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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55: 13세기 (3) 프란치스코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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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2-27 ㅣ No.1081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55) 13세기 ③ 프란치스코 영성


차별 없는 형제애로 ‘가난’마저 품은 성인

 

 

조토 작 ‘가난한 자에게 자신의 망토를 주는 프란치스코’. 출처=가톨릭굿뉴스.

 

 

중세 초중반 서유럽 경제 활동은 주로 농업에 의존했고, 봉건 영주들과 수도원이 농산물의 유통과 소비를 독점하면서 농민들과 서민들은 가난에 쪼들렸습니다. 중세 중후반 상업이 번창하면서 나타난 상인들은 재화를 소유하는 새로운 주체로 나서게 되었지만, 서민들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여전히 풍요로운 수도원을 비판하며 교회를 떠난 사람들은 교회를 풍자하며 희화화했습니다. 이때 아시시의 프란치스코(Franciscus Assisiensis, 1182~1226)의 출현은 교회가 가난에 대한 입장을 재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한센병 환자를 통해 회심한 프란치스코

 

이탈리아 움브리아(Umbria) 지방 부유한 상인 가정 출신인 프란치스코는 그 시대 일반 교양 과목을 공부하면서 라틴어를 익혔고 프랑스어도 조금 배웠습니다. 아시시(Assisi) 젊은이들 사이에서 늘 지도력을 발휘했던 프란치스코는 1202년 고향과 앙숙이었던 인근 페루자(Perugia)와의 전쟁에 나섰다가 포로가 돼 1년간 옥살이를 했습니다. 게다가 1204년 심한 병을 앓았던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건강 상태를 인지했음에도, 1205년 또다시 아풀리아(Apulia)를 정복하려는 원정군에 참여하려고 나섰습니다. 그러다 환시를 체험하고 스폴레토(Spoleto)에서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스폴레토에서 머무르던 프란치스코는 한센병 환자와 만나는 경험을 통해 다시 한 번 회심을 체험하고, 아시시 변두리에 비어 있던 성 다미아노 성당에 거처를 잡았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성당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의 집을 재건하라는 말씀을 듣고, 집안 재물을 팔아 성당 재건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와 부자(父子)관계를 끊고 유산 상속까지 포기했으며,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교회에 자신을 의탁했습니다. 이후 프란치스코는 몇 년간 아시시 일대를 순회하며 통회의 삶을 살았으며, 성당 재건에 앞장섰습니다. 특히 프란치스코는 아시시 입구 평야에 있는 작고 허름한 경당인 포르치운콜라(Porziuncola)에 머무르면서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1209년 프란치스코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이야기에서 특히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마태 5,9)는 권고를 경청하고 가난한 삶을 받아들였으며 고행과 평화에 대한 설교에 매진했습니다. 1년도 되지 않아 이러한 프란치스코의 모습에 이끌린 형제가 11명이나 되었고, 프란치스코는 복음 말씀에 기초한 수도 회칙을 작성했습니다. 결국 1210년쯤 프란치스코는 동료들과 함께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PP. III, 재임 1198~1216)를 방문해 가난을 이상으로 하는 회칙을 구두로 인준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탁발 수도회는 ‘작은 형제회(Fratres Minores)’로 불렸습니다. 이후 프란치스코는 1221년 인준을 받지 못한 ‘첫째 수도규칙(Regula Prima)’을 제정했으며, 1223년 이를 다시 수정한 ‘둘째 수도규칙(Regula Secunda)’을 교황 호노리우스 3세(Honorius PP. III, 재임 1216~1227)에게 승인받았습니다.

 

 

가난한 삶으로 귀감이 되다

 

프란치스코의 삶과 가르침은 동시대 많은 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아시시 귀족 가문 출신 클라라(Clara Assisiensis, 1194~1253)는 1212년 프란치스코의 설교를 듣고, 프란치스코를 찾아가 수도자로 받아주길 청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클라라와 동료들을 인근 베네딕도회 수도원에 위탁했으며, 얼마 후에 그들을 위한 ‘가난한 부인회’를 설립했습니다. 이 공동체는 훗날 ‘클라라회(Ordo Sanctae Clarae)’로 불렸습니다. 클라라회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에게 애긍에 의지해서 살 수 있는 가난의 특권을 승인받았습니다.

 

평소에 무슬림을 개종시키고자 했던 프란치스코는 제5차 십자군 원정(1217~1221년) 시절이었던 1219년 이집트의 술탄(Sultan), 알카밀(Al-Kamil, 재위 1218~1238)을 방문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알카밀은 프란치스코에게 호감을 갖고 예루살렘과 인근 성지를 방문하고 설교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실제로 1217년 프란치스코의 동료 엘리야(Elias)가 십자군 주둔지였던 아크레(Acre)에 도착한 이후 오늘날까지 작은 형제회 수도자들은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며 팔레스타인 지역 그리스도교 성지들을 수호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1220년 아시시 인근 그레초(Greccio)에서 주님 성탄 대축일을 기념하면서 성탄의 의미를 가르치고자 최초로 성탄 구유를 직접 제작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성탄 구유를 보는 신자들에게 생동감 있게 성탄의 의미를 가르치고자 살아있는 동물들과 사람들로 이뤄진 실제 구유를 만들었습니다. 성탄 구유를 만드는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영성 생활

 

프란치스코는 1224년 대천사 대축일을 준비하고자 라 베르나(La Verna) 산에서 40일간 단식기도를 했는데, 십자가 현양 축일에 환시를 체험한 후 예수님의 못 자국과 동일한 상처가 생겼습니다. 동료였던 레오(Leo)는 세라핌(Seraphim)이 하늘에서 내려와 프란치스코에게 성흔(Stigmata)을 남겼다고 짤막하면서도 분명한 어조로 증언하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프란치스코 성흔의 경우는 가톨릭 교회 역사에서 공식적인 기록을 남긴 최초의 사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오상을 받는 신비체험을 하게 된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영성 생활을 실천하면서 예수님의 인성을 깊이 묵상하고 그리스도를 더욱 본받고자 노력했으며, 성체 신심을 키웠습니다. 이를 통하여 프란치스코의 생애를 관통했던 가난을 사랑하고 가난한 삶을 강조했습니다.

 

형제애를 깊이 묵상하던 프란치스코는 애덕의 범위를 넓혀서 창조된 세상과 생명 있는 모든 피조물까지 깊이 사랑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겸허한 마음을 지니고 어떤 차별도 없는 형제애를 실천했기 때문에, 자연까지 사랑하는 우주적 형제애를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Ioannes Paulus PP. II, 재임 1978~2005)께서는 프란치스코를 생태계의 주보 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보여준 차별 없는 형제애는 지원자의 상태가 평신도이거나 성직자이거나, 관상 생활을 원하거나 활동 생활을 원하거나, 학문 탐구를 선호하거나 사목 활동을 선호하거나, 결혼을 했거나 독신이거나 상관없이 수도회에 입회시켰습니다. 그 당시 이러한 파격은 교회뿐 아니라 중세 유럽 사회가 탈권위로 나아가는 데 일조했습니다. 또한 교회도 복음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가난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2월 25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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