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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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9월의 순교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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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5-05 ㅣ No.808

9월의 순교자들

 

 

한국교회가 9월을 순교자 성월로 지내는 것은 이 달 9월에 가장 많이 순교했기 때문이다. 103위 한국 순교 성인들 중 기해박해(1839) 때 순교한 분들을 살펴보자. 어려서부터 몸이 불구였던 탓에 ‘곱추 할멈’ 또는 ‘곱추 루시아’라고 불린 김루시아(1769-1839) 성녀는 1801년 신유박해 이전에 입교했으나 남편과 가족들이 모두 외교인이라서 교우의 본분을 지키는 것마저도 방해받는 바람에 이를 비관하던 중 교우들을 만나면서 그만 집을 뛰쳐나와 교우들 집에 얹혀 살게 되면서 천한 일과 병약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기쁘게, 겸손한 마음으로 해나갔다. 기해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자수할 마음을 가지고 있던 중 체포돼 포청의 옥에 갇힌 루시아는 쇠약한 장애인이고, 또 일흔한 살의 노령이었지만 옥중의 병자들을 도와주며 얼마 안 되는 자기 돈을 그들에게 나눠주기까지 했다. 포장이 교우들의 이름과 사는 곳을 대라고 윽박지르자 루시아 할머니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고, 이미 죽기로 작정했어요.”할 뿐이었고, 어느 날은 이렇게 말했다. “더 이상 강박하지 마십시오. 나는 천주교인이니 어서 형장으로 보내주십시오. 즐거이 가겠습니다.”

 

김루시아는 태형 30도를 맞았는데, 이를 본 누군가가 이렇게 증언했다. “할멈의 마른 몸에 매가 닿을 때마다 마치 뼈를 때리는 것 같아서 안스러웠습니다.”

 

이 형벌을 받고 나서 곱추 루시아는 다시 옥에 갇혔는데, 옥 안에 들어오자 기진해서 쓰러지더니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사나흘이 지난 9월 어느 날, 함께 갇혀있던 여교우들의 간호를 받으면서 “예수, 마리아! 예수, 마리아, 요셉!”을 부르면서 운명했다. 9월에 옥사 순교한 것이다.

 

9월 3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 치명한 순교자 중 이정희(李貞喜, 41) 바르바라 성녀는 순교자 허계임의 딸이고, 순교자 이영희의 언니요, 순교자 이바르바라의 고모다. 권희(權喜, 46) 바르바라 성녀는 순교자 이광헌의 아내고, 순교자 이아가다의 어머니요, 순교자 이광렬의 형수다. 이연희(李連熙, 36) 마리아 성녀는 순교자 남명혁의 아내고, 박큰아기(朴大阿只, 54) 마리아 성녀는 순교자 박희순의 언니다. 김효주(金孝珠, 24) 아녜스 성녀는 순교자 김효임의 동생이며, 순교자 박후재(朴厚載, 41) 요한 성인은 순교자 박 라우렌시오의 아들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에는 여러 대에 걸쳐 순교자를 낸 교우 집안이 여럿 있었으니, 위에 열거한 순교자들 대부분이 103위 성인 성녀의 자리를 차지하는 분들이기도 하다. “남편은 늘 ‘내 영혼을 구하려면 치명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고백한 어느 아내는 그래서 용기를 가지고 형장으로 나아가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쳐드릴 수가 있었다.

 

이연희 마리아는 옥에 갇힐 때 포졸들이 무례하게 대하자 그들을 준절히 꾸짖었다. 그러나 남편 남명혁이 “여보, 교우는 천주를 위해 순량한 양같이 죽어야 하는 것이니, 이런 훌륭한 기회를 놓치지 말아요.”하는 소리를 듣고 난 후에는 태도를 바꿔 스스로 무(無)가 되고자 했다. “모욕과 학대, 참아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견딜만합니다.”

 

남명혁 다미아노는 서울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30세에 천주교를 알게 돼 교리를 배웠고, 서른세 살 때 입국한 중국인 여항덕(余恒德) 파치피코 신부에게 영세, 입교한 뒤로는 열성을 다해 교리를 연구하고 이웃에게 전하면서 이광헌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회장’으로 임명돼 가족, 친지는 물론 외교인, 냉담자, 병자를 돌보는 한편, 위험에 놓인 어린이에게 대세(代洗) 주는 일도 기꺼이 해냈다. 모방 나신부를 필두로 샤스탕 정신부에 이어 앵베르 범주교 등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입국하자 남 다미아노 회장은 자기 집을 공개해 공동체를 위해 쓰이게 했다. 1839년 부활대축일을 보낸 다음 주 4월 5일, 음력 2월 스무이틀이었는데, 주교의 지시대로 교우들을 자기 집에 불러들여 성사를 받도록 했다. 마리아는 주교를 모시는 데에 소홀함이 없도록 내조에 힘썼다. 예상보다 많이 모여들었고, 한 예비신자가 밀고를 해서 4월 7일 포졸들이 들이닥쳐 그와 이광헌 회장의 가족 등 20여명의 교우들을 붙잡아 갔다. 다행히 앵베르 주교는 숙소로 돌아간 뒤였으나 포졸들은 이날 남명혁 회장 댁에서 주교의 제의류와 경본, 주교관(主敎冠)을 압수해갔다. 같은 달 4월 19일자로 조정에서는 공식으로 박해를 승인하는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을 발표했으니, 이것이 저 어마어마한 기해박해의 서곡이었다.

 

포청으로 붙잡혀가던 날 아내 마리아에게 용기를 북돋아 준 남편 다미아노 회장은 죽음이 임박하자 다른 옥에 갇힌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여보, 이 세상은 잠시 머무르는 곳일 뿐, 우리의 본향은 천국이니 주님을 위해 죽어서 광명한 세상에서 만나 영원히 살아가도록 하십시다.” 이렇게 독려한 그는 양력 5월 24일 남녀 여덟 교우들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 순교했다.

 

남편을 여읜 이 마리아는 봄, 여름, 가을에 이르도록 몇 달을 더 옥중에서 고통을 바쳐야 했고, 함께 붙잡혀 와서 다른 감방에 갇힌 열두 살 난 아들의 고통까지 감내해야 했다. 날마다 사람들이 히죽히죽 웃으며 와서는 “당신 아들이 혹독한 매를 맞고, 배가 고파 울고, 온갖 곤경을 다 겪으면서 죽어가고 있소.”라고 할 때는 정말 죽을 맛이었다. 이때 남편의 격려를 떠올리면서 새로운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1984년 5월 6일 부활 제 3주일 오전, 한강변 새남터와 절두산 순교터가 바라다 보이는 여의도 광장 특설 제단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00만 명에 이르는 교우들이 함께 한 가운데 ‘한국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하면서 ‘한국 순교복자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정하상 바오로 회장 외 101위의 동료 순교자들’에 대한 시성예절을 집전했다. 먼저 당시 한국 주교회의 의장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이분들을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이 성인으로 받들어 공경할 수 있도록 성하께서 친히 성인명부에 올려 주시기를 청원합니다”라며 시성청원을 드리고, 계속해서 103위 약전을 낭독했다. 그 중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도 있었다.

 

“남명혁 다미아노와 이연희 마리아 부부를 위시하여 모범적 가정을 꾸몄던 여러 부부 순교자…”들을 기렸던 것이다. 그리고 2009년 9월 19일 여의도공원 문화마당에서 봉헌된 103위 한국 순교자 시성 25주년 기념 장엄미사에서 정진석 추기경은 “이혼이 많은 오늘날, 부부가 예수님의 당부대로 서로 사랑하면, 순교자들처럼 자신을 죽이고 상대편을 사랑한다면 이혼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순교하는 마음과 각오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가정이 깨어질 일이 없다는 지적이기도 했다.

 

아들이 가혹한 형벌을 이기지 못해 배교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이연희 마리아는 이미 순교한 남편 남 다미아노에게 전구를 청하면서 어린 아들을 하느님의 사랑에 맡겨드릴 수가 있었다. “주님, 이것은 주님의 가장 크신 영광을 위하는 것입니다.”

 

한 증인은 이렇게 말했다. “마리아는 모든 마음을 바쳐서 천주님을 진실로 사랑했고, 그 영혼의 원(願)은 오직 천국을 향해 있었습니다.”

 

이 여교우들은 모두 여러 차례에 걸쳐 곤장을 맞고 주뢰를 틀렸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형벌을 받은 교우는 김효주였으니, 뼈를 어그러뜨리고 뾰족한 몽둥이로 찌르는 형벌까지 당했다. 그래도 마음을 조금도 굽히지 않자 재판관은 성이 나서 소리쳤다. “더 세게 찔러라. 더 세게 찔러!”

 

그러던 어느 날, 형리들이 효주 아녜스를 외딴 감방으로 끌고 가서 학춤이라는 형벌을 가했다. 학춤은 죄수를 발가벗기고 손을 뒤로 결박지어 팔을 공중에 달아매고 네 사람이 번갈아가며 매질을 하는 것이다. 몇 분만 지나면 혀가 나오고 입에 거품이 고이며 얼굴빛은 검붉어져서 죄수를 내려 쉬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곧 죽어버리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형벌을 반복, 반복했던 것이다.

 

박해자들은 왜 그다지도 집요하게, 그다지도 혹독하게 교우들을 다루었을까? 그런 끔찍한 형벌을 당한 죄수들은 어떤 마음으로 참고 견뎌냈을까? 일찍이 들은 일이 없으리만큼 혹독하게 매를 맞고 여러 가지 조롱과 욕설을 들으면서도 김효주 아녜스는 더욱 더 열심히 자기의 고통을 하느님께 바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성식에서의 ‘103위 약전’은 이렇게 설명했다. “갈림 없는 마음으로(1코린 7,32-33)주님만을 사랑하던 김효주 아녜스와 효임 골롬바 자매를 비롯한 15위 동정녀 중 몇몇은 아직 수도생활이 알려지지 않았던 그 당시에 이미 공동생활을 하면서 병자와 가난한 이웃을 돌보았고, 이광렬 요한은 교회에 봉사하기 위해 독신으로 지내다가 순교했습니다.”

 

이 요한은 형 광헌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참수당할 것이었으나 당시 조선의 법은 근친자를 한때에 죽이는 것을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우가 먼저 7월에 목을 베이고, 형은 옥에 남아 있다가 9월의 순교자가 됐던 것이다. “목자 없이 출발한 한국 신자 공동체는 잠시 동안 두 분의 중국인 신부를 모실 수 있었을 뿐, 1836년 모방 신부의 입국으로 시작된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활동 때까지 40여 년간을 평신도만의 공동체로서 수계하며 살아왔습니다.”

 

이렇게 회고한 ‘103위 약전’은 “성사의 은총을 받으려는 열망으로 주교, 신부들을 영입해 들이기 위해 북경 삼천리길을 걸어서 오가면서 교황에게, 또는 북경주교에게 눈물겨운 호소를 보내곤 했다”고, 이 땅의 신자 공동체가 기울인 노력을 평가했다. “한국 땅을 찾아오는 선교사들을 모시는 데도 크나큰 위험이 뒤따랐으니, 들어오는 주교, 신부들이나 그들을 숨겨주며 신앙생활을 하는 교우들은 다같이 죽음을 각오한 용사들이었습니다.”

 

그 용사들 가운데 대표적인 분이 정하상 바오로 회장이었다. “정하상 바오로,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조신철 가롤로 등은 신유박해 이후 목자 없는 신자 공동체를 돌보며 선교사 영입의 길을 찾으려고 수없이 북경을 왕래했고 마침내 파리외방전교회의 주교, 신부들을 맞아들여 한국교회 발전의 새 장을 열어놓았습니다.”

 

정하상 바오로는 유진길과 함께 기해년 9월 22일 참수 치명했다. 그들이 모셔온 조선대목구 두 번째 감목이자 이 땅에 입국한 최초의 주교인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와 모방 나 베드로 신부,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가 새남터에서 군문효수의 형을 받아 순교한 바로 다음날이었고, 아버지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회장이 순교한 지 서른여덟 해 뒤 같은 장소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였다.

 

아버지와 아들, 딸, 어머니, 형제가 박해자의 칼을 받아 묵숨을 잃은 끔찍한 일이 조선왕조 시대에 일어났다. “너희 교(敎)의 모든 일을 총괄하는 자가 물론 있을 터이니, 그 이름을 대라.”

 

그러나 유진길은 입을 다물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섯 번째 출두했을 때 그는 주뢰와 톱질의 형벌을 당해 몸이 붉게 단 숯을 퍼붓는 것처럼 뜨거웠다. 잠시 후, 최근에 체포된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와 무릎맞춤을 당한 그는 다시 금부로 이송돼 여러 날 계속해서 문초와 고문을 당했다.

 

끝까지 마음을 굽히지 않은 두 교우, 정하상과 유진길에게 마침내 참수형이 선고돼 그들은 그토록 열망하던 최고의 갚음을 받게 됐다.

 

“지극히 개탄할 바로다! 그의 눈은 나라에서 발표한 금령을 보지 못하는도다. …이러한 명백한 증거를 상고해보면 모든 것이 관련이 있는 것을 알게 될 터이니, 자기 나라를 배반한 것에 대한 벌로 말하면 만 번 죽어도 그 벌이 너무 가볍다 할지로다. 반역자요 패역자(悖逆者)인 그 자의 죄상이 명백하고, 그도 그것을 자백했으니 지체없이 참수할지라.”

 

사형수가 된 순교자들의 표정을 누군가가 이렇게 기록했다.

 

“바오로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으며, 아우구스티노는 묵상에 깊이 잠겨 벌써 이 세상 사물에는 조금도 구애되지 않는 것 같았다.”

 

아우구스티노 순교자의 아들이 열네 살의 어린 나이에 감옥에서 목에 끈을 감아 교수형으로 죽임을 당한 유대철 베드로 성인이다. 아버지가 순교한 지 한 달 열흘 후의 일이었다.

 

그런가하면 정약종 회장과 그의 맏아들 철상 가롤로가 신유박해 때 순교한 데 이어 기해박해 때는 둘째아들 하상 바오로와 딸 정혜 엘리사벳이 순교했고, 약종 회장의 재취 부인이자 하상과 정혜 남매를 낳은 류조이 체칠리아 순교자가 하느님을 증언하며 묵숨을 바쳤으니, 신유박해 순교자들은 현재 ‘하느님의 종’으로서 시복시성 대상자들이며, 기해박해 순교자들은 모두 103위 성인 명부에 오른 분들이다.

 

하상과 정혜 남매는 아버지가 순교한 후 방면이 됐으나 가산은 모두 관가에 몰수당하고 말았다. 무일푼이 된 그들은 경기도 양근(楊根) 마재[馬峴]의 작은 집(若鏞 요한)을 찾아가 거두어주기를 간청했다.

 

어느 증인이 “그들이 당한 고초를 모두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천주학을 하는 너희 때문에 우리 아버지가 귀양살이를 하고 계셔!’라는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형편임을 짐작케 한다. 그 아이들은 몸 붙여 있던 일가친척들에게 천대를 받았을뿐 아니라, 하인들과 심지어 종들에게까지도 멸시를 당했으니, 그야말로 하느님을 위해 바쳐 드린 고통이요 고초였다.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수많은 교우들이 순교할 때, 하상 바오로의 둘째 큰아버지 약전과 작은아버지 약용은 경상도 장기를 거쳐 전라도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를 가고 말아, 비신자이던 큰집, 작은집 식구들이 순교자의 유족들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샤를르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정하상 일가가 마재로 내려갔을 때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박해로 인하여 추방되고 파산을 하고, 여러 사람이 아직도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정(丁)씨 일가는, 천주교란 말만 들어도 벌벌 떨며, 그와 같은 교를 계속해서 믿으려 한다는 생각조차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친척들은 그때부터 정하상과 그 집안 식구들이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하는 것을 방해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통렬한 비난, 협박, 멸시, 조소, 심지어는 학대까지도 모두 동원되었다.”

 

바오로는 누이 엘리사벳과 함께 어려서부터 어머니 체칠리아로부터 경문과 교리를 배웠다. 그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훗날 훌륭한 신앙의 지도자로 살 수 있었던 데에는 어머니의 훌륭한 가정교육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정혜 엘리사벳의 생애에서도 드러난다. 시성조서(諡聖調書)에서 정정혜 순교자에 대한 김 프란치스코의 증언은 이러하다.

 

“정정혜는 그녀의 어머니처럼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으며 동정을 지켰는데, 이러한 좋은 표양과 흔치 않은 덕으로 말미암아 모든 신자들 사이에 칭송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정혜 엘리사벳은 따로 교육을 받은 일도 없었지만 가정교육 덕분에 신앙인으로서 똑바로 서있을 수 있었고, 하상 바오로 역시 그러했다. 그런데 이러한 가정교육의 뿌리는 명도회장이요, ‘주교요지’라는 최초의 한글교리서의 집필자인 그들의 아버지 약종 아우구스티노 순교자였던 것이다.

 

정하상 바오로는 1795년에 태어나 1839년 추석날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해 마흔네 해를 살다 갔다. 조선왕조 후기 영조 28년(1752)부터 1910년 나라가 문을 닫을 때까지 주로 국왕의 동정과 국정을 기록한 일기 「일성록」기해년 8월 14일자 기사에 따르면 정하상의 죄목은 서양인 선교사들을 국내로 불러들였다는 것과 세 사람의 조선인 소년을 서양으로 내보냈다는 것, 그리고 법으로 금한 천주교의 지도자로서 사교를 전파했다는 것 등이다. 이러한 죄를 범한 까닭은 신유년에 순교한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었고, 그래서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다. ‘사교’니, ‘원수를 갚으려는 의도’니, ‘모반’ 따위는 그릇된 지적이지만, 서양인 선교사들이란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등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을 일컫는 것이고, 조선인 세 소년이란 김대건과 최양업, 최방제 등 예비 신학생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여기서도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생애가 사제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고 하는 점이다. 그는 선교 사제 영입을 위해 북경 삼천리길을 열 번도 넘게 오가며 노력해 결실을 보았고, 세 명의 사제 후보자들을 선발해 마카오로 보냈으며, 그 자신도 사제가 되기를 원했고, 앵베르 주교에게 뽑혀 라틴어와 신학을 공부했다. 주교는 정하상과 다른 세 사람에게 신학을 가르쳐서 사제로 양성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달레 신부는 앵베르 주교의 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조선말을 배우면서 이들에게 의무적으로 하루에 두 시간씩 강의를 합니다. 올 여름에 이들은 곧잘 라틴어를 읽을 수 있게 됐고, 그 중 두 사람에게는 사천의 아멜 신부가 중국어로 번역한 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3년 안으로 신품을 줄 희망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신학 공부가 더 깊이 들어가기도 전에 그만 박해를 만나 이들에 대한 사제직의 꿈과 주교의 희망이 사그라지고 말았다.

 

1801년 주문모 신부 순교 이래 사제가 없는 이 땅의 교회에 사제를 모시기 위한 꿈이었고,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그는 서슴지 않고 어떤 역관의 하인으로 들어갔다.

 

정 바오로가 조선 천주교회를 위해 처음 북경으로 떠난 것이 1816년 스물한 살 때였다. 그런데 북경으로 떠나기에 앞서 그는 천주교 때문에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조동섬(趙東暹, 1738-1830) 유스티노를 찾아 함경도 무산(茂山)으로 갔다. 유스티노는 이미 일흔이 넘은 노인이었고, 15년 전에 순교한 아버지 약종 회장과도 잘 아는 사이였지만, 아버지보다 스물한 살이나 연상이었다. 한학자였던 그는 하상을 맞아들여 여러 달 동안, 어림잡아 1년 가량 한문을 가르치며, 앞으로의 활동 계획에 대해 크게 격려하면서 교회 재건과 신부 영입에 힘써 줄 것을 당부했다.

 

이렇게 보면 정하상은 「상재상서」를 저술할 수 있는 유교적 소양을 일곱 살 때부터 스무살에 마재 고향을 벗어날 때까지 13년 동안 삼촌 정약용 집에 얹혀 살면서 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어느 학자의 연구 결과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약전과 약용 형제는 흑산도와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자기 자녀들뿐 아니라 조카들에게 유학 공부를 독려한 편짓글이 있고 보면, 하상도 그 간접 혜택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유학의 기초 위에 조동섬으로부터 좀 더 심오한 부분을 익혔을 터이고, 교리공부 역시 어머니로부터 배운 바에 더해서 무산에서 그 깊이를 더하면서 교회 지도자 수업을 받았을 터이다.

 

박해로 산산히 부서지고 흩어진 교회의 잔해를 추슬러서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한 그의 꿈이 어느 날 한꺼번에 시작된 것이 아니고, 고향을 떠나 서울 조증이 집에서 교우들과 어울리는 동안 여물고 다듬어져서, 무산 생활 1년 동안에는 북경을 드나드는 구체적인 계획이 무르익었던 것이다.

 

정하상은 무산 생활을 끝내면서 북경으로 파견됐으므로 그가 천주교 교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론적 바탕을 갖추었던 것이고, 유진길, 조신철과 함께 1816년 북경을 방문하면서부터 1837년 앵베르 주교를 영입해올 때까지 21년 동안 교회 밀사로 활약했다.

 

정하상 바오로가 스무 살 때까지 한문과 교리공부의 기초를 닦았다고 했지만, 그가 숙부인 다산(茶山丁若鏞)에게서 유학을 배웠을 터이면, 1818년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 하상이 고향 마재를 수시로 찾아가 공부했을 수가 있고, 1820년대 후반부터 북경 천주당에 들를 때마다 그곳 서양 선교사들과 함께 한문으로 번역된 서학서(西學書)를 강습하면서 교리 지식을 쌓았을 터이다. 또한 모방 신부 등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한 이후 앵베르 주교가 정하상 등에게 단기 신학생 교육을 실시하던 중에 배웠던 체계적인 교리 지식도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신유박해 이후 목자 없는 교회를 이끌면서 사제 영입을 갈망하던 평신도 지도자들은 1811년에 이어 1825년 경에도 교황께 편지를 보내 조선교회의 비참한 상황은 물론, 이러한 고통을 겪고있는 교우들의 영신적 구원을 위해 성직자를 파견해주도록 요청했다. 두 번째로 교황청에 보낸 편지를 작성할 때는 정하상이 주동이 됐고, 북경 왕래에 훌륭한 동행자 유진길을 만나게 되면서 그의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이 편지는 당시 북경과 마카오를 거쳐 라틴어로 번역돼 1827년 교황 레오 12세에게 전달됐다. 이때 포교성성(현재의 ‘인류복음화성’)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이 1831년 그레고리오 16세란 이름으로 즉위하면서 그해 9월 9일자로 조선교구(대목구)를 설정하고 파리외방전교회의 도움을 받아 초대 교구장에 부뤼기에르 소(蘇)주교를 임명한 것은 참으로 뜻있는 일이었다.

 

정하상은 서울 후동(后洞; 현재의 주교동)에 집을 마련하고 어머니 체칠리아와 여동생 정혜 엘리사벳이 성직자들을 위해 식복사 등의 역할을 하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하상의 활동은 1839년 초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후동의 주교댁을 지키고 있다가 박해 소식을 들었고, 이후 체포와 순교를 각오하고서는 몇몇 교우들과 협의해 박해자들에게 제출할 호교론을 작성해나갔다. 이것이 저 유명한 「상재상서」였다. 기해년 7월 11일 음력 유월 초하루, 가족과 동료들과 함께 체포된 하상 바오로는 포도청으로 압송됐다. 형관은 그에게, “네가 조선 풍속을 따르지 아니하고 외국의 도(道)를 행하여 사람을 가르쳐 혼탁하게 함이 옳으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정하상은 이렇게 반문했다.

 

“외국의 좋은 물건은 취해서 쓰고 천주 성교는 외국의 도라고 해서 옳은 일을 배반하오리까?”

 

“네가 외국 도는 기리고, 나라와 관장이 금하는 것은 그르다고 할 것이냐?”

 

포장이 다시 묻자 하상 바오로는 “죽어 지만(遲晩)이로소이다.”고 했다. 본디 ‘지만’은 죄인이 자백한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죽어 마땅하다는 뜻으로 대답한 것이다. 그 원정(原情)의 뜻을 자세히 물은 다음,

 

“말은 옳으나 나라가 금하시는 것을 당을 모아 가르치느냐?”하고 결박해놓고 주릿대로 누르니, 팔이 다 늘어진 후 하옥했더니라고, ‘기해일기’는 적고 있다. 당시 교회내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정하상에 대한 심문 기록으로서는 너무나 짧지만, 사실 정하상이 미리 써둔 ‘상재상서’야말로 박해에 대한 그의 답변이며,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심문기록에 단편적으로 나타난 순교자들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나라에서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참된 종교를 배척함은 옳은 일이 아니오. 천주교는 누구를 막론하고 신봉해야만 하는 종교입니다.”

 

한편, 하상의 동료 순교자 유진길 아우구스티노에 대해서는 대대로 벼슬하는 역관 중인(中人)인 그를 체포해… 한 말만 하라 하되 듣지 않고 관전에 이르니 포장이 불러 만단으로 회유하되 끝내 듣지 않는지라 할 수 없이 잡아내려,

 

“네가 국록을 받는 신하의 몸으로 나라가 금하는 일을 하니 뉘에게 배웠으며 가르치기는 얼마나 했느냐? 당과 책을 대라.”

 

“전라도 가서 (1827년 丁亥박해 때) 치명한 이 바오로(李景彦)에게 배우고, 가르치기는 남은 고사하고 새로이 집안 가속도 못했삽고, 책도 없나이다.”

 

“네 집처럼 책이 많은 이가 없는데, 모른다 하느냐? 대라.”하며 다섯 차례나 혹형을 가하고, 이어서 서양 신부가 온 까닭을 힐문했다.

 

“서양 선비가 우리나라에 오기는 천주의 광영을 현양하고 사람을 가르쳐 천주십계를 지켜 천주를 공경하고 영혼을 구할 이런 도리를 전해서 죽은 후에 지옥의 영원한 고통을 면하고 천당에 올라 무궁한 진복을 누리게 함을 위함이니, 이런 착한 도리를 가르치려 하매 어찌 자기는 선한 일을 하지 않으면서 남은 선하라 하리요. 그런 연고로 먼저 정결히 수신하여 덕을 가진 후에 외국에 전교하나니 높은 지위와 재물과 색을 탐하려하면 어찌 서양의 번화 부요한 본고장을 버리고 구만리 외국에 구사일생하여 나오며, 또 주교위(主敎位)가 높으시니 무슨 지위를 탐하시며, 본국 은전을 내어다가 쓰니 무슨 재물을 탐함이 있으며, 천주께 허원하고 종신토록 동정을 맹세하고 몸을 정결히 하사 신부가 되어 계시니 무슨 책을 탐함이 있으리요.”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심문 기록을 놓고 볼 때, 그분들은 배교하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죽어도 신앙을 버릴 수 없는 이유를 너무나 명백하게 밝힌 공통점을 지닌다.

 

교황청에 보낸 1825년의 탄원서를 정하상이 주축이 돼서 마련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때의 초안은 ‘만권의 책’을 머릿속에 지니고 다닌다는 소문의 주인공이며 박식한 유진길이 작성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이 먹지 못해 죽게 됐는데, 굶어 죽은 뒤에 식량이 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한 달 양식만 오고 또 굶게 되면 무익하니 영속적으로 양식이 필요합니다. 저희에게 영신의 양식을 줄 목자를 빨리 영속적으로 보내주십시오. …저희들은 무식하고 마음이 어린 자들입니다. 그러하오니 오주(吾主)께서 흘리신 성혈과 주인의 식탁에 떨어진 음식 부스러기를 우러러 보나이다.”

 

식탁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라도 우러러 봤던 가나안 여자의 믿음(마태 15,27)으로 목자 보내주기를 청했던 조선교회 평신도들. 그리고 유진길과 정하상의 뜨거운 바람이 열매를 맺어 마침내 이 땅에 교회가 완성되고, 바로 그 뿌리에서 오늘날 500만 하느님 백성들의 공동체가 민족복음화를 위해, 사회복음화를 위해 열심히 살고 있지 아니한가.

 

‘기해일기’ 유진길 부분은 이렇게 마무리 짓고 있다. “…주교 신부와 한가지로 금부(禁府)로 올려 연일 추국하고 3차 중형 후에 기해(1839) 8월 15일(양력은 9월 22일) 성 마태오 종도(宗徒; 使徒) 첨례(瞻禮; 祝日) 이튿날 정 바오로〔丁夏祥〕와 한가지로 참수 치명하니, 나이 49세러라. 그 후 가산은 적몰하고, 그 외인 형과 아내와 어린 자식은 다 정배(定配)하니라.”

 

만권의 책 속에서도 찾아내지 못한 진리를 목말라하며, 안정된 삶에 안주하지 않고, 소멸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갈구한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진리의 싹을 틔워 조선교회에 크나큰 열매를 맺게 해준 수많은 순교자들. 그분들은 ‘그리스도의 얼굴’로 살며 세상을 위해 진리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살다 갔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2009년 6월 29일 발표한 사회회칙(社會回勅) 「진리 안의 사랑」은 “하느님께 열려있을 때 우리는 우리 형제 자매들에게 열려있게 되고, 삶을 연대의 정신으로 완성해야 할 즐거운 과업으로 이해하게 된다”고 지적하고 “하느님을 배제한 인도주의는 비인간적인 인도주의”라면서 이렇게 일러주고 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유한하고 덧없는 것을 뛰어넘도록 촉구하고, 끊임없이 모든 이의 유익을 추구하며 일할 용기를 줍니다”(78항).

 

[2009년 9월 9일 연중 제24주일 ~ 2009년 11월 19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의정부주보, 최홍준 파비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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