁨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개방되지 않은 마음에서 모든 것을 단번에 빼앗을 수는 없다. 높은 산을 기어오르려는 사람은 뛰어오르는 것이 아니라 한 발짝 서서히 오르는 것이다"(MG. Epistolae 2, 331면). 이 서한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레고리오 교황은 선교 방법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토착화"를 강조했다. 특히 앵글로-색슨족의 개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교황은 신앙은 하나이지만 이를 실천하는 전례와 관습은 다양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앵글로 색슨 민족의 관습을 수용하면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들의 "외교 신전을 파괴하거나 외교 관습을 말살하기보다는 이를 그리스도교적 방향으로 유도하도록 가르쳤고, 문맹자들을 위해서는 신앙 교육의 수단으로 성화를 사용하도록 권유하기도 하였다." 김성태, 앞의 책, 321면에서 재인용.

26) F. Prinz, Grundlagen und Anfange. Deutschland bis 1056, Munchen, 1985년, 357면.

27) A. Murray, "Missionaries and Magic in Dark-Age Europe", Debating the Middle Ages:Issues and Readings, L. K. Little·B. H. Rosenwein 편,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8년, 96면.

28) 위의 책, 101면.

29) MG. Concilia 1, 64, 90.

30) F. Prinz, 앞의 책, 357면; H. Jedin편, Hanbuch der europaischen Geschichte 제1권, Freiburg·Basel·Wien, 1966년, 519면.

31) 위의 책, 제3-1권, 401면 이하.

32) B. Tierney·S. Painter, [서양 중세사], 114면.

 

[사목, 2002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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