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아! 황사영 알렉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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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5-05 ㅣ No.803

아! 황사영 알렉시오

 

 

1801년 신유 4월 열 아흐렛날, 양력으로는 5월 31일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한강변 새남터 형장에서 장렬하게 순교했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는 이날의 기적적인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오랜 시간 사형 집행을 준비하는 동안, 그 전까지는 맑고 청명하던 하늘이 갑자기 두터운 구름이 덮이고, 형장 위에 무서운 선풍이 일어났다. 맹렬한 바람과 거듭 울리는 천둥소리와 억수같이 퍼붓는 흙 섞인 비와 캄캄한 하늘을 사방에서 갈라놓는 번개 따위가 모두 이 피비린내 나는 광경을 만든 자들과 구경하는 사람들이 놀라서, 가슴이 서늘하게 하는 데에 이바지했다.”

 

기록은 이어서 “그러나 거룩한 순교자의 영혼이 하느님께로 날아가자마자 무지개가 서고 구름이 걷히고 폭풍우가 갑자기 가라앉았다. 태양이 망나니들의 죄악을 보지 않기 위해 얼굴을 가렸다가 그들의 희생자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그 찬란한 모습을 완전히 다시 드러내는 것 같았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런데 이때 멀리 제천 땅 배론의 토굴에서 명주 천에 깨알같이 작은 붓글씨로 북경 주교에게 편지, 곧 ‘백서’(帛書)를 써나가던 황사영은 이날의 기억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때 한 교우가 3백리 밖에서, 또 한 교우는 4백리 밖에서 피난 중에 바람과 천둥이 이상함을 보고 이 날에 반드시 수상한 일이 있는 것이라고 하여 그 날짜를 단단히 적어두었다가 그 후에 들으니 신부님의 순교하심이 바로 그날, 그 시였다 하옵니다.…”

 

이렇게 백서를 쓴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의 묘소가 의정부교구 성지(聖址)로서,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속칭 가마골 홍복산 자락 아래에 외롭게 남아있다. 당시 황사영은 ‘양박청래(洋舶請來)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능지처참의 형을 받았으므로 시신이 온전할 리 없었고, 또 가까운 집안사람들이 모두 유배를 당한 터였으므로 그 시신을 거둘 사람조차 없었다. 그의 시신을 수습해 황씨 문중의 선산에 안장한 이들은 먼 친척이나 면식이 있는 신자들 몇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후 황사영의 무덤은 집안에서조차 오랫동안 잊혀져왔다. 양반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나 국사범으로 처형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다가 180년이 지난 1980년에 황씨 집안의 후손이 사료 검토 작업과 교회사 관계자들의 고증을 거쳐 홍복산 선영에서 황사영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발견했으며, 또 이를 발굴한 결과 석제 십자가와 비단 띠가 들어 있는 항아리가 나오면서 무덤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순교자들, 특히 주문모 신부와 당시 교우들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기꺼이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았던 이러한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박해가 일어났을 때 주문모 신부는 황해도 황주에서 피신하기 위해 2월 24일 서울을 떠났다. 황해도에는 이때까지만 해도 신자가 없었으므로 천주교에 대한 수색도 없을 것으로 판단해서 이쪽으로 방향을 정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정에서는 주신부 체포에 총력을 기울이며 지방에까지 신부의 용모기(容貌記)를 적어 돌리며 현상금도 걸었다.‘이러다가는 양떼만 더 피를 흘리게 되겠구나’ 싶어 음력 3월 11일, 야고보 신부는 스스로 박해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내 재판이 열리고 문초가 시작되었으나, 그는 형벌 가운데서도 침착한 자세를 잃지 않고 모든 질문에 신중하고 지혜롭게 대답했다.

 

“제가 월경죄(越境罪)를 두려워하지 않고 지황을 따라 조선에 온 것은 오로지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예수님의 학문은 사악한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나 나라에 해를 끼치는 일은 십계에서 엄금하는 바이므로 절대로 교회 일을 밀고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박해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말을 한마디도 들을 수 없게 되자 야고보 신부에게 군문효수형을 선고했고, 이에 따라 신부는 새남터로 끌려가 자신의 사형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나서 조용히 머리를 숙여 칼날을 받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멀리서 주신부의 순교 소식을 전해들은 황사영은 6년 전 을묘년 예수부활대축일의 감격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십자성호를 긋고 그를 위해 기도했다. 1794년 음력 섣달 열 나흗날(양력 1795년 1월 14일)을 전후로 해서 서울 계동의 최인길 회장 댁을 근거로 해서 선교활동을 시작한 주신부는 그해 4월 2일 성목요일 조선인 신도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필담으로 고해성사를 집전하고 성체를 영해주었다.

 

그리고 가성직제도 아래에서 세례를 받은 교우들에게 보례(補禮)를 집전했다. 강완숙은 7,8년 전에 입교했지만 대세를 받지 않고 신부 오기만을 기다렸고, 황사영도 입교한 지 3년이 됐지만, 처삼촌이자 스승이기도 했던 정약종 선생한테서 머지않아 신부가 입국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이날을 기다려서 정식으로 세례를 받고자 했던 터였다. 이렇게 해서 강완숙은 ‘골롬바’로, 황사영은 ‘알렉시오’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며, 다른 이들은 대세(代洗)만 받았던 터여서 대세받을 때 못다 갖춘 모든 예식을 보충하는 뜻으로 보례를 받았다. 그리고 4월 4일 성토요일 밤, 주문모 신부는 공식으로 모든 교우들과 함께 이 땅 조선에서 처음으로 미사성제를 거행했다. 밀떡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살과 피로 성변화(聖變化)하는 성찬전례에 포도주는 필수품이었으므로, 포도나무와 포도주가 이때 처음 도입됐을 것이라는 짐작도 가능하다.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의 세례명이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알렉산델’로 알려져 왔으나 그 동안 학자들의 연구 성과에 따라 ‘알렉시오’라는 사실이 근래에 밝혀졌다. 교회사연구소가 펴낸 ‘신유박해 순교자 전기집 <순교는 믿음의 씨앗이 되고>’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사영은 조선왕조 세조 때 공조판서를 지낸 장무공(莊武公) 형(衡) 이래 그의 증조부 준(晙)이 공조판서를 지내기까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창원 황씨 명문대가의 후예로 1775년 서울 서부 아현방(坊), 지금의 서대문구 아현동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4년 전 아버지 석범이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정자와 한림을 역임했으나 사영을 유복자(遺腹子)로 남기고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아내 평창 이씨 윤혜(李允惠)는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조선교회 창설 주역으로 활동한 이승훈 베드로와 일가로, 승훈의 아저씨벌인 진사 이동운의 딸이었다.

 

여덟 살 때까지 증조할아버지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고 자란 사영은 워낙 영특해서 열여섯 살 때인 정조 14년(1790) 9월 12일 진사시(進士試)에 1등으로 급제했고, 이때 정조 임금이 그의 손목을 잡아주면서 “네가 스무 살이 되거든 곧 과인을 만나러 오너라” 했다고 전한다. 그래서 사영은 임금에게 잡힌 손목을 평생토록 명주로 감싸고 다녔다고 하며, 그의 무덤에서 손목을 감싼 토시가 별견된 것이 1980년의 일이니, 그 사연을 넉넉히 짐작할 수가 있다.

 

어린 10대의 나이로 진사가 돼 일찍이 명성을 얻은 사영은 다산 정약용의 큰형 약현의 맏딸 명련(丁明連, 마리아, ‘난주’라고도 불림)과 혼인함으로써 마재의 정씨 가문과 관계를 맺게 됐다. 약현의 첫 부인은 조선교회 창설 주역 이벽의 누나였고, 정씨 형제들의 누이가 이승훈과 혼인했으므로 승훈은 황사영의 처고모부가 된다. 사영은 북경의 서양 선교사들이 쓴 한문 교리서를 처고모부로부터 얻어 읽고서는 과거공부를 포기한 채 천주교 진리에 깊숙이 빠져들고 말았다. 부귀영화가 보장된 길을 버리고 빛을 향해 진리를 따라 사는 삶을 선택한 황사영 청년. 그의 인생길에서 보면 이때가 참으로 중대한 고비였음에 틀림없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통해서 큰 일을 하고 계셨으며, 그 계획이 무엇인지, 200년 세월이 훨씬 더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과 죽음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묵상케 해준다.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최인길의 집에서 세례를 받은 사영 알렉시오는 처삼촌이기도 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명도회(明道會) 회장을 도와 열심히 선교활동을 펴나갔다.

 

황사영 알렉시오는 한 분이신 하느님만이 최고의 이상(理想)이고, 천주교를 ‘세상을 구제하는 좋은 약’(救世之良藥)이라며 이상의 종교로 생각해 서양식 성당에 직접 가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훗날 신유박해 때 붙잡혀 추국을 당하면서 그가 진술한 내용에 이런 대목이 있다.

 

“서양 사람들이 살고 있는 천주당에 직접 가보고 그들을 만나보는 것이 지극한 소원이었으나, 그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붙잡힌 것이 한스럽기만 합니다.”

 

그는 또 주문모 신부를 매우 존경한다고 말했다. “신부님은 참으로 덕행이 정수한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의 제자 되기를 원했고, 잠시도 그분을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한 해에 불과 두세 번밖에 만나 뵙지 못한 것이 지극히 한스럽소이다.”

 

알렉시오는 밝은 교리 지식으로 양반과 중인, 상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선교활동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특히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를 통한 활동은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신유박해가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800년에 이 단체가 설립된 것으로 황사영은 ‘백서’에 기록하고 있지만, 그보다 먼저 태어났을 거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아무튼 명도회는 회원 자신들이 천주교에 대한 지식을 쌓고, 다음에는 이 지식을 다른 신자와 신자가 아닌 이들에게 전하도록 서로 격려하고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 정약종 회장이 앞장 선 이 조직은 여섯 개의 ‘모임’ 즉 ‘육회’(六會)를 두고, 육회의 모임 장소를 황사영의 애오개(阿峴) 집을 비롯해서 홍문갑, 홍익만, 김여행, 현계흠의 집과 또 한 집으로 정했으며, 한 모임은 3~4명, 또는 5~6명으로 구성했다.

 

요즘의 ‘소공동체’를 연상케 하는 이런 기초 공동체에 입회하려면 먼저 주문모 신부에게 그 이름을 보고한 뒤, 1년 동안 기도를 잘 했는지 여부를 심사해 열심히 기도한 사람으로 판정을 받아야만 가능했다. 사영은 자기 집에 찾아오는 회원들과 친교를 나누면서 교리를 설명해주고, 주일이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새 신자를 찾아나서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정약종, 홍낙민, 최필공, 최창현, 강완숙, 최인철 등 지도층 신자들의 활동을 도우면서 교회 서적을 필사해 널리 전했으며, 조선교회로 선교사를 영입해오는 운동에도 적극 동참했다.

 

정조 임금이 1800년 6월에 49세로 승하하고 열한 살의 어린 순조(純祖)가 즉위해 그 할머니 정순왕후 김대비의 수렴청정이 시작된 이듬해, 즉 1801년에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신유 대박해가 일어났다.

 

신유박해는 그해 1801년 봄에 일어난 ‘춘옥’(春獄)과 겨울에 일어난 ‘동옥’(冬獄)으로 나눌 수가 있다. 춘옥은 다섯 가구를 한 통(統)으로 묶어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해낸 ‘오가작통법’의 선포와 함께 2월에 일어난 박해였고, 동옥은 황사영이 9월 29일에 체포됨으로써 10월에 다시 일어난 박해를 말한다.

 

황사영은 박해가 일어나기 이전에 이미 높은 교리 지식과 적극적인 교회 활동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고, 박해가 시작되면서 조정에서는 권철신과 정약종, 홍낙민 등을 체포하는 한편 황사영에 대해서도 체포령을 내렸다.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일단 몸을 피했던 그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양반의 아들로 망명을 하면 나라에 중대한 죄를 짓는 것이니, 이를 어찌 하랴!”

 

그러나 그는 “유복자로 태어난 제가 잡히면 늙으신 어머니께서 애통해하실 터이니, 차마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아 도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나중에 진술했다.

 

서울을 무사히 빠져나온 사영은 평구역에서 김한빈 베드로를 만나 여주와 원주를 거쳐 2월 그믐께 제천 배론에 있는 김귀동의 집에 도착했다. 귀동 역시 천주교 신자로서 몇 달 전 이곳에 들어와 옹기를 구우며 지내고 있었는데, 한빈과 귀동이 그가 숨어 지낼 토굴을 파고 토굴로 통하는 길은 큰 옹기그릇으로 덮어놓았다. 그래서 한 동네에 살고 있는 신자들조차 황사영이 와있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사영은 겨울잠을 자는 개구리처럼 어두운 토굴 속에 엎드려 지냈다고 전한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사영 알렉시오는 귀동과 함께 옹기를 구워 팔던 김세귀, 세봉 형제에게 교리를 가르쳐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했으니, 그의 복음화 활동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배론이란 명칭은 이곳 골짜기의 형상이 뱃바닥 같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인데, 본래는 팔송정 도점촌(陶店村)이다. 질그릇과 오지그릇 등 옹기를 만든 부락이었음을 말해준다. 1791년 신해박해 이후로 교우들이 드문드문 찾아와서 옹기를 구우며 교우촌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구학 2리, 원주교구 관할 성지이다. 황사영은 배론 토굴 속에 숨어 살면서 그냥 시간을 보내지만은 않았다.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과 김한빈, 황심 등이 전해준 교우들의 순교 소식을 바탕으로 ‘백서’(帛書)를 쓰고 일록(日錄)을 기록해나갔다. 일록은 그가 천주교 신자 입장에서 날마다 기록한 일기이며 수상록일 것이고, 백서는 글자 그대로 비단, 즉 명주 천에 붓글씨로 써나간 편지였다.

 

“죄인 토마스 등은 눈물을 흘리며 본주교 대야 각하께 호소합니다. 지난 봄에 길 떠났던 사람 편에 각하께서 건강하게 잘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만, 세월이 지나 벌써 해가 다 저물어 가는데, 그 동안은 또 어떻게 지내시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황사영이 이렇게 첫머리를 적어나간 ‘백서’는 ‘죄인 토마스’의 이름으로 ‘본주교 대야(大爺) 각하께’ 쓴 편지이다. 토마스는 황심(黃沁, 1756-1801)을 일컫는데 사영이 그의 이름으로 이 편지를 써나갔다.

 

충청도 덕산 출신인 황심은 1794년 12월 주문모 신부를 북경으로부터 조선에 모셔올 때 크게 역할을 했으며, 1795년 윤유일, 지황 등이 순교한 이후로는 그가 주로 북경교회와 연락을 취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심은 강원도 춘천으로 피신했는데, 이때 황사영이 춘천 가까운 곳에 피신해있는 것을 알고서는 제천으로 그를 찾아가서 주신부의 순교 사실을 알리고 조선교회의 사정을 북경 주교에게 알리는 방안을 강구했던 것이고, 이렇게 해서 황사영은 북경 주교에게 알려진 황심 토마스의 이름으로 백서를 써나갔던 것이다. 앞서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던 날 ‘백서’에서 “이때 한 교우는 3백리 떨어진 곳에서 길을 가고 있었고, 또 한 교우는 4백리 떨어진 곳에서 박해를 피해 길을 가고 있었는데…”라고 적은 부분, 3백리 떨어진 곳의 교우는 바로 이 황심을 말하고, 4백리 떨어진 곳의 교우는 제천 배론 토굴 속의 황사영을 일컫는다.

 

한편, 백서 첫머리에 ‘본주교’라고 하는 말은 교구장 주교를 지칭하고, 대야는 ‘종이 주인을 부르는’ 말로서 북경 주교 구베아를 가리킨다. 그리고 주교에게는 ‘각하’라는 경칭을 붙이고, 추기경은 ‘전하’, 또는 ‘예하’라고 했으며, 교황께는 ‘성하’라고 높여 부르는 것이 관례로 돼왔다. 요즘은 일반적으로 ‘교황님’, ‘추기경님’, ‘주교님’이라고 부르지만, 외교적 공식 의전행사에서는 경칭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백서는 ‘저희’가 잘못해서 박해를 만나게 됐다고 전제하고 “그 화가 신부에게 미치게 했다”면서 주문모 신부를 순교의 길로 가게 했으니, 면목이 없다고 말한 다음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 “각하께서는 은혜로는 부모를 겸하셨고, 의리로는 사목의 무거운 책임을 지셨으니, 반드시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지극한 괴로움에 저희는 장차 누구를 불러야 하겠습니까. 이에 감히 박해의 전말을 대략 아뢰고자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불쌍히 여기시고 굽어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교회가 무너져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데, 오직 죄인만이 요행히 화를 면했고, 요한도 들키지 아니하였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은총이 아직 우리나라에서 아주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죽은 사람은 이미 목숨을 버려 성교(聖敎; 천주교회)를 증명하였거니와, 살아있는 사람은 마땅히 죽음으로써 진리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몰래 두서넛 교우와 당면한 일을 깊이 생각하여 저희 복안을 조목조목 나누어 아룁니다.”

 

두 세기 전 신유박해의 소용돌이 속에서 황사영이 북경주교에게 써나간 백서에서 ‘요한’이라 일컫는 이는 옥천희요, ‘두서넛 교우’라고 하는 이들은 황사영 자신과 황심 토마스, 그리고 옥천희를 두고 이른 말이다. 옥천희 요한(?-1801)은 평안도 신천 출신으로 주문모 신부의 부탁을 받고 여러 차례 중국을 오가면서 그 사명을 충실히 이행해오던 터였다. 황사영이 백서를 완성하면 황심과 함께 이를 베이징으로 가져가기로 약속하고 있었다.

 

사영은 백서에서 주교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는 이유와 신자들이 바라는 바를 간략하게 적은 다음 본론에서 박해의 전말과 순교자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적고 그들의 행적을 주문모 신부의 순교에 이르기까지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에서 황사영이 서울을 탈출하는 1801년 2월 15일까지는 그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사실들이지만, 이후의 기록은 김한빈과 황심으로부터 전해들은 것이므로 상대적으로 덜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김한빈 베드로(1764-1801)는 충청도 보령 태생으로 한때 홍주에 살면서 포수(砲手) 생활을 했고, 1800년 가을 상경해 정약종 명도회장의 집에서 행랑살이를 하면서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교회 일을 돌보던 중 박해를 만나 음력 6월 초 서울 포졸들에게 붙잡히기도 했으나 탈출했고, 황사영을 만나 배론까지 와서 숨어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빈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박해 상황을 수집해 사영에게 일러주고는 했다.

 

“바깥사람들이 전해주는 바에 따르면, 판결을 받고 처형된 사람과 옥중에서 죽은 사람이 모두 합쳐 3백여 명인데, 지방의 일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선이 개국한 이후로 사람을 죽인 수가 올해처럼 많은 해는 없었다고 합니다만, 믿을만한 말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또 휩쓸려 죽은 사람이 누구이고 순교한 사람이 몇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조정에서 반드시 죽이고자 한 사람은 지위가 높고 글을 잘하는 선비들입니다.”

 

우리가 해마다 9월이면 순교자 성월을 지내면서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아무리 잔혹한 박해로 신자들을 죽이더라도 신자들은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하면서 2세기 후반과 3세기 전반에 걸쳐 활동했던 라틴 신학자이며 교부였던 테르툴리아노가 ‘호교론’에서 언급한 “그리스도인의 피는 씨앗”(semen est sanguis christianorum!)이라고 한 말이 그 말인데, 황사영은 ‘백서’에서 이 말을 인용하고 있다.

 

“일찍이 듣건대 순교자의 피는 우리 성교의 씨앗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희 조선은 불행하게도 동쪽으로 일본과 가까이 있습니다. 섬나라 오랑캐가 잔인하고 혹독하여 스스로 천주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렸는데, 우리나라 조정에서는 그것을 논하기를 도리어 잘한 일이라고 해서 장차 본받으려고 하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황사영은 이 편지를 받아보고 북경 주교가 반가운 조치를 취해주기를 기대하면서 이런 사실을 기록해나갔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어리석고 천한 백성은 혹 알아도 모른 채 내버려두고, 혹 취조해도 그다지 엄하게 하지 않아 장안의 평민들은 목숨을 보전한 이가 많다”면서 글 잘하는 선비들이 많이 죽었다고 전제하고,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던 유일한 사제였던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순교를 비롯해서 최필공, 강완숙, 이가환, 정약종, 이존창, 유항검 등 수십 명의 순교 사실을 상세히 기록했다. 이들 모두가 황사영 자신과 마찬가지로 초기 교회를 이끌어가던 동지요 지도급 신자들이었다.

 

이 같은 환난 중에 그는 자신이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생명을 지탱하고 있는데 대해 고맙게 여기면서도 순교의 은총을 입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한편, 어떻게 이 난국을 헤쳐 나갈 것인지, 주교께 호소하고 있다.

 

“저희는 금년에 화를 면했음에 감사함과 두려움이 절실하게 엇갈립니다. 인자하신 은혜로 힘껏 보호하시어 특별히 생명을 보전했음에 감사드리며, 죄악이 많아서 주님의 선택을 받지 못했음이 두렵습니다. 참으로 이 남은 목숨으로 주님을 위해 힘을 다하고자 합니다. 그러니 지혜가 모자랄 뿐만 아니라 힘도 또한 다했으니 장차 원통함을 머금고 땅속에 묻혀야 하며 한을 품고서 이 세상을 마쳐야 합니까? 슬프고 걱정이 절박한 가운데 누가 저희를 불쌍히 여기며, 누가 저희를 위로해주겠습니까? 본주교 대야 각하의 인자하신 존전에 울며 호소하고 싶으나, 산과 물이 가로막혀 우러러보아도 미치지 못하니 더욱 속이 타고 답답합니다. 장차 어찌하오리까?”

 

“누가 저희를 위로해주겠습니까?” 황사영은 당시 조선 신자들의 마음을 담아 교회 어른인 주교께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 …누가 우리를 위로해줄 것인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도 고통과 환난은 언제든 만나는 것이고, 그럴 때면 주신부는 이런 말로써 위로해주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사람은 하느님께만 온전히 의탁해서 많은 위안을 찾을 필요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신부는 15세기 이래 교회 안에서 성경 다음으로 가장 널리 유포된 ‘준주성범’(遵主聖範; Imitation of Christ), 곧 그리스도를 철저히 모방하라는 내용으로, ‘새 신심운동’의 기본 견해를 따르고 있는 이 책에 나오는 한 대목을 일러주곤 했다.

 

“…우리가 시련을 당할 때 실망할 것이 아니요, 오히려 하느님께 더 열심으로 기도할 것이니, 하느님은 우리가 곤란을 당할 때면 어느 때나 잘 도와주십니다. 성 바오로의 다음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코린토 1서 10장 13절에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닥친 시련은 인간으로서 이겨내지 못할 시련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성실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련을 당할 때나 곤란을 겪을 때나 항상 우리의 영혼을 하느님의 손아래 낮추어야 할 것이니, 하느님은 마음으로 겸손한 자를 구하시고 또한 들어 올리시기 때문입니다.”

 

황사영이 주신부의 음성과 ‘준주성범’의 이 대목을 떠올린 것이고 보면, 이 같은 시련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던져놓고 그는 이미 해답을 알고 있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머리로는 헤아리면서도 박해가 워낙 심하고 혹독해서 견딜 수가 없고, 각일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불길 앞에서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것 또한 분명하다.

 

“금년 박해 이후에 화를 입은 사람은 전 재산이 다 없어졌고, 살기를 도모한 사람은 홀몸으로 도망하여 가난한 형편이 도리어 갑인년(1794, 주신부 입국) 이전보다 더 심해졌으므로 설혹 무슨 계획이 있다 하여도 시행할 길이 없습니다. 지금 비록 일이 망가지고 부서진 뒤이지마는 진실로 재물만 있다면 아직도 할 일은 있습니다. 교우로 말할 것 같으면 아직 발각되지 않은 이 가운데도 능력 있는 사람이 다소 있어서 힘을 합쳐 함께 일을 벌일만합니다.”

 

황사영은 ‘백서’의 결론이라 할까, 대안 제시 부분에서 먼저 박해로 인한 교회의 피폐상을 기술하면서 박해가 끝나기를 열망하는 마음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먼저 자본이 부족하다면서 서양 여러 나라에 호소해서 자금을 마련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으며, 중국교회와 쉽게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 조선의 ‘종주국’인 청(淸)나라 황제의 명령으로 조선이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해줄 것과, 청국의 감호를 요청해 조선을 청나라의 직할지로 편입시킴으로써 조선에서도 북경에서처럼 선교사의 활동을 보장받기를 희망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지난해 가르침을 주신 편지에 몇 년 후에는 큰 배를 보내겠다는 분부를 받았습니다만, 지금은 형세가 크게 달라져서 무턱대고 와서는 성공을 바라기 어렵습니다. 여기에 한 계책이 있으므로 조선 사람이 어찌할 도리 없이 꼼짝 못하고 명령에 복종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전제하면서 황사영은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전선(戰船) 수백 척과 정병(精兵) 5,6만을 얻어 대포 등 날카로운 무기를 많이 싣고, 곁들여서 글 잘하고 사리에 밝은 중국 선비 서너 명을 데리고 바로 이 나라 해변에 이르러 국왕에게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우리는 서양의 전교하는 배요. 자녀나 재물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교황의 명령을 받아 이 지역의 생령(生靈)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귀국에서 한 사람의 선교사를 용납해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 이상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한 방의 탄환이나 한 대의 화살도 쏘지 않고, 티끌 하나 풀 한 포기도 건드리지 않을 것이며 영원한 우호조약만 맺고 북치고 춤추며 돌아갈 것이오.…”라고 적었다.

 

바로 이 대목이 크나큰 화근이 되어 오늘날까지 논란꺼리로 남아있는 것이다. 지난 달 8월 29일 의정부교구 백석동성당에서 의정부교구 순교자공경위원회가 주최하고 한국교회사연구소가 주관한 ‘경기북부지역과 한국천주교’ 주제의 2008 심포지엄에서 한 발표자(이장호 연구위원)는 황사영 백서에 대한 호교론의 입장과 대박청래에 따른 국가부정과 반민족적인 정서 등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하면서 황사영이 백서에서 제시한 내용의 실현 가능성 여부나 미성숙 여부보다 “젊은 황사영이 ‘조선’이라는 국가와 사회를 궁극적으로 멸망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는 점”이 중요하다면서 “그가 조선 사회에 던진 충격파는 마침내 단단한 성리학적 조선사회를 붕괴시키고 근대 사회로 향하는 문을 여는 계기가 됐다”고 말하고 있다.

 

‘백서’는 가로 62㎝, 세로 39㎝ 크기의 흰 세명주(細明紬)에 가는 붓으로 122줄, 13,384 글자를 한문으로 써나간 것인데, 비단에 작성한 것은 압록강 건너 구룡성과 봉황성 사이에 위치한 책문(柵門)에서 몸수색을 당할 때 발각되지 않도록 저고리 안에 꿰매 입고 가기 위해서였다.

 

황사영이 이 백서를 황심 토마스의 이름으로 써나갔고, 이 편지가 완성되면 황심이 옥천희에게 전달해서 북경 주교에게 가져가도록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황 토마스가 음력 8월 26일 배론 토굴로 황사영을 찾아와서 주문모 신부의 순교 소식 등 서울의 교회 사정을 전해주고, 백서의 초고를 검토하면서 이 계획은 좀 더 구체화되었다.

 

“옥천희 요한 형제로 말할 것 같으면, 7,8년 전부터 동지사(冬至使)의 마부로 북경을 왕래하면서 장사를 해오던 사람이에요. 3년 전 사행(使行) 때 처음 알게 된 다음, 재작년 10월 북경에 머물면서 북천주당으로 그를 데려가서 주교님을 함께 뵈었지요.”

 

“참으로 잘 된 일입니다. 그런 든든한 인편을 마련해두었으니, 천행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 가운데 황심이 마흔다섯 살 정도로 나이가 가장 많고, 일찍이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문전을 드나들며 신자가 되었던 사람이다. 황사영은 스물일곱 살로 가장 젊었으며, 옥천희가 서른다섯, 김한빈은 서른일곱 살이었다.

 

“그래서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세례까지 받게 하고, 지난 겨울 돈 40냥과 함께 주신부님의 서찰을 들려주어 또 다시 동지사를 따라 나서게 했던 것이에요.” 그런데 일이 틀어지고 말았으니, 황심과 사영이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옥 요한은 이미 6월에 귀국하다가 의주에서 포교에게 체포돼 서울로 압송됐고, 신문 과정에서 황심의 이름이 나와 9월 15일 춘천에서 황심 역시 붙잡히고 말았다.

 

한편, 신유박해 초기인 2월 10일 정약종 순교자의 아우 약용을 국문 공초하면서 ‘황사영’의 이름이 관변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정약용의 집에서 압수한 서찰 중에서 황사영의 편지가 발견됐고, 약용이 사영의 신앙생활을 진술함으로써 의금부에서는 같은 날짜로 권철신, 조동섬과 함께 그를 잡아들이라는 체포령을 내렸다. 권철신과 조동섬은 2월 11일과 12일에 각각 체포돼 왔으나 사영은 멀리 피신해 7개월 이상 숨어 지내고 있었던 것인데, 옥천희와 황심이 체포되는 바람에 그만 붙잡혔다.

 

황사영이 ‘백서’를 완성한 것은 신유년 9월 22일(양력 10월 29일)이었고,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29일 포청에서 급파된 도사 이면구(李勉求)가 배론에 당도해 황사영을 체포하고 의금부로 압송했다. 김한빈도 함께 붙잡혔다. 이때의 상황을 달레 신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포졸들이 배론으로 급히 달려왔으나 그들이 찾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지하실 위를 걸어 다닐 때 커다란 옹기그릇들이 내는 둔탁한 소리가 그들의 의심을 일으켜 황사영은 발견됐다. 그는 포졸들이 오는 것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그는 전에 임금이 쥐었었고 왕의 은총의 표로 비단이 감긴 손목을 만지지 말라고 명령했고, 이 명령은 지켜졌다. 포졸들은 그를 쇠사슬로 결박해 서울로 데려갔는데, 그의 몸에서 옷 속에 둘둘 말아 지녔던 그 유명한 편지가 나왔다.”

 

황사영은 체포 당시 상복을 입고 있었는데, 이는 서울을 빠져나갈 때부터 입고 다니던 복장이었고, 성도 이(李)씨로 바꾸었으나 이내 밝혀졌다. 10월 5일자 ‘순조실록’ 등 신유박해 자료는 영사(領事) 심환지가 어전에서 아뢰는 말을 전해준다.

 

“포도청에서 황사영을 체포했는데, 현장에서 압수한 문서가 지극히 흉악했습니다. 봄철의 옥사에서도 역시 죄목을 하나하나 들어 논했지만, 그 ‘운운(云云)’한 바가 지극히 패악하니 아래에서 마음대로 보고 그만 둘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포도대장이 방금 문서를 가지고 밖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곧바로 입시토록 명하여 안에서 살펴보고 또 대왕대비께서 보시는 과정을 거친 다음, 뒷날 추국의 명을 내릴 때 봉하여 내려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임금이 좌·우 포도대장에게 입시토록 명령하자 좌변포도대장 임률과 우변 포도대장 신응주(申應周)가 밀봉한 문서를 바쳤다. 이렇게 해서 ‘황사영 백서’가 조정에 알려지게 됐으며, 백서의 내용은 당시 조선 조정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며칠 동안은 ‘호남의 사도’ 유항검 등에 대한 처벌 등으로 미루어지다가 10월 10일 황사영과 황심, 옥천희, 김한빈 등의 심문이 시작됐고, 10월 13일에 다음과 같은 상소가 있었다. “아! 저 황사영은 어떤 모양의 흉악하고 횡포한 기(氣)에서 나온 종자인 줄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사학의 무리에 깊이 빠져서 강상(綱常), 곧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죄다 없앴고, 그 다음에는 몸을 빼 달아나 숨어서 엄명에 항거했으며, 마침내는 한 장의 백서에 그 흉악한 역적의 마음보를 드러냈는데도, 이와 같이 그는 무난합니까?”

 

‘백서’를 써서 북경의 구베아 주교께 보내려던 황사영의 꿈은 산산이 깨어지고, 이제는 그가 ‘흉서’를 쓴 대역부도 죄인으로서 나라의 엄한 심판을 받게 됐다. 머리에는 큰 칼이 씌어졌고 발에는 차꼬가 잠겨 있었다.

 

“너한테서 발견된 흉서는 누가 만들었느냐?”

 

“제가 만들었습니다.”

 

“너 혼자 만든 것이냐, 아니면 누구와 함께 의논해서 만들었느냐?”

 

“저 혼자 만들었습니다.”

 

판의금 판사에 영중추부사 이병모를 비롯해서 영의정 심환지, 좌의정 이시수, 우의정 서용보, 판의금부사 이만수, 이서구 등이 열석한 가운데 백서를 쓴 이와 발신인 등에 대한 신문이 있었고, 그 다음날에는 백서 내용에 대한 조사가 진행됐다.

 

“너는 조선 사람이 아니고 딴 나라 사람이냐? 어찌해서 조선 사람으로서 제 나라의 약점과 잘못된 점을 그처럼 문자로 낱낱이 적을 수가 있단 말이냐? …더욱이 나라에서 금하고, 또 네가 배워서 잘 아는 성현의 가르치심에 위배되는 사학에 물든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제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극흉 무도한 흉계를 타국 놈들에게 의뢰하고자 한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아는가 말이다!”

 

“대저 소인도 유학의 사서오경을 다 읽었사오나 학문이란 것은 사람을 깨우치고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인도하는 것이련만, 학문이란 것이 어디 이 세상에 한 가지 뿐이겠습니까? …중국인 주문모 신부만 하더라도 그분이 자기 모국을 버리고 우리나라에 온 것이 무엇을 탐해서 왔겠습니까? 우리 동포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말과 풍속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6,7년 동안이나 고생 고생하다가 아무 죄 없이 죽임을 당했으니, 비록 미소한 곤충도 밟히면 제 생명의 위협을 염려해서 꿈틀거리거늘, 하물며 우리 성교인(聖敎人)도 이 나라의 백성이요, 이 나라 임금의 적자이온데, 위정자나 유학자들이 나라를 진심으로 위하고 백성을 아끼는 마음이 있다면 무조건 무참하게 죽이기보다 먼저 우리나라의 국시인 유학의 정확성을 높이 현양하면서 외래 종교에 대한 비판적 결점과 요사한 점을 이론적으로 지적해서 선정을 베풀어 그들이 스스로 깨달아 뉘우치도록 해야 할 것이거늘, 마치도 적군과 같이 취급해 살육으로만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하니, 우리는 자위와 정당방위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외다.”

 

“무어? 정당방위책으로 이런 흉측한 서찰을 작성했단 말이냐?” 

 

황사영은 자신이 ‘백서’에 적은 내용의 정당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거룩한 교회와 백성들은 천하 만방에 널리, 또한 자유롭게 번성해 있는 같은 동포요 같은 지체이기 때문에, 권력만을 믿고 애매한 백성을 무참히 죽이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호소하려고 한 것이 제가 백서를 쓴 첫째 목적입니다. 또한 큰 군함에 군사만을 태우고 와달라고 요청한 것은 얼핏 보면 만고의 역적 행위요, 백번 죽어도 그 죄가 남을 것으로, 제가 어찌 제 나라를 쳐서 망하게 하려고 하겠습니까? 다만 권력만을 무리하게 행사해서 제 백성도 못 알아보는 위정자들에게 한바탕 위세를 보여줌으로써 그 잘못을 깨닫도록 해 달라는 취지에서였습니다. 이것이 그 두 번째 목적입니다.”

 

사영은 계속해서 우리나라는 중국에 예속되어 임금과 위정자들이 사대사상에 급급한 나머지 자주적으로 국정을 펴나가지 못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이런 처지에 종주국을 속여 가면서까지 온갖 불법을 감행하고 만만한 제 백성에게는 없는 잘못을 뒤집어 씌워 죽이는 것만 장한 일로 알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 위에서 우리 임금의 성은과 보살핌 아래 살아보려고 부득이 종주국에 대해서 우리 조정에 경고하고 감시해달라고 호소한 것이 백서를 쓴 세 번째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우리 조선의 거룩한 교회는 아직 중국 북경교구에 속해있기 때문에 서로 연락을 신속하게 하기 위해서 변문에다 비밀 연락인을 배치하자는 것이 네 번째 목적이고, 우리 교회는 세계적인 종교라서 로마 교황의 통치하에 움직이는 만큼 우리 교황성하께서 중국 황제에게 서신으로라도 조선의 이 참혹한 현상을 잘 살펴 시정토록 해주십사, 호소한 것이 그 다섯 번째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사영은 선정을 베풀어줄 것을 조정에 호소했다.

 

“여기 다섯 가지 호소에 대해 우리 위정자들은 조선 천주교인들의 안타깝고, 달리 모면할 수 없는 가련한 처지를 넉넉히 헤아리시어,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대역부도로 다루지 마시고, 선하고 올바른 정치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랄 뿐이옵니다.”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너 혼자 한 것이 아니고, 반드시 조종하는 자 있을 것이니, 이실직고하렸다!”

 

“그것은 전부 저 혼자서 창안해낸 것이옵니다.”

 

“거짓말을 삼가라! 반드시 배후 조종자가 있을 터인즉, 네놈이 바로 대지 않으면 바른 말이 나올 때까지 맞아야 한다! 여봐라, 저 놈을 매우 쳐라!”

 

한편 같은 해 10월 13일, 홍희운(洪羲運)과 신구조(申龜朝)가 올린 상소 등에 따라 조정에서는 황사영의 배후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귀양 중에 있던 정약전과 약용 형제를 서울로 불러 올려 금부에 가두고, 나머지 사람들도 속속 잡아들였다.

 

이보다 앞서 10월 24일에는 사영의 공범자로 밝혀진 황심과 김한빈을 처형했고, 동짓달 초하루에는 정약전 형제와 이치훈, 이학규, 신여권 등을 다시 심문하기 시작했으며, 그 다음날에는 이들에게 매질을 가해 사영과 대질심문을 시도했고, 이들에게 고문을 가하는 심문은 11월 4일에도 계속됐다. 그러나 11월 5일 대왕대비는 우부승지 홍희운에게 내린 전교를 통해 “여러 죄수가 전후에서 한 진술이 황사영의 흉서와 긴밀한 관계가 없는 듯하니, 옥사를 오랫동안 끌 필요가 없다. 참작하여 처리하는 방도가 있어야 마땅하다”는 처분을 내림으로써, 이들은 사형을 면하고 그 대신 이치훈은 제주목(牧)의 외딴 섬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현으로 유배하고, 이학규는 경상도 김해부에, 신여권은 고성현에, 이관기는 전라도 장흥부에 정배조처하라는 최종 판결이 났다.

 

같은 날 5일에는 황사영이 서소문 밖 형장에서 능지처참의 형을 받아 순교했다. 사형 판결문은 다음과 같았다.

 

“죄인 황사영은 원래 정약종의 조카사위로서 사학에 빠져 주문모 입국한 후에 그를 스승으로 여기고 아비라고 불러 영세하고 교명까지 받았다. 체포 명령이 내린 가운데 틈을 타서 산골 속에 잠복하여 가만히 불궤(不軌), 곧 모반을 꾀해 황심, 옥천희와 더불어 서로 뜻이 같고 배짱이 맞아 백서를 꾸며서 서양인 집으로 보내려 했다. 그 흉서에 말한 것은 글자마다 흉측하고 구절마다 역심(逆心)이어서 위를 범하는 기막힌 말뿐이었고, 나라를 원수로 삼는 계획이었다. 그래서 대역부도죄로 결안한다.”

 

능지처참(陵遲處斬). 머리와 팔, 다리, 몸뚱이를 토막치는 극형에 처했으니, 그는 지상 여정의 마지막 순간을 이토록 큰 어려움 가운데서 맞이하고 하느님께로 나아갔다. 그 후 <다블뤼 주교 비망기> 제4권 ‘조선순교자 비망기’에 ‘황사영’은 “국가에 해를 끼쳐 선정이 보류”됐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0년이 지난 21세기 초 한국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가 ‘하느님의 종’을 선정하면서 “황사영이 순교자인 것은 확실하지만 교회 밖, 즉 국가에 해를 끼칠 수도 있는 행위를 했기 때문에 제외했다”고 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어떻게 맞이하셨을까?

 

[2008년 7월 15일 연중 제16주일 ~ 2008년 10월 21일 연중 제30주일 의정부주보, 최홍준 파비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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