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아버지와 아들 하느님의 종 홍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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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5-05 ㅣ No.802

아버지와 아들 ‘하느님의 종’ 홍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레오

 

 

신유박해 때인 1801년 2월 26일은 양력으로 4월 8일이었다. 이날 서울 서소문 밖 형장에서 여섯 사형수가 하느님을 따른 죄목으로 참수형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끝까지 하느님을 증언하면서 순교의 길을 간 것은 아니었다. 이들 중에는 1784년 봄 북경에서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 한국 천주교회 창설의 계기를 마련했던 이승훈 베드로도 포함돼 있다. 만 45세였던 그에 대한 결안, 즉 사형을 결정한 문서를 보면, 진리에 대한 왜곡의 정도가 어느 만큼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서양의 나쁜 책들은 고금을 통해 유례없는 흉악한 것이다. 거짓말로 예수라는 자를 선전하여 세상을 속인다. 그것들이 천당과 지옥이라 하는 것은 불도(佛道)를 잘못 모방한 것이며, 신부(神父)라는 것은 인륜을 없애는 것이다. 그것들은 재물과 여자들을 공동으로 소유할 수 있으며 형벌과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없다 한다. 그들의 말은 모두 악랄하고 난잡하고 뻔뻔스러운 것이니, 성현들은 그것을 배척해야 하고 백성들은 그것을 물리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고는 영세를 하고 그 책들을 사서 만리나 되는 곳에서 가져와 친척과 인척 사이에, 서울과 시골에, 가까이 또는 멀리 퍼뜨렸다. 그것은 또 사소한 일이다. 그는 양인들을 상통하고 그들과 연락했으며, 윤유일과 더불어 고약한 비밀 음모를 꾸몄고, 정약종과 함께 가증스런 일을 꾀했다. 임금께서 법을 내리셨을 때 피고는 자기를 인도하는 악령들을 거울 속에서 보듯 했으되, 겉으로는 회개하는 체하면서 내심으로는 타락과 무분별을 계속했다. …”

 

여기서 ‘회개’라고 하는 말은 이승훈이 한때 ‘배교’했음을 일컫는다. 이 문제는 여러 가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있으며, 바로 이 때문에 훗날 교회가 시복 시성 대상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이승훈을 제외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가하면 다른 다섯 사형수는 ‘보배로운 죽음’을 맞이했다고 교회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렇게도 곧은 성격과 그 고귀한 진실성으로 선왕의 총애를 받았던” 최필공 토마스와 “열성 있는 총회장” 최창현 요한,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홍낙민 루카, 그리고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순교자가 그들이다. 이 가운데 홍교만 순교자는 원래 한양 출신이지만 경기도 포천으로 이사 가서 살았고, 같은 신유년 섣달 스무이레, 양력 1802년 1월 30일 포천에서 순교한 홍인 레오가 그의 아들이니, 의정부교구 순교자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해오고 있었으며, 그도 높은 벼슬을 지낸 맏형과 함께 일찍부터 학문에 힘써 진사가 되었다. 레오보다 하루 앞서 순교한 홍익만 안토니오는 프란치스코의 이복 동생이며, 역시 신유박해 때 순교한 정철상 카롤로는 그의 사위이니, 철상의 아버지 정약종 순교자는 사돈이다.

 

어느 교회사학자는 순교자 한 사람에 배교자가 세 사람 꼴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조선시대 후기의 가톨릭 순교자가 8천명이라고 한다면 2만수천 명이 배교했다고 말할 수 있고, 그 많은 사람들이 참으로 하느님을 떠나고 말았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오늘 우리 시대에 그런 박해가 또 다시 자행된다면 몇 사람이나 순교할 것이며, 돌아서는 이는 또 얼마가 될까.

 

순교와 배교. 하느님의 뜻을 행하면서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것인가, 아니면 나의 이득을 취하면서 하느님을 거스르고 말 것인가. 사실 오늘 우리는 일상생활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에 거역하기를 다반사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본의 대표적인 가톨릭 작가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1996)는 순교소설 ‘침묵’에서 성화를 그려놓은 ‘후미에’를 밟고 지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하느님을 배반한 것인가”라고 하면서 동시에 “당신 백성들이 이토록 고통을 겪고 있는데도 하느님, 당신은 왜 침묵만 하고 계십니까?”라고 묻고 있다.

 

배교자에게 그토록 큰 어려움이 있었다면, 그야말로 순교한 이들의 행위는 실로 얼마나 영웅적인 것이겠는가!

 

지난주에 우리는 조선교회 창설 주역 가운데 한 분이었던 이승훈 베드로의 ‘회개’ 또는 ‘배교’에 대해서 잠시 나눠봤지만, 한 신앙인으로서 처음의 뜻을 끝까지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가 나누고자 하는 아버지 홍교만과 아들 홍인 부자 순교자의 삶과 죽음은 분명 남다른 데가 있다.

 

홍인 레오와 그의 가족이 천주교 신앙을 만나게 된 것은 1791년 무렵이었다. 그의 아버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교만(1738-1801)이 양근 땅에 살던 고종사촌 동생 권일신(1842-1791), 그도 역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였는데, 그로부터 교리를 배우면서 ‘새 사람’을 입게 된 것이었다. 이후 레오는 아버지로부터 교리를 배웠는데, 천주교 신앙을 진리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은 오히려 아버지보다 아들이 먼저였다.

 

초기 교회 신앙인들은 대부분이 서로 친인척 사이로, 양근의 권철신(1736-1801), 일신 형제와 홍교만은 내외종간이다. 홍교만의 고모가 권씨 형제들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이들 철신, 일신 형제는 성호 이익과 그의 수제자인 안정복의 가르침을 받은 이가환, 이벽, 이승훈과 정약전, 약종, 약용 3형제들과 더불어 한문으로 된 천주교 서적들을 읽고 토론함으로써 훗날 천주교를 수용하기에 이른 주역들이었다. 1784년 조선에 교회가 세워진 다음 이들은 모두 1세대 지도자로서 활동했고,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운 홍교만은 아들이 먼저 ‘레오’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자, 이번에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다가가서 하느님의 진리를 역설했다.

 

천주교에 입교한 뒤 홍인 레오는 세속의 꿈을 모두 버리고 하느님을 섬기고 교리를 전하는 데만 열중했다. 그러면서 효성을 다하는 길은 아버지를 신앙으로 이끄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해 먼저 그의 의심을 풀어드리고자 했다.

 

“아버지,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신 분입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예수님께서 마음만 잡수신다면 천지만물을 뒤흔들 힘이 있으신 데도 불구하고 당신을 못 박은 사람들을 하나도 상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야말로 그분께서 지극히 인자하신 까닭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무릇 복수에는 두 가지가 있느니라. 나에게 해를 끼친 자에게 복수를 하지 않고 용서해주는 일은 옛날의 군자들도 그렇게 했느니라. 그러나 만약 임금과 부모의 원수를 갚는 데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대로 따른다면 이 세상에 정의가 사라지고 말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버님!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정의는 구현돼야 하지만, 사랑이 바탕이 돼야 한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몸소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레오는 아버지의 의심을 풀어드리면서, 입교를 망설이는 그를 설득해서 마침내 신앙으로 이끄는 데 성공했다. 1794년 12월 24일, 음력으로 섣달 초사흗날 자정 무렵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입국해 새해 정초 서울에 도착하자 레오는 아버지와 함께 주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고 미사에 참석했다. 그리고 서(庶) 5촌 당숙인 홍익만 안토니오, 황사영 알렉시오 등과 함께 교류하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나갔고, 아버지와 함께 포천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도 힘써 노력했다. 홍 안토니오는 1785년에 천주교 교리를 듣고 명례방 주인 김범우 토마스를 찾아가 교회 서적을 빌려 읽었으며, 이승훈 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후 그는 교회 지도층 신자들과 교류하면서 교리를 연구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홍교만, 홍인 부자와 같이 신유박해 순교자로서 124위 ‘하느님의 종’ 가운데 한 분이다.

 

이때 레오는 서른여덟 살이었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한 아버지 홍교만은 쉰여덟 살이었다. 프란치스코는 비신자 친구들과의 교제를 끊고, 자신의 학식을 이용해 더 깊이 교리를 연구하는 데 노력하면서 글을 잘 알지 못하는 신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가르치고, 냉담자를 회두시키기도 했다.

 

교회가 창설된 이후 이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성직자 주문모 신부는 1895년 초부터 1801년 5월 31일 순교할 때까지 6년 반 동안 사목과 선교활동을 펼치면서 홍 프란치스코에게 세례성사를, 그의 아들 레오에게는 보례(補禮)를 집행하는 등 이 땅의 백성들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보례는 이미 평신도가 물로 씻는 예식만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성직자가 세례성사의 다른 부분을 보충해서 집전하는 것을 말한다.

 

주신부는 맨 먼저 서울 계동 최인길 마티아의 집으로 인도됐다. 집 주인은 신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 밀고자에 의해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고 말았다. 다행히 교우들의 재빠른 처신으로 주 신부는 마티아의 집에서 빠져 나와 여회장 강완숙 골롬바의 집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이것이 저 유명한 ‘주문모 실포사건’(失捕事件)이다. 체포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라는 뜻이다. 평신도들이 사제를 지키기 위해 얼마만큼 용감하게 행동했는지, 이는 곧 이웃 안에 계신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은 사건으로서, 주신부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마티아는 신부에게 피신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머리를 자르는 등 자신이 중국인 신부로 위장하고 집에서 포졸들을 기다렸다. 그가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중국어를 알았으므로 이런 계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인은 어디 있느냐?”

 

포졸들이 묻자 최인길이 중국어로 대답했다.

 

“나요, 나!”

 

그는 곧 붙잡혀 포장 앞에 끌려 나갔다.

 

“아아니, 그 중국인은 수염이 많다고 들었는데, 너는 어찌하여 수염이 없느냐?”

 

결국 위장은 오래 가지 못했고, 마티아의 신분이 드러났다. 마티아는 주 신부를 안전하게 피신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곧 신부의 입국 경위가 밝혀지고, 그의 입국을 도운 밀사 윤유일 바오로와 지황 사바도 붙잡히고 말았다. 최인길과 동료들은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했고, 이때 그들의 신앙심에서 우러나오는 굳은 인내와 결심, 그리고 지혜로운 답변은 박해자들을 당황케 했다. 그들은 주신부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수없이 형벌을 가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에는 천상의 기쁨이 넘쳐 얼굴에까지 번졌다.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체포하려다 실패하고 최인길, 지황, 윤유일을 포도청에 가두어 고문을 가한 박해자들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당시 국왕 정조는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호의적이었으나 이 사건만은 그냥 넘겨버릴 수가 없는 사정이 있었다. 영의정 채제공이 임금께 아뢰기를,

 

“이는 신부라 칭하는 청국인의 입국을 범죄로 보아 그를 좇는 일이옵니다. 이 사건을 더 오래 끄는 것은 청나라와의 관계로 보거나 여러 모로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온 바, 속전속결로 처단해야 할 일인 줄로 아룁니다.”

 

그 결과 최마티아와 동료들은 그날로 사정없이 매를 맞고 숨을 거두게 되었으니, 이때가 1795년 6월 28일, 음력 5월 열이틀로, 당시 마티아의 나이는 30세였다. 박해자들은 순교자들의 시신을 강물에 던져버리고 말았다.

 

그 후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조선교회의 밀사로부터 모든 이야기를 들은 후, 마티아가 보여준 용기와 그의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공경하느냐?’는 질문에 용감히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모독하라고 하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참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기보다는 차라리 천 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단언했습니다.……최인길은 이승훈 베드로가 신앙 전파를 위해 선발한 최초의 회장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또 하느님의 영광을 증진하는 데 있어 열성과 믿음과 신심이 뛰어난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최인길 등 세 사람이 순교하자 정조 임금은 이 사건이 더 이상 확대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혹여, 이 일로 무고한 백성들이 다치거나 괴롭힘을 당하지 않도록 조용, 조용히 처리해야 할 것이오.”

 

그래서 수사망이 다소 느슨해지긴 했으나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해 주문모 신부에 대한 추적을 계속할 것을 요청한 데다 관청에서도 추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주신부는 괴롭기 그지없는 피난생활을 계속해야만 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야고보 신부는 아주 비밀리에, 그러나 열심히 성무를 집행했다. 이곳저곳으로 다니면서 성사를 베풀고 신자들의 교리 공부와 전교 활동을 위해 명도회를 조직했으며, 교리서도 집필했다. 신부를 찾아오는 교우들 가운데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아들 레오는 가까운 신자들과 공동체를 만들고 교회 활동을 도왔으며, 여기서 힘을 얻어 포천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크게 이바지했다. 친척인 홍 안토니오의 사위 홍필주의 집은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하부 조직이요 집회소였던 ‘6회’의 하나로 선정돼 있어서 정기적인 모임 장소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1784년 교회가 창설된 이후 성직자 없이 10여년을 지내면서 가성직제도 등을 통해 시행착오도 겪은 터라 교우들은 유일한 성직자인 주 야고보 신부가 여간 소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일정한 장소에서 떳떳이 신부를 모실 수 없었고, 더욱이나 을묘년 여름 ‘실포사건’ 때 서울을 벗어난 주신부는 충청도 연산으로 피신해서 덕산을 거쳐 전라도 고산과 전주 등지를 오가면서 교우들을 만나고 새 신자를 길러냈다. 1년 후 1796년 5월 서울로 돌아온 후로는 주로 홍문갑의 집에서 그의 어머니 강완숙의 보호를 받는 한편, 박해가 있을 때마다 서울을 떠나 모두 네 차례나 지방으로 피신하는 등 고달픈 생활을 계속했다. 이처럼 그가 활동한 지 6년이 지나면서 조선교회의 신자 수는 모두 1만 명에 달하게 됐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박해가 모든 것을 앗아가고 말았다.

 

박해가 일어나자 연이어 교우들이 체포됐고, 야고보 신부의 행방을 자백하도록 강요를 받았으나 끝내 말하지 않고 죽어갔다.

 

이때 홍인 레오는 아버지와 의논해 명도회장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책 상자를 받아 집안에 숨겨두었다. 그런데 한 신자가 이 상자를 다른 곳으로 옮기다가 체포되면서 그들 부자의 이름이 박해자들에게 알려지고 말았다. 그 무렵 레오와 부친은 다른 곳으로 피신해 있었다. 그러나 오래 숨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곧 집으로 돌아왔으며, 바로 그때 포졸들이 쳐들어와 그들 부자를 체포했다. 이윽고 포천으로 압송된 레오는 첫 번째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됐다. 그러나 그는 아무 것도 밀고하지 않고 신앙을 굳게 지킨 뒤, 경기 감영을 거쳐 포도청으로 압송됐다.

 

2월 14일, 레오의 아버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즉시 의금부로 압송돼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어떠한 위협에도 전혀 굴하지 않았으며, 박해자들 앞에서 끊임없이 ‘천주교 교리가 진리’라는 것을 설명했다. 실제로 박해자들이 오히려 그의 용감한 태도에 놀랄 정도였다.

 

“하느님은 천지의 큰 부모가 되시니, 어찌 큰 부모를 섬기지 않겠습니까? 또 큰 부모를 섬기는 천주교를 감히 사악한 종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천하의 진리이니, 예수 그리스도를 사악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편 야고보 신부는 자기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해 자신의 고국 중국으로 돌아가려고 결심하고 북으로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나의 양떼와 운명을 같이 해야 하겠고, 순교함으로써 모든 불행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수를 결심한다. 이렇게 스승 그리스도의 당부대로 ‘새 계명’을 지키면서 서로 서로 사랑한 나머지 교우들은 사제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사제는 교우들을 위해 죽을 준비를 하게 된 것이었다.

 

한국교회 초기 순교자들, 특히 주문모 신부와 당시 교우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 척도를 보면서 그보다 훨씬 훗날 20세기 중후반, 온 세상 지역교회 장상들이 보편교회 교부로서 공의회에 참석해 토론하고 교황이 반포한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인류의 빛’에 나오는 ‘성화소명’ 항목을 눈여겨 살펴보게 되는 것은 어인 까닭일까?

 

“완덕의 끈이며 율법의 완성인 사랑은 모든 성화수단을 이끌고 가르쳐 그 목표에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표시가 난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 목숨을 내놓으시어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셨으므로, 주님과 형제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는 사람보다 더 큰 사랑을 지닌 사람은 아무도 없다”(1요한 3,16; 요한 15,13 참조). 그러한 사랑은 곧 순교로 이어지고, 박해자에 대한 사랑으로까지 연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랑의 이러한 최대 증거를 모든 사람에게, 특히 박해자들에게 보여주도록,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첫 시대부터 부름 받았고 또 언제나 부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가 세상의 구원을 위해 죽음을 자유로이 받아들이신 스승을 본받고 피를 흘려 스승과 동화되는 순교는 교회에서 최상의 은혜로 또 사랑의 최고 증거로 여겨진다. 그러한 은혜가 소수에게 주어지는 것이지만, 모든 제자는 그 준비를 갖추어,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교회가 늘 겪고 있는 박해 가운데에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는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한다”(이상 ‘교회헌장’ 42항).

 

이후에도 홍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끊임없이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박해자들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에 따라 그는 정약종, 홍낙민(루가) 등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으니, 이때가 1801년 4월 8일 음력 2월 스무엿새로,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아버지가 순교하자 아들 레오도 포도청과 형조에서의 문초와 심한 고문을 받으면서 신앙으로 고통을 극복했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고향 포천으로 이송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했으니, 1802년 1월 30일, 음력으로 신유 섣달 스무 이렛날로, 당시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형조에서 그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너는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오랫동안 이를 믿어왔다. 너의 아버지가 교리를 가르치고 너는 이를 배웠으며, 깊이 여기에 빠져 마음을 바꾸지 않았으므로 경기 감영에서 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네가 저지른 죄의 실상을 보니,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 이 글 제2회에 나오는 ‘후미에’(踏繪)는 그 자체로 ‘그림을 밟는다’는 뜻을 지닙니다.

 

[2008년 5월 27일 연중 제9주일 ~ 2008년 7월 14일 연중 제15주일 의정부주보, 최홍준 파비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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