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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성 베드로 파브르 신부 (2) 친구 이냐시오, 갈팡질팡하는 파브르를 주님 포도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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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2-11 ㅣ No.1075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성 베드로 파브르 신부 (2) 친구 이냐시오, 갈팡질팡하는 파브르를 주님 포도밭으로

 

 

- 파브르 신부.

 

 

파브르는 어릴 적부터 신심 깊고 명석한 아이였다. 1596년 파브르의 삶과 덕행에 대한 초기 조사가 시작되었을 때 그의 어린 시절을 알고 있다는 르 그랑보르낭 출신의 두 사람의 증언은 파브르의 깊은 신심을 잘 보여 준다. 

 

루이 블랑셰라는 사람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파브르는 6~7살 때 또래의 아이들과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하기엔 너무나 숭고한 일에 열중하였지요. 비록 친구들의 잘못을 책망하기도 하였지만, 그들에게 특별하고도 깊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또 다른 증인인 장 포샤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파브르는 이미 7~8살 때부터 거룩한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는 신앙심이 깊었고,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였습니다.”

 

파브르는 어려서부터 공부와 배움에 대한 강한 열정을 보였다. 그에게는 루이스와 장이라는 어린 남동생들이 있었다. 부모는 넉넉하지 못한 살림과 노동에 지쳐 파브르가 빨리 어른이 되어 자신들의 짐을 좀 덜어 주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파브르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아직 10살이 되지 않았던 그때 나는 공부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하지만 나는 양치기였고, 부모님은 내가 일하기를 바라셨다. 나는 배움에 대한 열망이 매우 컸기에 매일 밤 침대에서 울기만 했다.” 

 

파브르는 영리하고 기억력이 좋은 아이였다. 주일과 축일에 가족들은 생 장 드 식스트 성당 미사에 참여하였다. 일곱 살 무렵 파브르는 본당 신부의 강론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사람들 앞에서 말했다. 파브르의 또래 친구들이나 어른들은 파브르의 이런 모습에 놀라워했다. 르 포수아르의 카르투지오회 수도자로 있던 친지들은 파브르에게 배움의 열망을 심어 줬다. 

 

매일 밤 학교에 대한 열망으로 우는 아들을 본 부모는 결국 마음을 바꿨다. “부모님은 줄곧 반대하셨지만 결국 나를 학교에 보내기로 하셨다. 내 학업의 진보를 보시고 계속 공부하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동시에 하느님은 나를 공부 이외의 다른 것에는 매우 서툴고 거의 쓸모없는 사람처럼 만드셨다.”

 

파브르는 그의 집에서 10㎞ 떨어진 톤에 있는 학교에 입학했다. 부모는 성적이 우수한 아들을 계속 공부시키기로 했다. 파브르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1517년 고향에서 19㎞ 떨어진 라 로슈로 갔다. 그리고 마침내 1525년 19살의 파브르는 라 로슈에서 배운 것들을 정리한 노트를 들고 파리로 향했다. 

 

그가 파리로 가기 20년 전만 하더라도 파리의 대학생들은 나태하고 방탕한 생활을 즐겼다. 심지어 타락한 수도자들은 수도복조차 입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 교회, 남녀 수도회, 대학, 대성당 등이 대대적인 개혁을 시도한 끝에 파브르가 파리에 와서 공부할 때쯤엔 안정적이고 건전한 문화가 자리 잡았다.

 

파브르는 생트 바르브 대학에 입학했다. 입학한 지 1년이 채 안 돼 그리스어 실력을 인정받았다. 교수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장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파브르에게 물을 정도였다. 

 

그는 이냐시오를 만나기 전에 이미 하비에르와 같은 방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비에르는 운동을 잘했다. 하비에르는 파리 시내에서 가장 뛰어난 장대높이뛰기 선수였다. 하비에르는 자유 시간 대부분을 학교 운동장에서 다른 학교 학생들과 어울리며 운동으로 시간을 보냈다. 하비에르는 졸업 후 보베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하고 싶어 했다.

 

공부를 잘했던 파브르는 잘생긴 외모뿐 아니라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다정하고 부드럽게 말을 해 학교에서 인기가 많았다. 파브르는 미래에 무엇을 해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세심증으로도 고생했다. 대학 구내의 이발사에게 팁을 얼마나 줘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또 고해성사를 본 후에는 자신의 모든 죄를 충분히 잘 고백했는지를 심각하게 걱정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바람이 불 때마다 마음이 왔다 갔다 하였다. 어떤 날은 결혼하고 싶었고, 어떤 날은 의사가 되고 싶었고, 또 어떤 날은 법률가, 교수, 신학자, 교구 사제가 되고 싶었으며, 심지어 때로는 수도자가 되고 싶었다.” 

 

당시 이냐시오는 18개월 동안 몽테규 대학에서 라틴어를 공부한 후 1529년 10월 초 새 학기를 시작할 때 생트 바르브 대학으로 옮겨 왔다. 하느님의 섭리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모르지만 이냐시오는 파브르와 하비에르가 사용하고 있는 방으로 이사했다. 이냐시오는 다른 학생들보다 15살이나 많았다. 파브르는 이냐시오에게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르쳐 주었고, 이냐시오는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파브르를 하느님의 포도밭으로 인도했다. 

 

파브르는 이냐시오가 자신을 어떻게 다뤘는지에 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방과 테이블 그리고 돈까지도 함께 사용하는 친한 친구가 됐다. 그는 나의 영적 지도자가 되어 하느님의 뜻을 확인할 수 있는 규칙들을 알려 줬다. 후안 카스트로에게 총고해를 하도록 조언해 줬다. 그리고 매주 고해성사와 성체를 모시도록 안내해 줬다. 생트 바르브에서 우리의 행동양식을 함께하는 다른 사람들과 4년 동안 모든 것을 공동으로 했다. 나의 영은 허영심의 강을 건넜다. 그리고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며 치료약을 찾았다.”

 

1533년 파브르는 가족을 방문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월까지 파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당시 일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사부아에서 여러 달을 머물렀다. 아버지는 아직 살아 계셨지만, 어머니는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2월 10일, 김치헌 신부(서강대 영문학과 교수,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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