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인] 목숨 바쳐 진리를 증언한 남종삼 요한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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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5-05 ㅣ No.805

목숨 바쳐 진리를 증언한 남종삼 요한 성인

 

 

구세주 탄생 2000주년을 기리면서 대희년을 지내던 2000년 10월 3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6세기 영국 교회를 지배하려던 헨리8세 국왕에 맞서 양심의 자유를 지키며 죽음으로써 진리를 증언한 토마스 모어 성인을 ‘정치인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면서 발표한 자의교서(Motu Proprio)에서 이 성인이 “진리가 권력에 우선한다는 것을 목숨을 바쳐서까지 증언했기 때문에 도덕적 고결함의 영원한 본보기로 존경받고 있다”고 상찬(賞讚)했다. 교황은 동시에 1987년 세계 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교황권고 ‘평신도그리스도인’에서 언급한 ‘생활의 일치’를 이날 문헌에서 강조했다. “평신도들은 참으로 일상의 직업생활과 사회생활 안에서 성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소명에 응답하고자, 평신도들은 하느님께 일치하여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며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로 인도하는 기회로서 일상생활을 인식해야 합니다”(‘평신도그리스도인’ 17항).

 

그러니까 오늘날 세계 각국의 정지인과 행정가들도 토마스 모어 성인의 삶을 본받아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끝까지 진리를 증언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교회의 가르침을 이미 2세기 전에 충실히 따른 이가 우리 103위 성인 가운데 한 분인 남종삼(南鐘三, 1817-1866) 요한 순교자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 산 22-2 의령 남씨 가족묘소에 성인의 유해가 안장돼 있어 의정부교구와 관련이 있다. 22세 때인 1838년에 과거 급제, 승진을 거듭해 승지가 되면서 정3품까지 오른 그는 103위 한국성인 성녀 가운데 가장 높은 관직을 지낸 분이기도 하다. 그처럼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어떻게 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했던가, 하는 점을 살펴보는 것도 뜻있는 일일 것이다.

 

의령 남씨인 그는 조선 후기 남인계 학자로서 1817년 순조 17년 탄교(南坦敎)의 아들로 태어나, 다 자란 뒤 백부인 상교(南尙敎) 아우구스티노의 양자로 들어갔다. 성인의 할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이우(南履佑)이고, 아버지 상교는 다산 정약용 요한의 학풍을 이은 농학자로 충주목사와 돈녕부 동지사를 지내게 되는데, 남종삼이 학문과 사상을 형성하고 훗날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는 데에는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게 마련이었다.

 

그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아버지가 일찍부터 입교해 신앙생활을 했던 사실에 비추어, 그가 양자로 들어간 이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로 짐작할 수 있다.

 

남종삼 요한은 충주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의 양아버지이자 큰아버지인 남상교 아우구스티노는 통정대부의 중직을 맡고 있었지만, 신앙생활에 방해가 된다고 해서 관직을 떠나 살던 인물이다. 그런데 신앙심이 깊고 경건한 마음을 지녔으면서도 남 요한은 승진해야겠다는 원의를 품는다고 해서 프랑스 선교사들의 걱정을 사기도 했다. 그가 진사시에 합격한 것이 1838년 헌종 4년이었는데, 이때는 이미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모방 나 베드로 신부와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에 이어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까지 입국해 있었다.

 

“흠, 요한은 말씀입니다요, 천주교인으로서 도달할 수 없는 관직을 갈망하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안 그렇습니까? 신부님?”

 

“그렇습니다. 그런 갈망만 없었더라면 좀 더 훌륭한 교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걱정 속에서도 그해 연말, 문과에 합격해 홍문관 교리가 되기도 했으나 동해에 있는 영해의 현감 자리를 얻기까지는 13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왜냐하면 그의 집안이 조정에서 세력을 잡고 있는 당파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도 신앙생활을 충분히 할 수 있으며, 만일 신앙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경우 물러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관직과 신앙생활을 겸하던 남 요한은 나라의 공식예절이 있을 때마다 조상 숭배행위에 참여해야 했으므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서울에서는 종묘제례, 시골에서는 향교에서 제사를 지내고 미신행위를 해야 할 위험에 놓였으므로 선교사들은 이런 그에게 성사를 주지 않기도 했던 것이다.

 

“미신이냐, 천주님이냐?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기지 않으려면 간단하지 않습니까? 관직을 버리면 될 것 아닙니까?”

 

“제가 관직에서 떠날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는 가문의 생계를 꾸려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세속의 관직 때문에 주교님, 신부님들의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요한을 믿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더 큰 잘못을 방지하기 위해서 미리 대처하자는 뜻입니다.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예나 지금이나 곁눈질하지 않고 하느님을 올곧게 섬긴다는 것은 공직자의 신분으로서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요한은 참으로 신자답게 살면서 직분을 수행해 ‘백성의 아버지’ 몫을 다했으며, 몇 사람을 개종시키기까지 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세 분 선교사들이 모두 순교한 다음에는 1844년 12월 부제품을 받은 김대건 안드레아 부제가 1845년 1월 입국해 몇 달 동안 국내에 머물다가 4월 말 상해로 떠나 같은 해 8월 사제성품(司祭聖品)을 받고 페레올 고주교와 다블뤼 안 신부를 모시고 다시 입국한 것이 그해 10월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병오박해 때 김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9.16)했으며, 1849년 4월 15일 중국의 강남교구장 마레스카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은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그해 겨울 입국해서 1861년 6월 과로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12년 동안 정말 동분서주, 전라도에서 시작해 충청, 경상, 경기도와 서울에 이르기까지 부지런히 성무를 집행하고 선교에 열성을 다했다. 1852년 은사인 메스트르 이신부가 입국해 감격스런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으나, 기쁨도 잠시였고 1853년 2월 3일 병중의 고주교가 선종하고 말았다.

 

양떼가 늘어나면서 할 일이 더욱 더 많아진 최양업 신부는 목자 보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고, 그런 보람이 있어 1856년 3월 프티니콜라 박신부와 푸르티에 신신부와 함께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장주교가 조선에 도착했고, 이듬해에는 페롱 권신부가 입국했다. 이로써 조선 교회에는 일곱 분의 성직자가 사목하는 가운데 신자 수는 1만 5천 명을 헤아리게 됐다.

 

이러한 교회 사정에서 남종삼 요한은 관료생활과 신앙생활을 나란히 해나가면서 당시의 선교사들로부터 오해를 받기도 하고, 성사까지 막힌 경우가 있었다. 그때마다 방인사제 최양업 신부와의 교분으로 그의 신앙생활이 크게 진보했다. 그는 영해 군수로 있을 때에 남들이 상상할 수 없는 선정을 베풀었으나 지방의 관리가 향교의 제사에 참석치 않는다고 말썽이 생기자 즉시 사표를 낼 정도로 믿음이 강했다. 이때가 1862년의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은거하면서 남요한은 여러 선교사들, 그중에서도 특히 훗날 여섯 번째 조선교구장이 된 리델 이신부에게 우리말을 가르쳤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무직으로 지내기가 쉽지 않았다. 남상교 부자의 집에는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고, 그들은 손님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요한은 집안의 가세를 돕기 위해 관직을 알아보게 되었고, 오래지 않아 승지로 임명돼 궁중에 머물면서 섭정, 곧 흥선대원군의 운현궁에도 드나들게 됐다. 이때 대원군의 부인인 민부대부인이 교리문답과 기도문을 익히고 있었고, 둘째아들이 왕위(고종)에 오르자 감사하는 뜻으로 베르뇌 주교에게 감사 미사를 청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한 뒤 체결된 북경조약으로 러시아가 연해주를 차지함으로써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국경을 맞대게 됐다. 1864년 음력 2월에는 5명의 러시아인이 직접 두만강을 건너 경흥에 와서 통상을 요구한 적이 있고, 이듬해 9월과 11월에도 말 탄 사람을 앞세우고 7명의 러시아인이 경흥에 와서 국서를 가지고 함경감사를 직접 찾아가겠다고 까지 했다.

 

급보에 놀란 대원군은 1년 전 베르뇌 주교에게 제안했던 사실을 떠올리기도 했다. 주교가 힘을 써서 러시아인들을 물리쳐주면 조선에 선교의 자유를 승인하겠다고 말했다가 러시아인들이 국경을 넘어오지 않게 되자 이 논의가 중단되고 말았던 것이다. 대원군은 내심 천주교에 호감이 갔으나 정치적인 기반이 굳건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대신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고, 전개되는 국면과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태도가 돌변할 소지를 안고 있었다.

 

그 무렵 홍봉주 토마스가 1865년 8월과 11월, 12월에 남종삼을 만나 베르뇌 주교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대책을 세울 것을 제의했다. 토마스는 1801년 순교자 홍낙민의 손자이며, 1840년 순교자 홍재영의 아들로서 베르뇌 주교의 복사 노릇을 하면서 일직부터 러시아의 남진정책에 관한 정보를 들어왔던 터였다.

 

“러시아의 침략을 막으려면 먼저 프랑스, 영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최상의 방책입니다. ‘이이제이’(以夷制夷), 곧 오랑캐를 불러들여서 다른 오랑캐를 물리치는 방어책을 강구해야 마땅합니다.”

 

이때 남종삼은 소극적이었고, 지도층 신자들은 선뜻 동의하지 않았으나 홍봉주는 물러서지 않고 김면호 토마스, 이유일 안토니오 등과 의논한 끝에 편지 한 통을 써서 대원군 딸의 시아버지인 조기진을 통해 대원군에게 전달했다. 편지 내용은 러시아에 대항하는 유일한 방법은 프랑스, 영국과 동맹을 맺는 것이고, 이 일은 무엇보다도 조선에 와있는 서양인 주교의 힘을 빌리는 것이 가장 쉬운 길이라고 덧붙여 설명한 것이었다. 그들이 대원군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을 때 고종의 유모인 박 마르타가 희망적인 소식을 전해왔다.

 

“부대부인께서 말씀하셨는데요, 누군가가 새로운 서한을 작성해서 보내오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면서, 러시아의 침투를 막아줄 수 있을 주교님께 즉시 대원위 대감을 만나고, 그 일의 성공을 기원하는 미사를 봉헌해주십사고 말씀하셨어요”

 

박 마르타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홍봉주는 승지 남종삼을 다시 찾아가 최근에 일어난 일들을 자세히 알리면서 새로운 편지를 한 통 써달라고 부탁했다. 남종삼은 그때까지 보여주었던 미온적인 태도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면서 러시아의 침공으로부터 나라를 구할 방도를 강구하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직접 대원군에게 가지고 갔다. 이때 대원군 주위에는 5~6명의 신하들이 있었다.

 

“좋소.” 주의 깊게 편지를 읽어본 대원군은,

 

“영상에게 가서 의논해보시게.”라고 했다. 안동 김씨 세도가의 수장격인 김병학도 편지를 보고 좋다고 했고, 다음날 대원군은 남종삼을 불러 천주교 교리가 아름답고 참되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었다.

 

“내가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이 한 가지 있네. 당신들은 어찌해서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는가?”

 

미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주교가 러시아의 조선 침략을 막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가?” “물론입니다.”

 

“주교는 어디 있나? 서울에 있는가?”

 

“아니올시다. 며칠 전부터 서울을 떠나 계십니다.”

 

“아, 주교는 교인들을 돌아보러 황해도에 갔구먼.”

 

“과연 그곳에 가셨습니다.”

 

“그러면 내가 보았으면 좋겠다고 알리시게.”

 

남종삼은 물러나와 대원군과 나누었던 대화 내용을 몇몇 신자들에게 알렸고, 이 소식을 지방에 가있는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에게 전달하기 위해 김면호와 이유일을 주교들에게 보내도록 조처했다. 교우들은 금세라도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처럼 좋아라했고, 한성에 어울릴만한 큰 성당을 짓자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마침내 다블뤼 주교가 1월 25일 충청도에서, 베르뇌 주교가 나흘 뒤인 29일 황해도에서 돌아왔다. 31일 남 승지가 대원군을 찾아가 주교들이 상경했음을 알리자, 대원군의 태도는 며칠 전과는 전혀 달랐다.

 

“자네 아직 여기 있었던가? 나는 자네가 춘부장께 간 줄 알았는데….”

 

“내려가야 합니다만, 중요한 일이 남아 있어서 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대감.”

 

대원군은 남요한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 급할 것 없으니 나중에 보세.”

 

대원군은 주교의 중재를 통해 러시아의 위협을 막으려던 정책을 이미 바꾸었던 것이다. 왜 갑자기 그가 정책을 바꾸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국경을 넘어와서 통상을 요구하던 러시아인들의 행위가 잠잠해진 사실을 들 수 있을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조두순, 정원용 같은 대신들과 김병학까지도 천주교를 옹호하는 듯한 대원군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남종삼은 대원군으로부터 오히려 하향(下鄕)을 권유받았다. 사태의 급전을 예기할 수 있었던 그는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의논하기 위해 아버지(南尙敎)를 찾아 고향 제천 땅 묘재로 내려갔다. 여든 살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네가 충성스런 신하의 도리는 다했다만, 그 때문에 분명 목숨을 잃게 되겠구나. 너더러 네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라고 하거든 성교에 대한 욕된 표현을 지우는 것, 잊어버리지 말거라.”

 

남요한은 아버지 집에서 20여일을 머물다가 10리 거리인 배론[舟論]의 신학교로 가서 선교사들을 만나, 고해성사를 본 후 영성체까지 하고 서울로 떠났다. 어쩌면 그것이 노자성체(路資聖體)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무렵 이미 대표적 교인이었던 그에게 체포령이 내려져 있었으며, 상경 도중 정황을 알아차린 그는 시세(時勢)를 관망하기 위해서 한때 피신하기도 했으나 결국 서울을 가까이 한 고양군 축베더리 마을에서 체포되어 의금부로 연행됐다. 이때가 음력 정월 15일. 의금부에 국청(鞫廳)이 마련되고 다음날부터 여섯 차례에 걸쳐 홍봉주, 이선이, 최형, 정의배, 전장운과 베르뇌 주교, 다블뤼 부교구장 주교 등과 함께 엄한 문초를 당했다. 어찌해서 이런 신세가 됐는지를 묻는 정승들에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그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이 천주교인들의 이름을 대라고 하자, “저에게 우리 교우들의 이름을 대라고 하지는 마십시오.”라고 했다.

 

남종삼은 정월 21일(양력 3월 7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홍봉주 토마스와 같이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향년 50세. ‘죄인 남가의 선고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높은 관직에 올랐던 그 자는 온 마음을 기울여 사교(邪敎)를 따르고 전파했으며, 오래 전부터 그것에 깊이 물들어 있었다. … 참된 가르침에 어긋나는 사교를 그는 그것이야말로 진리라고 말했다…. 그의 모든 죄를 생각하면 만 번 죽어도 벌이 너무 가벼울 것이다.”

 

[2008년 11월 19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 2008년 12월 29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의정부주보, 최홍준 파비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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